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7화 (37/541)

전개(3)

기업가들은 침묵했다. 야유는커녕 기침 소리 한 번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솔직한 생각을 발산하는 대중들과는 크게 달랐다.

이 기업가들은 속내야 어찌 되었든 품위를 중시했다. 따라서 대중을 다루는 연설과는 다른 기법을 써야 한다.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대학의 똑똑한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가난한 자들의 단결, 그리고 그 힘으로 혁명을 일으켜 인류사의 모든 모순을 타파하고 평등과 자유의 미래를 이룩한다. 듣기엔 정말 멋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약속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은, 지금 어떻습니까?

무굴 황제의 압제에서 모든 사람을 해방하겠노라 선언했지만, 실은 황제가 공산당의 당수로 교체되었을 뿐입니다.

계급을 없애겠노라는 호언장담은, 공산당원들이 새로운 귀족이 되어 전보다 더한 폭력, 차별을 일삼는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바라트의 현실에 분노했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준다.

이제는 바라트의 구체제를 옹호하는 이야기를 하자.

“무굴 황제의 압제는, 서쪽의 이슬람과 동쪽의 태평천국이 협공해오는 비상사태에서 취했던 조치였습니다. 무굴 황제와 귀족들은 적어도 백성을 아낄 의무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공산 귀족’들에겐, 국민이란 오로지 야욕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이를 거부하면 공산 귀족에 대한 반역자가 됩니다.

책상 앞 철학자들의 망상과 달리, 이 ‘현실’ 세계에서 사회주의는 거짓 약속, 문명의 전통을 모조리 벗겨낸 추악한 야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동주는 잠시 숨을 골랐다.

기업가들의 생각은 단순히 ‘내가 거두는 이익을 줄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그런 생각이 동주가 외치는 정의와 같은 것이라 믿어버렸다.

욕망을 정의와 동일시하는 거짓말을 되뇐 끝에, 정말로 그 거짓말을 믿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정말 민족 구분 없이 모두가 동포가 되는 평등을 누릴까요?

무굴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진 이래, 사회주의는 ‘세계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퍼져나가 카불, 후라산, 페르시아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들이 바라트 공산당을 받드는 위성 국가로 전락한 건 소학교만 나와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과의 제휴는, 바라트의 세계 정복에 협력하겠다는 것입니다.

먼 나라의 일이어도 이토록 불안한데, 일부러 여기, 이 나라에 사회주의의 토대를 마련해주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 타국의 노예가 되는 길을 걸어선 안 됩니다!”

몇몇 기업가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분위기다.

이들 대부분은 동주에게 협력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히고 내려왔다. 몇몇은 동주를 한 번 저울에 달아보려고 왔겠지만.

상관없다. 이들에게 이익을 줄 미래를 제시하자.

그들이 다른 대안을 생각을 수 없도록.

“노동조합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 확대를 요구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르며, 품위 있게 요구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바라트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고려의 노동자라고 해서 그다지 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혁명 후 바라트의 노동조합들은 경영에도 간섭했고, 심지어 경영진을 해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같은 노동자로 시작해, 그들보다 더 성실했기에 이룬, 수십 년 피땀의 산물인 기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탈한 것입니다.

이러한 강탈은 비도덕적이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업이 ‘경영 전문가’를 잃어버린 겁니다.

경영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은 적도, 경험도 없는 노동조합은 바라트의 경제를 파탄 냈습니다. 보다 못한 바라트 공산당이 모든 노동조합을 당에 귀속시켜 직접 경영에 나설 때까지 바라트 경제는 추락했습니다.”

다시 숨을 돌린다. 이제 공산주의자들의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이야기하자.

“공산당의 비상조치 이후 국가가 파멸하는 것은 막았습니다만, 지금 바라트의 경제 수준은 무굴 제국 시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노동자 해방’은 이루어졌을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노동조합이 공산당의 하부 조직이 돼서, 노동자들은 결국 더 철저한 감시와 억압 속에 ‘공산 귀족’의 노예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기업에도, 국가에도, 노동자 자신들에게도 해만 끼치는 이러한 노동조합 운동은, 철폐의 대상이지 합법화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문하시중 허동주는 미리안 태사의 잘못된 결정을 되돌려, 현재와 같은 형태의 노동조합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겠습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동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든든한 동맹을 얻었다.

이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협력이 있다면 내전의 승리는 멀리 있지 않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풍부한 물자들은 기업가들의 손에 있으니까.

기업가들 가운데 어떤 이가 손을 들었다. 비교적 젊은 축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2세 경영인일 것이다.

“문하시중 각하의 결정은, 저도 애국자이자 기업인으로서 환영합니다.

하지만 노동조합을 금지한다 해도 노동자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불온한 생각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태사가 합법화라는 안타까운 결정을 내리기 전에도 지하에서 활동하는 노동조합은 많았습니다.”

동주의 미소를 따라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이번엔 보여주기 위한 미소가 아니었다.

