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1)
“왜 그렇게 붙어있는 거야.”
정말 오랜만에 다시 나온 학교, 점심시간이었다. 견하는 루우와 같이 식당으로 가려다 효윤의 말에 엉거주춤 멈춰버렸다.
효윤이 견하의 책상에 걸터앉자 견하도 그대로 다시 앉았다.
설마 효윤도 같은 반일 줄이야. 그녀는 리안을 보필하느라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책상을 무단 점거한 치마 아래로 하얀 다리가 까딱거렸다. 실내화용 슬리퍼가 맨발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엄지발가락의 모양과 발등으로 이어지는 선을 자세히 들여다볼 뻔했지만, 간신히 시선을 돌려 효윤의 얼굴을 쳐다봤다.
“안전상의 이유 때문이야. 알다시피 나는 태사의 측근이고, 루우는 ‘몽골 외교관의 딸’이잖아. 갑자기 고립되기라도 하면 곤란해. 함께 다녀야 좀 더 안전하다고.”
“그래? 그럼 왜 반 애들이 전부 너희가 사귀는 줄 알고 있을까? 이것도 위장이야, 아니면 정말로 사귀는 거야?”
효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건 좀 위험하다 싶었다.
리안을 두고 지금 뭐 하는 거냐, 결국 리안을 갖고 논 거냐, 그새 마음이 변할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었냐, 등…… 많은 의미를 함축한 표정이다.
만족스러운 변명을 내놓지 않으면, 저 맨발에 얼굴을 밟힐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상황을 모면하게 해줄 구원자가 나타났다.
“와오! 선배! 점심 드시러 안 가세요?”
쾌활하게 웃으며 2학년 교실로 성큼성큼 들어와, 허리를 굽히며 견하 주변의 선배들에게 인사하는 1학년 여학생.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고, 강아지 같은 몸짓으로 치맛자락을 나풀거린다.
구원자…… 가 아닐 수도 있겠는데.
야별초 소년감찰국 소속으로 1학년들 사이에서 정보를 수집하라고 심어놓은 아이다. 학생들 사이에 잘 녹아들라고 이런 성격을 ‘연기’하도록 했지만…… 지나치게 잘한다.
효윤이 발을 견하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짓밟듯이 눌러댔다.
“너는…… 정말 여기서 ‘일’을 하는 거야 아니면 여자애들이랑 시시덕거리려고 온 거야?”
“그거야…….”
견하는 변명하기보다 말을 돌리기로 했다.
“나는 지나랑 먼저 식당으로 가 있을게. 전에 하다 만 이야기가 있어서. 그럼.”
“야, 주견하……”
뒤에서 부르는 효윤의 말에 손을 흔들어 주며, 견하는 1학년생과 함께 교실을 빠져나왔다.
***
“아깝게 됐네.”
루우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그리고 좀 더 느긋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뭐가.”
“견하를 유혹해보려고 양말까지 벗고 눈앞에 예쁜 다리를 들이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네.”
효윤의 귓불이 깜찍하게 빨개졌다.
“그런 거 아니거든? 유혹은 무슨 유혹이야?! 그러는 루우 너야말로 은근슬쩍 가슴 들이대거나 머리카락 넘기면서 목덜미 보게 하잖아?”
“잘 관찰했네. 맞아. 난 견하가 마음에 들거든.”
“뭐, 뭣…….”
당당하게 인정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효윤은 말문이 막혔다.
굳어버린 효윤을 보며 눈썹을 한 번 올렸다 내린 루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효윤 앞에 섰다.
그러고는 효윤의 턱 끝에, 살짝 검지를 갖다 댔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싫은 건 아니야, 최효윤. 나는 예쁘거나 재미있는 건 웬만하면 다 좋아하거든.”
루우는 손을 뻗어 효윤의 포니테일을 아주 살짝, 두피가 간지러울 만큼 어루만졌다. 코끝이 닿을 것 같았고, 가슴은 닿아서 모양이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말로 하기 힘든 기묘한 열기에 효윤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너는 예쁘면서 재미있어.”
