교착(2)
하얀 촉수의 움직임은 수영의 종아리에서 멈췄다.
허벅지까지 올라가지 않은 건, 이 친절한 반장에게 견하가 베푸는 작은 존중이었다.
“시치미를 떼려면 ‘천손민족협회랑 연락? 반역자잖아. 태사님 일이야?’처럼 말했어야지. 분명히 들어놓고 못 들은 척, 이해 못 한 척해도 소용없어.”
수영은 입술을 씹었다.
안됐지만, 고작 여고생이 자신을 추적하는 의심으로부터 첩보소설처럼 도망치는 건 어렵다. 수영의 능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이게 ‘보통 사람’의 한계겠지.
“어떻게 할 거야. 죽일 거야? 아니면 고문이라도 하게?”
의연하게 따져 묻고 있지만, 아까보다 더 떤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그렇게 했어. ……너무 노려보지 마.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내가 지금 접촉할 수 있는, 문하시중 쪽 사람은 네가 유일해. 그래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평화협정을 제안하고 싶어.”
***
허동주는 침착하게 전력을 끌어모았다.
“내 예상보다, 미리안은 더 뛰어나다.”
자신을 급습해 평양으로 허겁지겁 피신하게 했다. 자신의 전력이 여기저기 분산되게 만들었다.
몽골과 일본의 예상치 못한 개입까지 끌어냈다.
하지만 허동주는 흔들리지 않았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 내전 초기, 며칠 만에 수도를 제압한다는 작전은 실패했다. 여기에 더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주는 묵묵히 전선을 만들고, 차근차근 리안을 압박해나갔다.
“서두르지들 마라. 물자와 사람을 끌어모은다. 이번엔 ‘대공세’다. 이걸로 태사에게 확실한 타격을 준다.”
동요하는 참모들을 그렇게 달랜다.
“리안 네가 외교적인 수단을 쓴다면, 나도 마찬가지다.”
몽골이 개입한 데 착안해, 허동주는 현 몽골 카간의 동생들인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칸에게 접근했다.
그렇게 하면 뭔가 소득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키타이의 울제이 칸과 낭키아스의 게레센제 칸은 흔쾌히 물주가 돼줬다. 아마 큰형인 몽골 카간의 영향력이 이 이상 커지는 걸 방해하고 싶었겠지.
한족의 봉기를 억제해야 하기에 산동 총독 신수덕을 부르지 못하는 게 아쉽다. 그래도 동주에겐 여전히 패가 남아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허동주의 책상 위에는 그를 기쁘게 하는 두 건의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하나는 전에 명령을 내린,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 함께 진행하는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는 보고였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몽골은 내전에서 발을 빼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보고는, ‘도산서원’에서 올라왔다.
“‘척준경 프로젝트’의 완성인가…….”
허동주는 얼굴 가득, 주름이 깊이 패도록 웃었다. 승기가 있는 정도가 아니다.
승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
이 무렵 견하가 진행 중인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루우의 포섭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전 발발 직전, 황궁 앞에서 리안을 죽이려 했던 소령의 뒷조사였다.
루우를 포섭하려면 일단 루우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해야 했기에, 견하는 이 일을 효윤과 지나, 두 사람에게 맡겼다.
효윤에겐 학교생활 중에 루우의 개인사 같은 이야기를 빠짐없이 수집해 달라고 부탁했다. 루우는 강력한 이단이니 그녀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상대하는 역할은 효윤이 적절했다.
이단이 아닌 지나에겐 서류 업무를 맡겼다. 외무성이나 군 정보기관, 구 야별초에서 긁어모은 몽골에 대한 정보 중, 루우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 법한 정보를 찾아내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선배, 학업이랑 같이 하기엔 일이 너무 많다구요.”
칭얼대듯 말하는 지나에게 견하는 대답했다.
“대신 한동안 소년감찰국 일반 업무에선 제외해 줄게. 기한이 따로 있는 일은 아니니까 틈틈이 해뒀다가 내가 요청하면, 한 만큼만 제출하면 돼.”
교내의 천손민족협회 소년부 잔당들이 지나의 냄새를 맡았을 수 있다.
한동안은 이런 식으로 일선에선 빼는 게 좋겠다는 계산이기도 했다.
리안을 죽이려던 소령의 조사를 맡길 사람을 고르는 데는 약간 고민이 필요했다. 항복한 구 야별초 잔당 중에서 사람을 뽑을까, 아니면 리안을 통해 군 정보기관에 맡길까, 그것도 아니라면…….
***
배영훈은 소년의 부름에 지체없이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국장 각하.”
나이가 어려도 그는 대령이다. 10대, 20대로 이루어진 최고수뇌부가 마치 소꿉놀이 같다는 불손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견하와 루우의 전투를 보고 나선 그런 생각을 싹 치워버렸다.
야별초 본부 진압 작전에서 죽은 반역자들처럼 처참하게 죽고 싶지 않다면, 그냥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게 좋다.
소년의 외양이 아니라 그의 계급만 머릿속에 넣고 다니자.
“아, 바쁠 텐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견하는 서류로 향해 있던, 곱상하게 생긴 얼굴을 들어 배영훈을 본다.
배영훈은 그 얼굴의 윤곽이 아니라 눈에 주목했다.
소년이 자기 나이답지 않게 뿜어내는 침착함은 바로 저 눈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닙니다, 각하.”
