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개(7)
이번엔 리안이 예상되는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그래도 내전 상황에서는 어려운 점이 있어. 일단 광군이 동원됐기 때문에 유권자 상당수가 자기 거주지를 떠나 전쟁터에 있어.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 선거구의 후보와 그 공약을 알고 투표를 하라는 건 어렵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선거구를 나누고 입후보하고 선거운동을 벌이고 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
“그래서 제 생각엔, 이번 선거는 좀 다른 방식을 제안하려고 해요. 말씀하신 대로 내전 상황이고, 전국이 확보된 게 아니니 선거구를 나누고 할 때 차질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이번 선거는, 국민들이 후보가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게 하고, 그 투표율로 의석수를 정하자는 거죠.”
이렇게 하면 국민들은 정당이 내세우는 정책과 당수의 이미지로 투표하게 된다.
리안으로서는 나쁠 것 없는 방안이었다.
견하의 제안대로 선거가 치러져 제국입헌당이 승리를 거두면, 제국최고회의 의장인 리안의 강력한 여당이 될 수 있다.
안세규나 기타 세력들은 의장 자리는 리안에게 주고, 자신들은 야당으로 견제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좋아. 너희도 일단 당원이니 너희한테 나온 의견으로 당에 ‘건의’할게. 좀 다듬어서 임시 제국최고회의에 올려보자.”
***
구 제국 정부 인사들은, 지금은 ‘제국입헌당’의 고위 간부들이 되었다.
그들은 리안, 견하, 효윤이 내놓은 건의안을 다듬어 임시 제국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어차피 초대 의장은 태사 미리안이 맡게 하자고 이미 이야기됐다.
또 지금 내부분열을 일으키진 말자는 합의가 있어, 안세규의 고려국민당과, 민국 정부의 다른 파벌인 사회민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고려에서 치르는 첫 선거라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격하게 반발했다.
“이런 식의 선거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공산당은 민중의 실제 의사는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이따위 최고회의는 거부하겠소!”
“임시 제국최고회의를 박차고 나가실 생각이라면, 우리는 당신들을 불법화할 수밖에 없어요.
내전 상황에서 그렇게 나오시면 허동주에게 협력하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은 그런 폭거를…….”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자의 적들과 싸우는 건 임시 제국최고회의지, 공산당이 아닙니다. 나갈 테면 나가 보세요. 어떤 노동자나 농민이 지지해주나.”
리안의 엄포에 공산당도 일단 굴복해야 했다. 그들로서도 어쨌든 19년 만에 합법화된 정당 활동을 버릴 수는 없었다.
선거일은 6월 10일로 정해졌다.
***
이름 없는 산등성이, 개울, 혹은 참호나 강둑에서 누군가는 죽어갔다.
하지만 지도상의 전선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정됐다.
“전선의 안정을 위해선 병사들의 피와 살이 필요했습니다.”
“지도 위에 그려질 선의 모양을 좋게 하려고 피와 살을 허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보기 좋은 선의 모양이, 내일은 시체가 됐을지도 모를 병사를 살린 겁니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은 그런 말로 리안을 위로했다.
그러나 지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림과 실제로 지상에서 벌어지는 참상 사이의 괴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괴리가 리안의 눈에 우울감을 돌게 한다.
“동북쪽으로 옮겨진 반란군의 무장해제 및 토벌은 완료됐습니다. 적을 괴멸시킨 아군은 이후 다른 전선으로 재배치, 성공적으로 북부 전선을 만들어냈습니다.”
“남쪽에서도 지금까지 두어 차례 압록강 공세가 있었지만, 모두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록강을 건널 수 있는 교량도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혁명군 사령부의 참모들은 그렇게, 대략적인 전황을 정리하여 리안에게 보고한다.
사방의 반란군에게 협공당해 압사하기 직전이었던 때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진전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리안 정권의 수명을 조금 연장한 것일 뿐, 내전을 종식 시킬 만한 승리는 아니었다.
리안은 안세규, 류성일, 두 사람과 함께 동명역으로 시찰을 나갔다.
눈동자에는 여전히 우울감이 가득한 채로, 동명역에 들어오는 화물열차를 바라보았다.
화물열차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들이 몇 명 있었다.
“저 환호성은, 위기감의 다른 표현이겠죠.”
내전으로 인해 물자가 부족해지리라는 위기감. 그게 큰 만큼, 새로 들어오는 물자의 풍족함에 기뻐하게 된다.
평상시라면 별것 아닌 일상의 풍경일 텐데, 지금은 저렇게 작은 것에도…….
소박하면서도 씁쓸한 광경이었다.
“슬슬, 도시에 공급할 식량이 문제가 되겠죠.”
리안이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이제 법무성 장관 자리에 익숙해진 류성일이 대답했다.
“이 나라의 산업 구조가 그렇다 보니…….”
류성일은 그게 마치 자기 탓인 양 말했다.
이 노인은 미승휴의 참모로서 제3제국을 기획한 자신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믿는 걸까.
리안은 미소 지으며, 백부의 동지이자 스승에게 그러지 말라 고개를 저었다.
한 국가는 전 국토를 이용한 경제를 쌓아 올린다. 그 경제는 완벽하진 않더라도 나름의 균형을 잡아 왔다.