효윤이 뭐라 말하기 전에 루우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점심 같이 먹으러 가자.”
***
“선배. 근데 인기 정말 많으시네요.”
유지나. 1학년생. 그녀는 복도에서도 여전히 말괄량이에, 선배를 동경하는 활달한 여자애를 연기했다.
“둘만 있을 때는 무리해서 연기하지 않아도 돼.”
“꼭 무리하는 건 아니에요. 원래 반쯤은 이런 성격이고, 저 자신이 이런 모습을 하는 게 마음에 들기도 한걸요.
게다가 성격이라는 거, ‘이러저러하게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렇게 자꾸 행동하면 그런 방향으로 조금은 변하는 것 같아요.”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지나는 열다섯 살일 터였다. 열다섯…… 치고는 꽤 성숙한 소리를 한다.
원래 철이 좀 든 애였는지, 아니면 내전이 일어나고 나서 고생을 하다 보니 철이 든 건지.
“그럼 편한 대로 해.”
“네. ……그보다, 아까 했던 말 있잖아요. 선배 인기 많아 보인다는 거.”
견하는 잠깐 멈칫했다. 효윤의 추궁에서 벗어났다 싶었는데 여기서 또 껄끄러운 질문을 받을 줄이야.
“인기고 뭐고, 다 공적인 사이야. 직장 동료라고.”
“그럼 저도 언니들하고 대등한 건가요?”
“대등이라니…….”
“아. 나는 부하니까 오히려 더 유리한가?”
“……너 일을 핑계로 나한테 원한을 풀러 온 거야?”
지나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망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감사하고 있죠. 그냥 개죽음당할 목숨을 이렇게 잇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냐…….”
“동화 속 왕자님의 등장 방식과는 좀 달라도, 구해주신 건 구해주신 거니까요. 어쨌든 선배 주변의 여자들은 모두 같은 조건에 놓여 있다는 걸 알았네요.
그러니 저도 이제 제 일을 해야겠죠?”
“‘일’이라. 반가운 이야기네.”
“마침 앞에 오네요.”
지나가 말한 건 견하네 반의 반장, 양수영이었다.
“반장, 밥 먹고 오는 길이야?”
“응. 견하는 후배랑 같이?”
갈색 머리칼과 사근사근한 미소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견하는 마주 미소지었다.
요즘 정말 몇 안 되는, 편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다.
“선배! 안녕하세요! 1학년 유지나라고 합니다! 전교에서 상위권 성적이시라는 거 듣고 선배 팬이 됐어요!”
“고마워. 음…… 귀여운 후배님이네. 견하 대단한데?”
“아니 왜 다들 여자애랑 같이 가면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건지……. 그냥 우연히 황궁 쪽 모임에서 만난 애야. 전학생이다 보니 안내 겸해서 같이 밥 먹으려고.”
수영은 키득키득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음…… 근데 오늘 밥은 영 별로야.”
“왜?”
“배급제가 시행됐잖아. 제1고도 엘리트 국민 양성기관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나 뭐라나…… 그래서 주먹밥 두 개가 끝이야.”
“어쩐지 밥 빨리 먹고 온다 싶었어. 체육수업 끝나고 먹는 애들은 힘들겠네.”
“맛이라도 좀 있으면 모르겠지만…….”
살짝 찌푸리는 시늉을 하며, 수영은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아 맞다. 오늘도 도서관 갈 거야?”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과 부드러운 분위기에, 견하는 소녀의 의도를 재지 못하고 대답했다.
“응. 반납할 책도 있고, 빌릴 책도 있고.”
“알았어. 나도 도서관 가 있을게.”
손 흔들며 멀어져가는 수영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그러면서 견하는 옆에 선 지나에게 속삭였다.
“네가 말한 ‘일’이라는 게 수영이랑 관련된 일이야?”
“그렇죠. 정확하게 뭔진 모르겠지만 수상해요. 좀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볼 만한 근거는 있어?”