여기서 그의 이상이, 저들의 이익과 연결될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좋은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답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 사회주의자들의 ‘혁명’과는 다른, 우리 고려만의 ‘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업가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혁명’은 결코 아름답게 들릴 수 없는 단어였다.

“저는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왜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을 유산자와 무산자로 나누고 계속해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일까.

기업인이든, 노동자든, 농민이든, 상인이든, 모두가 한 나라의 국민이고, 한 민족의 구성원인데. 모두가 민족과 국가에서 각기 맡은 역할이 있는데.

민족이 단결하여 저 태평천국을 물리친 세계대전은 잊어버린 것일까? 봉급도, 휴식도 없이 밤새워 전쟁물자를 만들어 공급하던 선배 노동자들의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세계대전은 비극이었지만, 극복된 비극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다.

동주는 그 추억을 자극하고, 추억에서 새로운 발상을 끌어냈다.

“그래서 저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노동조합과는 다른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것을 통해 구하고자 합니다.”

노동조합은 말 그대로 노동자들의 조합이다.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고용주와 대립하거나 협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이다.

“새로운 ‘조합’은 계급이 아니라 직능에 따라 만들어질 것입니다. 여기엔 경영인들이 의장, 혹은 위원장으로 직접 참여하여 노동자들의 헌신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허동주가 지금 주장하는 ‘직능조합’은 이러한 노동조합의 기능을 없앤다.

같은 직능에 속하는 사람들이 노동자와 고용주 간 구분 없이 누구나 참여한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고용주의 명령을 따르는 또 하나의 기구를 만들 뿐이다.

“노동자들은 경영인의 고충을 듣고 현실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게 됩니다. 바라트처럼 노동자의 경영 참여나 경영인의 퇴진을 요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 직능조합에서는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거세된다.

고용주가 경영 과정에서 저지르는 과실의 책임을 묻고, 그를 견제하고, 노동자의 권리 증진을 요구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조합’은 유산자나 무산자라는 계급을 강조하며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노동조합과는 달리, 이해와 협력, 통합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합의 정신을 더욱 확대하여, ‘민족’의 이름 아래 모든 국민을 하나로 묶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리고 ‘천손민족협회’가 내세우는 ‘혁명’입니다. 분열, 갈등만 일으키는 거짓 이상이 아니라, 모두가 민족과 국가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진정한 ‘혁명’입니다. 사회혁명이 아닌, 민족 혁명입니다! 저는 이 진실된 이상으로 사회주의의 거짓과 싸우려 합니다!”

세 번째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업인들은 지급된 세 발 까마귀 완장을 착용했다. 붉고 검은 물결이 대연회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누군가 ‘각하 만세’를 외치며 오른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렇게 하나둘, 경례와 구호를 따라 했다. ‘고려 만세’ 같은 구호도 나왔다.

묘한 흥분이 기업가들을 들뜨게 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민족의 이익이 일치한다는 만족스러운 믿음을 얻었다.

***

삼한반도에서 북상, 아군에 합류하려는 혁명군 부대들이 있었다.

허동주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저지해야 한다.

반란군은 해안 일대에 몇 겹이나 되는 저지선을 설치했다.

하지만 벌써 다른 혁명군 부대가 반란군의 후방으로 내려와 아군 구출을 노린다.

반란군은 북쪽과 남쪽, 양쪽으로 방어선을 굳혀 이들의 합류를 막았다.

혁명군이 먼저 돌파를 시도하든, 반란군이 삼한반도 남부 소탕 작전을 개시하든 무시할 수 없는 출혈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평양, 한양, 공주의 반란군은 소백산맥을 돌파, 혁명군 부대들을 삼한반도 동남부로 서서히 몰아넣었다.

동해안을 따라 전진하여 삼한반도를 탈출하는 것도, 신라성(新羅省)을 방어하기도 어렵게 됐다.

동남방위군 사령부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항복해야 하나?

직접 말을 뱉진 않았지만 그런 눈치가 오갔다.

다행스럽게도 그 무렵 극북방위군의 수도 진입 소식이 전해졌다.

동남 방위군 사령부는 그 소식에 구원의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선의 병사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총퇴각령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진 명령은 사령부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총퇴각령의 목표지점은 경주!”

이 명령은, 경주에서 혁명군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동해를 거쳐 혁명군의 통제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탈출 작전의 일부였다.

“그래서, 경주를 출발한 우리는 어디로 들어가는 거지?”

“용원에 입항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동경에서 바다를 지나 동경으로 들어가는 작전이군.”

사령관은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경주에는 신라 시대부터 동경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용원은 발해의 동경 용원부였던 것에서 따 온 말장난이었다.

총퇴각 작전의 지침은 이러했다.

군장은 당장 갈아입을 양말, 속옷 정도로 최소화한다.

화포 등 중화기는 버리고, 개인화기와 그 탄약을 제외한, 무게가 나가는 모든 장비 역시 버린다.

파기할 시간도 아까운 데다 총퇴각 의도를 들킬 염려가 있으므로, 장비 파기 절차는 수행하지 않는다.

최대한 신속하게 경주로 집결하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

오직 장병들의 목숨만을 건지기 위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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