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개(4)
반란군이 퇴각 중인 적의 의도를 의심하고, 버리고 간 장비들의 파손 여부, 기타 보급품의 오염 여부를 조사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동남방위군은 무사히 경주에 집결했다.
낙오자나 탈영병도 꽤 있었지만, 그래도 전멸을 염려하던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공중에서는 아니었다.
수송기와 지상의 아군을 지키기 위해, 전투기 조종사들은 분투했다.
하늘의 무사들이 명예를 남기고 육신을 불태우는 동안, 총퇴각 작전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됐다.
반란군에 가담한 함대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항했지만, 이들은 결국 상부의 명령만 마냥 기다리며 파도 위에 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공화국 해군이 영해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견제를 해왔기 때문이다.
일본공화국 해군과의 교전, 즉 내전을 외국과의 전쟁으로 확대할지를 일개 함대장이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함대장은 평양에 방침을 물었다.
평양에서도 딱히 수가 없었기에 일단은 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들이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탈출한 수송 선단은 일본 영해로 들어갔다. 총동원된 민간 선박과 수송기도 함께였다.
수송 선단은 이후 일본 영해에서 동북쪽으로 항해하다가, 방향을 틀어 고려 영해로 다시 진입한다. 그들이 진입할 고려 영해는 대략 독도 근방이 될 것이다.
거기서 더 북상하여 용원에 입항할 예정이었다. 혁명군 해군의 영역인 그 지역에는 반란군 해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터였다.
***
“외무성 장관의 수완은 알아줘야겠군.”
서류에 서명하며 리안은 웃었다.
“아니면, 그런 건가? 민주주의자들끼리의 연대 의식 같은 거.”
설마 일본공화국의 협력을 얻어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계속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세규가 그 능력을 자신에게 반항하는 데 쓰지 않을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즈텍 연방의 입김도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견하는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고, 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내전이 끝나면 그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외교에 임해야겠어.”
리안은 다시 서류에 서명을 시작했다. 이번에 평양으로 몰래 빠져나가 허동주에게 가담한 인사들을 수배하라는 명령서였다.
모든 재산의 동결, 압류, 가족의 체포는 덤이었다.
“처형하실 건가요.”
“해야지. 난 분명히 경고했어. 여기서 엄격함을 보이지 않으면 내전에서 못 이겨.”
인질을 처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자비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배신해도 무방한 멍청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견하도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상황에 허동주 편에 붙고도 가족이 무사하길 바라다니 얼마나 멍청한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 안목이라면 내버려 둬도 망할 기업이지 않을까.
아니면 더 큰 미래의 이득을 위해, 처자식의 목숨을 투자한다는 생각들을 했을까.
섬뜩하긴 해도 그럴싸한 설명이었다.
그래도 나라면 차라리 숨거나 해외로 망명할 텐데.
“처형을, 잠시 미뤄주실 순 없나요?”
“탄원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물으며 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견하를 쳐다보다, 리안은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뭐, 뭐, 무슨, 요구를…… 하려고……?”
견하는 그런 반응의 이유를 먼저 묻고 싶었지만, 일단 지금 용건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체포된 사람들 중 중학생, 고등학생을 모아서,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천손민족협회’같은.”
“‘천손민족협회’같은……?”
“네. 이번에 생각한 건데, 우리 쪽에는 대중 조직이라고 할만한 게 없어요. 허동주는 학생들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도요. 각하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있긴 하지만, 다 개인적인 지지라, 조직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죠.”
“그러니까, 중,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나아가 ‘천손민족협회’에 대항할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다?”
“네.”
“수장은 당연히 견하 군이고?”
“……그건, 그렇죠.”
“어떻게 그 애들의 충성을 받아낼 생각이지?”
“가족을 인질로 삼아서요. 그래서 처형을 미뤄달라 말씀드린 거고요.”