“자세한 보고서야 방과 후에 올릴 테니까 그걸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일단은 주의하시라는 거에요.
설마 선배,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여자가 ‘도서관에서 너를 기다릴게’하면서 호감 신호를 뿜어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견하는 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는데.”
“선배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조금 재수 없는데요.”
“선배 겸 직장 상사한테 정말 거침이 없구나.”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자는 계기 없이 누굴 동경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사소하고 엉뚱해도 분명히 계기가 있다고요. 저만해도, 백마만 안 탔다뿐이지 선배는 어쨌든 왕자님이죠.
하지만 양수영 선배는 그런 게 없어요. 주의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대단히 직설적인 인간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견하는 지나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섰다.
지나는 이제 ‘일’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 대신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재잘댔다.
견하는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반 친구들, 잘 안 풀리는 공부, 그리고 자신의 머리 모양이 어떻냐는 둥의 이야기를. 주먹밥을 먹으면서 맛에 대한 불평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거의 쉬지 않는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를 배웅하며, 외동인 견하는 여동생이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쇠뿔도 단김에, 라는 말이 있다.
견하는 식사를 마치고, 양치까지 하고 나서 곧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야기했던 대로 수영은 도서관 4층, 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곳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수영은 시야 한구석에 견하가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웃었다. 그러곤 견하 앞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나도 역사 공부 좀 해보고 싶은데 괜찮은 책 추천해줄래? 시험용 공부 말고 교양을 쌓고 싶거든.”
두 사람은 서가 사이에 어깨가 닿을 듯 나란히 섰다. 소녀의 은은한 향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어떤 역사부터 공부해보고 싶은데?”
“음…… 고대 고구려 왕조가 어떨까? 국사책에서 보니까 옷이나 갑옷이 예쁘더라.”
확실히 그렇긴 하다. 견하는 적당히 고구려사 입문용 책을 골랐다. 『고구려인 이야기』 같은 제목의 책들이었다.
수영은 그중에서 그림이 많은 책을 택했다. 손가락이 하얗고 길었다.
“고마워. 다음에도 부탁할게. 견하는 역사에 정말 관심이 많구나.”
견하와 수영은 구석진 곳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4층 자료실 입구와 테이블 사이에 서가가 있어, 다른 학생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학생들은 주로 입구 근처, 트인 곳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았다.
“관심이 많다기보다는, 관심을 가져야만 하니까.”
“아, 황궁? 태사께선 역사 이야기를 좋아해?”
“역사 이야기가 직접 나오는 건 아니고, 역사적 지식이 ‘전제’로 깔린 이야기가 나오지. 정치 문제 같은 거 말이야.”
“정치 이야기에 역사적 지식도 필요하구나. 황궁은 좀 답답한 곳이네.”
이쯤 해서 견하는 슬슬 가면을 벗어보기로 했다.
“반장은 황궁 이야기에 관심이 있어?”
“음. 호기심은 있지. 그 왜 있잖아. 궁궐은 동화 속 공주님이 사는 곳이잖아? 누구나 한 번쯤은 공주님이 되는 상상을 하고, 나이를 먹어도 낭만을 버리진 않거든. 동명시 황궁은 동화 속 뾰족뾰족한 궁전이랑은 다르지만.”
안 걸려드는 건지, 아니면 유지나의 정보가 잘못된 건지.
아니, 유지나는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정보원인 유지나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견하는 좀 더 세게 밀어붙인다.
“천손민족협회에 연락을 좀 하고 싶은데.”
수영의 표정이 굳었다. 손가락도, 다리도.
순간적인 정지였지만 견하의 눈은 수영의 당혹을 만족스러울 만큼 포착했다.
미세한 떨림이 있다.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감추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걸렸다.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야’가 아니지. 내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인정하는 꼴이잖아.”
견하는 웃지 않았다. 견하에게서 상냥한 어조가 사라지자 수영도 얼굴을 굳혔다.
수영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견하를 공격하거나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수영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견하가 소환한 하얀 괴물이 수영의 종아리를 휘감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