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개(5)
리안은 지도의 한 자리를 짚었다.
동명시의 동북쪽, 심양시였다.
고대에는 고구려의 개모성이 있었고, 당나라 때는 개주라 불리다가 이후 심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이온(大元), 그러니까 원나라 시기에는 심양왕이라는 작위도 생길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다.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고 있었기에 제2제국 때는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어, 근대까지 요동의 주요 도시로 성장했다.
미승휴도 천도 당시 이곳을 수도 후보 중 하나로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동명시와 함께 수도권을 형성하는 곳이다.
“새 기동군단은 바로 여기, 심양을 공략합니다.”
반란군과 혁명군 모두 아직 심양을 장악하진 못했다. 여길 혁명군이 먼저 장악하게 되면 반란군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위험합니다. 적이 동명과 심양 사이를 찌르고 들어오면 새 기동군단이 고립될 수 있습니다. 전선을 어찌어찌 만든다 해도 지금 병력으로는 너무 얇게 만들어집니다.”
“그 경우엔 정면에서 버티지 말고 끌어들입시다. 그다음엔 기동군단을 이용해 주머니 입구를 틀어막는 거죠.”
“그렇게 한다 해도 돌파당하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동원된 광군이 배치되는 시간, 용원에 도착할 동남방위군이 재배치되는 시간, 동북부의 아군이 적을 처리하고 구원 오는 데 걸리는 시간. 이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죠. 그리고 그때까지 버텨야 하고요.”
아군이 증강되는 시간과 수도 주변 전선이 한계에 다다르는 시간. 그사이에 결코 틈이 벌어져선 안 된다.
***아슬아슬한 도박이다. 리안은 여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보기로 했다.
“실행하세요.”
혼하.
이 강은 태자하가 동명시를 가로지르듯, 심양시를 가로지른다. 혼하와 태자하 모두 결국엔 요하에 합류한다.
혁명군의 새 기동군단은 이 혼하를 건너 심양의 남북 시가지를 장악했다.
그 사이, 허동주의 서부군은 용성을 장악한다.
용성은 요하에서 서쪽으로 좀 더 떨어진 곳을 흐르는 대릉하 유역의 도시다.
옛날에는 화북의 지배자가 북방 경계를 살피고 이민족들을 견제할 겸, 한 번쯤 직접 순시를 오는 요충지였다.
고구려의 경쟁자였던 모용 선비도 화북을 정복하기 전에 이곳을 수도로 삼기도 했다.
이후 영주라는 이름으로 수, 당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고려가 이 지역을 다시 장악한 후에는 고대의 이름인 용성으로 돌아갔다.
서부군의 용성 공략은, 선배들이 태평천국을 공략할 때처럼 빈틈없이, 정확하게, 마치 법적 절차를 준수하듯 이루어졌다.
태사 측에선 이미 요하 서쪽의 병력 대부분을 동쪽으로 옮겨서 용성에는 형식적으로 남아 있는 수비군뿐이었다.
하지만 서부군은 정석대로, 아무리 작은 진지라도 화력을 퍼붓고, 신중하게 보병을 전진시키며 도시를 점령해나갔다.
그렇다 해도 속도가 느리긴커녕, 괴물처럼 빨랐다.
“용성이…… 함락됐답니다.”
“그렇게 빨리…….”
“서부군은 구 태평천국 영토인 키타이, 산동, 낭키아스에서 한족 봉기가 발생할 경우 진압에 투입될 부대라, 늘 고강도 훈련을 통해 정예화되어 있다죠.”
리안이 묻자 강태훈이 그렇습니다, 라며 대답했다.
“허동주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부대이기도 해서…….”
“용성 함락에 걸린 시간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교전 수 시간 만이라고…….”
“수 시간이라.”
열 시간이 넘지 않았다는 말인가. 보고가 저렇게 애매하다는 건, 대체 어디를 어떻게 당했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다.
“우리 혁명군 사령부에서도 용성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성은 동명, 숙군, 칸발리크를 잇는 교통로 상에 있는 주요 도시인지라, 조금 우울한 분위기가 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용성의 함락으로 이제 서부군이 요하에 도달할 시간이 구체적으로 가늠되기도 했고.