리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훌륭한 학생이네, 견하 군. 금방 내 자리까지 노리겠는걸?”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 이대로 내전에서 이겨도 선거를 치르면 각하가 안세규한테 질까봐 내놓은 대책이란 말이에요.”
“그 전에, 어떻게든 해야겠지.”
“어떻게 한다고 해도, 저들이 새 황제 후보를 확보한 게 사실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예요.”
“……새 황제가 나를 해임하거나, 역적으로 몰 수도 있단 말이지. 그걸 막으려면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고. 알았어.”
빈 종이 위에, 리안은 몇 글자 끼적였다.
“야별초가 와해되긴 했어도 아직 서류상으로는 남아 있으니까. ‘소년감찰국’ 같은 걸 만들어 줄 테니 거기 국장으로 취임하도록 해, 대령.”
견하는 어색하게 경례를 올렸다. 리안은 한숨을 쉬며 책상을 대충 정리하곤 말했다.
“그럼 가볼까. 이제 수도 포위망을 완전히 걷어내야겠지.”
***
태자하.
동명특별시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강이다.
단, 이 물줄기는 옛 요동시 근처에서는 거의 수직으로 꺾인다. 거기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고대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의 구시가지는 태자하의 서안에 있다.
이 구시가지가 동명특별시의 전신이다.
천도 후의 신시가지와 황궁은 강의 동쪽에 세워졌다.
“내전이 시작하자마자 태자하의 주요 다리들을 장악했던 건 옳은 결정이었군.”
리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다리들을 장악해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반란군이 강의 서안을 끼고 진지를 구축한 후, 황궁을 포격해댔을 테니까.
극북방위군이 동명시 동쪽 포위망을 돌파하고 역으로 반란군을 포위하자, 도시의 북쪽, 남쪽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 부대들이 동쪽의 아군을 구출하려 했다.
이 구출 시도로 남북의 포위망이 얇아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으신 것도 훌륭한 결단이셨습니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이 리안의 결정을 치켜세워준다. 어쨌든 북쪽과 남쪽에 공세를 취해 반란군을 상당히 밀어내긴 했다.
“남은 건 서쪽을 포위한 반란군이었는데, 이들은 동명시를 공격하는 것보다는 아군을 돕는 걸 택했죠.”
김천열 중장이 그렇게 입을 열 때마다, 사자 갈기 같은 구레나룻이 움직인다.
“동명시를 공격하는 건 대담하긴 해도 위험한 작전이라 판단했을 겁니다. 지금처럼 아군을 도우러 도시를 우회해 지원군을 보낸 건, 소심하지만 안정적인 작전이죠.
어느 쪽이 낫다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그들은 자기네 포위망이 아예 소멸하는 건 막았습니다.”
강태훈의 평은 그랬다.
“중요한 건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맞받아칠까 하는 것이겠지.”
리안은 여러 장군의 말을 그렇게 종합하며, 다시 지도를 살폈다.
이제 전선은 동명특별시의 북, 서, 남쪽 외곽을 따라, 남서 방향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모양새로 형성됐다.
“……적은 완강히 버티고 있습니다. 아마 삼한반도나 서부에서 올 증원을 기다릴 심산인 듯합니다.”
전선에서 적과 직접 대치하는 김천열 중장의 보고였다. 큰 전략을 보는 다른 장군들의 말도 중요하지만, 좀 더 세부적인 전선 상황을 보고하는 김천열의 말에 무게를 둘 필요가 있었다.
“남쪽을 포위하고 있는 적들만이라도 지난번 역포위 작전처럼 걷어낼 순 없겠습니까.”
“그럴 여력이 없습니다. 삼한반도에서 올라오는 적의 도하를 저지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합니다.”
“용원에서의 소식은 없나요?”
“곧 입항할 겁니다…… 만, 당장 그들에겐 장비와 각종 보급품부터 지급해야 합니다. 거의 다 삼한반도에 두고 왔을 테니까요.”
“동북부의 교전 상황은?”