그런 국토의 상당 부분이 허동주의 손에 들어갔고, 리안이 지배하는 지역들과 단절됐으니 경제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려는 대륙과 해양 사이의 중간 물류 기지다.
그런 위상을 바탕으로 국제 무역을 펼쳐, 경제를 크게 성장시켜 왔다.
하지만 반란군이 몽골을 비롯한 대륙으로 통하는 길을 끊어버리고, 삼한반도 남쪽 바닷길도 위협하면서 무역도 타격을 입었다.
“배급제를 시행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안세규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리안은 끄덕였다.
그녀는 재무성 장관 여준설을 떠올렸다. 여준설도 그렇게 말했다.
-시장의 기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국가의 개입으로 불균형 경제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 경제관료는 이미 이 상황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안다. 그래서 자기 집무실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혹사당하고 있다.
아마 지금 그 집무실에 찾아가면 씻지 못한 중년 사내의 냄새가 물씬 풍겨오리라.
리안은 상념에서 벗어나, 안세규를 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구체제와 타협한 혁명가는.
허동주도 파멸시키고, 리안도 몰락시키고, 그리고 마침내 진짜 공화국을 세울 생각일까.
아니면 지금 이렇게 입헌군주국으로 나아가는 길에 만족하고 있을까.
그가 숨겨서 보호하고 있다는 황위 계승권자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아직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일본이나 아즈텍에서 식량 및 재정 원조가 가능한지 알아보겠습니다.”
리안이 속내를 읽으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안세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 자세한 사항을 정리해서 제 집무실로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리안은 다시 동명역으로 눈을 돌렸다.
리안의 이름으로 경제가 전면 통제되고 배급제가 시작되면, 자신의 인기는 떨어지겠지.
하지만 여기서 배급제 시작 전으로 선거일을 당기면 임시 제국최고회의는 공중분해 될 것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선거 승리를 노릴 수는 없었다. 다들 봐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씁쓸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타협해야 했다.
“저도 일단 관료들을 최대한 닦달해 보죠. 기근까지 오게 할 수는 없으니까.”
소녀의 도자기 같은 얼굴빛이, 그 말과 함께 흐려졌다.
***
재미있는 아이다, 견하는.
루우는 견하의 ‘집무실’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집무실 책상 위, 아래, 주변에도 가득 쌓인 책들.
견하는 그 모든 것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하며 글을 썼다. 안세규도 힘겹게 소화하는 과제를,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 주견하가 비슷하게 따라 하며 무서운 속도로 지식을 흡입했다.
타고난 걸까?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정보력을 빌려 조사해본 바로는, 견하는 또래 아이들보다 책을 많이 읽긴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전문적인 책들까지 미친 듯이 파헤칠 정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즉, 견하가 이렇게 지식을 갈구하기 시작한 건 리안과 만난 후의 일.
이 방면에 적성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급성장은 부자연스럽다.
효윤이라는 애는 그저 견하의 지적인 모습이 멋있다고만 느끼는 듯한데, 글쎄.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간 언젠가 크게 데일걸. 그렇게 생각하며 루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견하의 지적 성장은 견하 자신의 적성에, ‘이단’이 된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래, ‘이단’, 그 ‘하얀 괴물’의 영향 말이다.
물론 복수심도 다소 작용했겠지. 복수심은 좋은 동기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이단으로서의 측면을 살펴봤을 때, 견하의 능력은 독특하다.
보통 ‘이단’은 자신이 다루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혹은 성격에 맞는 무기를 ‘어딘가’에서 꺼낸다.
하지만 주견하는 아예, 그 ‘하얀 괴물’의 축소판을 꺼내 자신의 촉수처럼 다룬다. 그 꾸물대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치면서도 유쾌하기 짝이 없다.
말해주기가 탐탁지 않다는 듯, 효윤은 이렇게 말했다.
-견하는 그걸 굉장히 아끼는 모양이야. 솔직히 징그럽지만, 뭐, 세상에는 독특한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니 이해해줘야지.
루우도 몇 차례 봤다. 작은 괴물을 소환해서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견하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들을 ‘아이들’이라고 불렀지.
‘그걸’ 통제하고 있다고, 자신의 몸엔 아무 이상도 없다고 믿는 것도 재미있다.
“그렇지 않을 거야, 주견하. 통제하고 있다, 이상이 없다, 그렇게 ‘믿도록’ 통제당하고 있는 건 어느 쪽일까.”
하긴 광인(狂人)이 스스로 광인임을 안다면 그건 광인이 아닐 터.
통제하고 있다면서, 왜 그렇게 쓸데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일까?
평범한 소년처럼 덜덜 떨면서도, 끝없이 ‘가장 중요한’ 걸 찾아가는 소년.
그 중요성에 대한 동물적 후각은 주견하의 것일까, 주견하의 안에 들어간 ‘무언가’의 것일까?
우습게 보진 않는다.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하얀 괴물과 ‘이단’에 대한 것은 루우의 최대 관심사고, 견하의 사례는 매우 특수한 경우다.
이건 견하와 하얀 괴물, 그리고 그들이 접촉하던 상황의 알 수 없는 특수성이 빚어낸 것이겠지.
루우는 주견하가 과연 어디까지 갈지, 어떤 결과를 낼지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