“일단 서둘러서 서부군의 대릉하 도하 방법과 용성 공략 방법을 분석합시다.”
그리고 태사 미리안은, 자신이 직접 세운 작전의 성공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떻게든 수도 주변의 포위망을 와해시키고 요하 전선을 구축하지 않으면, 태사뿐만 아니라 모두의 운명이 끝장날 테니까.
***
“태사군 심양 점령!”
“우리 측 포위망을 역포위하려는 기동작전인가?”
“하지만 이 움직임은…… 지금 서북방에서 몽골과 대치하다 내려오는 우리 군을 가로막으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헷갈리는 움직임이군…….”
수도 주변을 포위한 반란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극북방위군의 가세와 태사군의 반격으로 전력에 큰 타격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지휘체계도 상당히 망가졌다.
전체적인 전력 자체는 태사파 혁명군과 비슷했지만, 문제는 그 전력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보니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토의 한가운데를 태사의 세력이 차지하는 바람에, 허동주의 평양 본영에서 각지의 부대에 연락을 취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허동주에게 올리는 보고가 적절한 시각에 닿지 않았고, 다시 허동주에게서 내려오는 명령이 적절한 시각에 일선 부대에 닿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수도 주변을 포위한 반란군 역시 오판을 하고 만다.
“……두 방향 모두 대응한다. 적의 기동군단은 태사의 정예지. 이들을 완전히 포위해 섬멸한다면 수도 점령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러나 태사파 기동군단의 움직임을 저지하려던 서북방 반란군의 뒷덜미를, 몽골군이 붙잡았다.
몽골군이 고려 서북방의 점령지를 지나 남하하면서, 반란군과 교전에 들어간 것이다.
***
몽골이 일정 선 이상은 안 움직이리라는 허동주의 예상은 빗나갔다.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다는 건가, 미리안.”
허동주는 별명인 살무사에 어울리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서북방 국경에 한정된 일이라지만, 몽골이 이런 부담을 지도록 할 수 있을 줄이야.
지난번 일본 함대도 그렇고, 저쪽의 새 외무장관 안세규의 역량은 보통이 아닌 듯했다.
“일본이나 아즈텍이야 민주주의 국가니 그렇다 치더라도, 몽골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봐야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허동주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우리도 몽골 쪽에 손을 쓴다. ‘범(汎) 알타이 인민동맹’에 연락을 취해라. ‘계획’을 진행한다고.”
***
“각하! 위험합니다!”
장성들이 리안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르며 그렇게 말린다.
리안은 동명시를 감싼 방어선을 시찰 중이다.
“백부께서도 상경 방어전에서 이렇게 전선을 시찰하면서 장병들의 사기를 돌봤다고 들었어요.
조카인 제가 국난을 맞아 황궁에 편히 앉아 있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렇다. 이는 선대 태사 미승휴가 세계대전 당시, 상경 공방전 때 보였던 행적을 흉내 낸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방어선을 돌며 병사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들의 경이에 찬 시선을 받는다.
태사의 안전을 염려하는 장성들의 말을 무시하고, 병사들을 우선하는 듯한 언행을 보인다.
잘 짜인 일련의 연극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무엇을 위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가?
바로 곧 실시될 공세를 위함이다.
리안은 극북방위군의 조유관 대장을 옆으로 불렀다.
“공세 준비는?”
“극북방위군은 계속 준비되어 있었습니다만, 다른 후속 부대들의 준비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죠. 우리가 완전히 준비된 상태에서 방심하는 적을 치고 싶지만…….”
철저히 공세를 준비하고 있으면 상대도 공세를 예측하고 대비해버린다. 그렇게 되면 기습의 효과는 떨어진다.
“병사들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해도, 지금은 그들의 사기만이라도 높여서 사지로 내모는 수밖에 없어요.”
여기서는 ‘갑작스러움’ 그 자체가 주는 효과만 기대할 수밖에 없다.