“소탕 작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곧 흥안령을 겨냥한 북부 전선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리안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실망감도, 좌절감도, 초조함도 결코 드러내서는 안 된다.
“모든 장병이 최선을 다하는 건 압니다. 하지만 시간은 그보다 더 빨리 흘러간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서북부, 흥안령의 반란군은 언제쯤 몽골군과의 대치를 포기하고 남하할까.
허동주의 최정예 부대라 일컬어지는 서부군은 언제쯤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드러낼까.
“서부군이 요하를 건너면 그땐 정말 끝장입니다.”
‘끝장’이라는 말이 나왔다. 누군가 ‘어허’ 소리를 냈지만 그 이상 말리진 않았다.
“서부군이 요하를 건너기 전에 전선을 요하까지 밀어내야 한다, 라…….”
요하는 수도를 가로지른 태자하가 합류하는 큰 강이다.
“하구는 가급적이면 쌍태자하까지는 밀어내야 합니다.”
쌍태자하는 요하가 하구 인근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흐르다 황해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말한다. 그 동쪽으로 나란히 흐르다 바다로 가는 요하의 본래 물줄기는 대요하라 한다.
“광군 동원 상황은 어떻습니까.”
전쟁성 장관 강태훈은 침착하려 애쓰는, 즉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군의 확보 지역에서는 8할 정도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전선에 배치하면 됩니다만…….”
“됩니다만?”
“장비가 부족합니다. 본래 이 예비군 제도는 전국이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있고,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하거나 받기 직전 상황을 상정해서 마련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완벽하게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사람, 훈련, 장비…… 어느 것 하나 부족해선 신묘한 전략이나 전술도 쓸 수 없다.
전략과 전술은 그걸 쓸 수 있을 만한 인력과 훈련 성과와 물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많은 군략가가 전략 전술을 개발해왔음에도 후배들이 그걸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사람과 물자가 부족해서다.
“일단은 급한 대로 전선에 배치합시다.”
물자의 부족은 동북 산업 지대의 힘을 빌리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쉼 없이 공장을 가동하려면 역시 노동조합의 협력을 구해야겠지. 물론 이들은 내전 중에는 헌신적으로, 묵묵히 일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내전이 끝나면 헌신의 대가를 요구해 오리라.
그런 문제야 리안이 여러 정치세력과 협상을 통해 해결해나간다 치더라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평양으로 간 기업가, 공장주 중 적지 않은 수가 공장을 폐쇄하거나, 설비를 망가뜨리거나, 어디론가 팔아버리거나, 숨겨버리고 도주해 버렸다.
만약 견하의 요청이 없었다면 그 가족들은 격노한 리안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리안이 내려다본 지도 위에는, 수도가 서쪽 최전선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런 형세는 아무래도 좋지 않다.
리안을 비롯한 혁명군 사령부의 구상은 이러했다.
북쪽으로는 에벤크 만에서 송화강 이북의 평원을 지나 요하까지 전선을 형성한다. 남쪽으로는 압록강 중, 하류와 개마고원을 가로지르는 전선을, 서쪽으로는 요하, 쌍태자하에서 전선을 만든다.
그렇게 해서 요동 반도를 온전히 확보한다.
“무식하게 밀어붙인다고 밀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라가 반 토막 나서 전력도 반 토막.
다시 말해 아군의 전력은 잘해봐야 허동주와 대등한 수준이다.
대등한 양자의 싸움은 교착 상태만 만든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면 상처만 입는다.
그래도, 적의 움직임을 흐트러트릴 수 있다면 약간의 도박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항복한 병사들 말인데, 지금 쓸 수 있겠습니까.”
“쓸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상 문제가…….”
허동주에게 깊이 충성하는 자가 있다면 역시 함부로 무기를 주는 건 위험하겠지.
“일단 사상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된 병사들부터 각 부대에 분산 배치하죠. 그리고 따로 기동할 수 있는 군단을 하나 편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