태사는 견하의 일 하나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다른 게 아니라, 황궁 제압 작전 때, 태사 각하를 시해하려 했던 그, 반란군 소령에 대한 조사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약간 놀랐지만, 배영훈은 되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견하의 눈에 다른 무언가가 깃드는 것을 봤다.
이 소년은, 분명 암살자들에게 부모를 잃었다고 했었지.
거기서 비롯된 광기, 분노, 그런 게 눈에 깃드는 것 같았다. 그런 눈빛인데도, 견하는 얌전한 어조로, 다소 잔혹할 수도 있는 임무를 배영훈에게 맡겼다.
“그 사람, 배영훈 소령이 사살했다고 했죠?”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묻는다. 그게 살짝 섬뜩했다.
“그렇습니다.”
“내전 발발 직전에 사살당한 데다, 군에서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지, 그 소령의 가족은 아직 살던 집에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퇴거시킬 필요는 없고, 업무 인계를 위해 물품을 좀 가져가러 왔다고 하면서 조사를 해주세요.”
피해자 유족들의 집을, 가해자가 가서 조사하라는 말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 유족들은 자세한 사정은 모를 거예요. 배영훈 소령이 사살한 줄도 모를 겁니다. 가서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다른 정보는 없는지 최대한 수집해 주세요.”
배영훈은 경례를 올렸다. 떨림을 감추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는 견하의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유능한지, 무능한지, 그런 건 아직 판단하기 일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주견하는 대단히 위험한 인간이다.
태사는 자신의 어린 애인에게 그냥 한 자리 맡겨둔 게 아니었다. 소꿉놀이 따위가 아니었다.
야별초 소년감찰국 국장.
주견하는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인물이었기에 앉아 있었다. 그 소년은 그런 자리에 알맞은 유형의 인간이었다.
***
루우에게 말하지 못했던, 안세규가 제국입헌당을 방해할 경우 견하가 내놓을 대비책.
그건 바로 허동주와 미리안의 평화협정이었다. 이는 견하가 진행하는 두 임무와는 별개로, 견하의 독자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예를 들어 안세규나 민국 정부 인사들이 리안을 몰아낼 음모를 꾸밀 때를 대비한 수단.
이 수단을 쓰면 극북방위군을 비롯한 민국 정부 세력은 죄다 떨어져 나가겠지.
그러니 이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때 쓰는, 보험이다.
“갑자기 왜? 태사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어?”
친절한 반장의 모습은 사라지고, 독기를 품은 천손민족협회 소녀 회원만 남았다.
“우리 쪽이 아니라 문하시중 쪽에 의지가 있을 것 같은데.”
미리안을 황제로 옹립할 계획. 함부로 공개하면 물론 가담자인 허동주도 타격을 입겠지.
하지만 리안이 입을 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리안의 백부, 승휴는 황족을 살해한 역적이니까.
하지만 이 정보를 터뜨리지 않는 건, 허동주도 그렇게 끝장을 보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지하철에서, 류성일의 총장실에서 리안을 공격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내전의 방아쇠를 당긴 소령은 대체 누구고? 이 의문이 견하의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소령의 집에서 사회주의 관련 문건들이 발견될 때까지.
발견된 자료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령이 사회주의자라면 황궁 앞에서 일어난 태사 살해 시도는 허동주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허동주가 오히려 리안에게 ‘기습’을 당한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용열차를 습격한 자들의 정체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가 판을 흔들어 마침내 전면에 나서려 시도한 것이다.
제1대학 총장실을 습격한 자들은 범위를 더 좁힐 수 있다. 이 자들은 안세규와는 ‘다른 파벌’에 속한,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사람들일 것이다.
루우가 말해 준, ‘이단을 양산하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허동주 측에서 개발에 성공했다고 했지, 임시정부가 그런 이단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판을 뒤흔들 주도권을 안세규에게서 빼앗고, 안세규를 곤란하게 만들 속셈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안세규는 루우를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만약 거기서 리안이 죽었다면 안세규의 입장도 무척 곤란해졌을 테지.
루우에게 허무하게 죽은 암살자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루우를 본 그는, 파벌은 다를지 몰라도 설마 같은 조직 소속인데 죽이기야 하겠어,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우는 주석과 태사의 합작을 방해하는 그를 살려둘 수 없었다. 암살자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다짜고짜 죽였겠지.
루우는 그때 임시정부가 오래 협력할 대상은 아니라 판단한 듯하다.
그야 파벌 다툼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동맹은 없으니만 못하니까.
그때부터 슬슬 루우는, 몽골 본국의 의사였든 혼자만의 생각이었든 제국 정부 쪽에 붙을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 방법의 하나가 주견하고.
어쨌든 여기까지 사고한 견하의 결론은,
“나는 고려민국 임시정부는 믿을 수 없다고 봐.”
민국 정부와의 합작을 제안한 류성일까지도.
또, 더 나아가, 복수의 대상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의 부모님을 죽인 자가 민국 정부 내에 있는 한 파벌이라면.
그러니 언제든 민국 정부를 제거할 방안을 마련해둬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허동주와의 평화협정이다.
“시기도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리안은 수도 방어와 전선 안정화에 성공하면서 꼭두각시가 아니라 상당한 실력자임을 입증했다.
리안과 허동주, 두 세력은 지금 교착 상태다. 상대를 거꾸러뜨리려면 큰 희생을 내야 한다.
“희생 없이 원하는 바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문하시중도 이 협상에 흥미를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