당황, 혼란, 경악.
이런 효과를 거두려면 기습을 가하는 측이 최대한 빠르게 몰아쳐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계속해서 공격을 가해, 저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해야 한다.
“막대한 희생이…… 생기겠죠.”
“그러나 지금 그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큰 희생으로 돌아올 겁니다.”
리안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망설임은 털어버렸다.
***
아무런 예고도 없이, 태사 미리안은 동명시를 수비 중인 전군을 뿜어내듯 전진시켰다.
황궁을 기습할 때도 그랬지만, 미리안은 상황이 변했다 싶으면 기존 계획에 대한 미련은 가차 없이 털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조유관이 지휘하는 극북방위군이 동명시 서북쪽 교외에 화력을 집중,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은 이렇게 뚫린 포위망을 수습하지 못했다.
심양의 기동군단이 망치가 되고 동명시의 부대가 모루가 될 것이란 예상과 달리, 동명시에서 또 다른 망치가 튀어나와 버렸다.
괴성을 지르는 자들이 달려든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명확한 의사 앞에선 그 어떤 사람이라도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쏴서 거꾸러뜨리고, 거꾸러뜨렸는데, 어느새 가까이 있고. 쏠까 대검으로 응할까 망설이는 사이 참호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면 이제 미치광이의 발악만 남는다.
더 잘 훈련되고 더 많이 증오하는 쪽이 이길 수밖에.
아직도 내전이 높으신 분들의 타협으로 끝나리라고 믿는 쪽과, 여기서 얼마나 피를 흘리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붙으면, 개인 간의 전투에서는 후자가 이긴다.
물론 여기에 훈련과 지휘관의 전술이 뒷받침되면 승리는 더욱 공고해지고.
태자하와 혼하를 잇는 선을 차단한 극북방위군은, 심양까지 방어선을 연결한다. 이로써 서, 남, 북의 포위망 중 북쪽 포위망의 적들을 고립시켰다.
그러나 이제 좌우로 반란군의 협공을 버텨내야 했다.
“아군이다! 동북부군이야!”
이들이 한계를 맞이할 무렵, 딱 좋은 시점에 추가 병력의 배치가 완료됐다.
임시 제국최고회의가 내세운 자유, 권리회복, 해방이라는 단어들은 아무런 힘이 없는 허상 같아도, 이렇게 의외의 힘을 발휘했다.
공장주들이 해고하겠다 협박하고, 욕설과 구타를 일삼아도 이를 악물고 일터에 터덜터덜 나올 수밖에 없던 자들이, 이제는 눈에서 빛을 내며 작업에 몰두했다.
집에 가지도 않고, 시큼한 땀내로 가득한 휴게실에서 웅크린 채 잠을 자다가, 교대 시간이 오면 두말없이 다시 작업대로 나갔다.
이렇게 만든 물자가,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길. 한 사람의 혁명군이라도 더 지켜주길. 가정파괴범과 노예 상인들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빼앗기를.
말로 이루어진 사상이 이렇게 근육을 움직인다.
반란군은 증강된 혁명군의 벽 앞에서 이번에도 선택해야 했다.
출혈을 감수하고 북쪽 포위망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남쪽과 서쪽 포위망의 병력이라도 건지기 위해 이들을 물릴 것인가.
혁명군이 증강됐다면 반란군 역시 증강된 병력으로 맞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서부군이 서둘러 도착해주어야 했지만, 이들은 서북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몽골군을 격퇴하고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넓게 분산해 버렸다.
더불어 칸발리크 방향, 서부 국경의 상황도 안심할 수 없게 됐기에 병력을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요하를 건너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혁명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쌍태자하와 요하를 따라 긴, 그리고 안정적인 전선이 형성되었다.
서부군이 상황을 정리하고 숙군시를 함락시켰을 무렵엔, 요하 동편에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혁명군 진지들이 들어차 있었다.
태사 측으로서는 한숨 돌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직은 내전을 끝내기 위한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도 못했고, 당장은 줄 수도 없었다.
지겨운 대치 상황이 요하를 사이에 두고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