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개(2)
“이게, 나를 황제로 옹립할 계획이란 말이지.”
효윤과 견하는 책상 앞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는 리안의 표정을 살폈다.
별다른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사본은 없는 건가?”
정말로 감흥이 없다기보다는, 이런 문제에 흔들려선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 것이겠지.
“제가 확보한 게 전부라면, 이게 유일본이에요.”
그보다도 견하는 왜 며칠 전 일에 대해 리안이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지 그게 신경 쓰였다.
그냥 충동적으로, 별생각 없이 저지른 잠깐의 실수였던 걸까?
아니면 최고 권력자답게, 그저 한때의 여흥으로 입 맞춘 걸까.
그럼 나는 리안의 ‘여러 장난감’ 중 하나에 불과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따끔거렸다.
“이 계획을 아는 자는 나, 견하 군, 효윤이, 그리고 루우, 이렇게 넷에……”
효윤이 리안의 흐려진 말을 이었다.
“……안세규 주석, 아니 외무장관이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쪽 사람들까지 포함해 생각보다 아는 사람은 많을 것 같아요.”
견하는 한숨 쉬듯 말했다.
“‘공공연한 비밀’이네요…….”
이제 와서 루우나 안세규를 제거할 수도 없다.
루우는 몽골과 구 민국 정부 간 연결고리로 추정되는 데다, 민국 정부와 제국 정부 사이의 연락책이기도 하니 건드릴 수 없었다.
안세규 역시 극북방위군을 써야 하는 지금은 손댈 수 없다.
리안이 손등으로 가볍게 서류를 두드렸다.
“그렇다면 이 사실들을 토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야겠군.”
문서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선대 태사 미승휴와 관련된 것들.
황족들의 시체 사진까지 첨부됐다. 이제 미승휴가 황족들을 암살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명백히, 리안의 약점이다.
둘째, 혈통 위조에 쓸 가문의 계보 조사.
이건 미승휴와 허동주 모두 개입했다. 두 사람이 협력한 건 아니다. 미승휴가 시작한 작업을 허동주가 알게 된 후, 허동주 단독으로 조사를 시작한 것 같다.
“내 아버지는 전사하시고, 어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지. 태사의 조카로 알려졌던 천애 고아 미리안, 알고 보니 황족이었다는 식으로 위조하려고 했던 건가? 그럴듯하네.”
리안은 자조하며 서류를 뒤적였다.
고구려 왕족인 해 씨나 고 씨, 부여 씨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철저히 조사돼 있었다.
세 번째 문서들은 허동주의 계획이었다.
“이상하군. 도대체 왜 이 인간이 나를…….”
허동주가 리안을 황제로 옹립할 계획이었다면, 대체 왜 전용 열차를 공격했을까?
리안이 협박을 해서?
그렇다면 지금까지 미승휴의 황족 암살을 폭로하지 않는 것도, 리안에게 황제 참칭의 누명을 씌우지 않는 것도 설명이 안 된다.
“그럼 허동주는 나와 적대할 생각은 없었던 걸까? 내전 시작 전까지, 아니면 아직도 이 계획은 유효한 건가?”
효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황궁 앞에서 각하를 쏜 그 소령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아요.”
맞는 말이다. 이 비밀을 알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침묵하는 허동주, 그리고 황궁 앞에서 벌어진 사태는 완전히 모순된다.
견하는 빗장뼈 근처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이 정보 자체가 가짜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가짜든 진짜든, 어쨌든 허동주는 이 정보의 존재를 안다고 봐야지. 허동주는 왜 이걸 활용하지 않는가, 에 주목해야 해.”
“그렇다면, 모순된 지점, 그 소령에 대해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리안은 그제야 견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과 혀의 감촉, 그리고 머리칼과 목덜미의 향기가 떠올랐지만, 견하는 그 생각을 간신히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 소령의 행동이 내전의 신호탄이라면, 이 내전을 통해 가장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걸 생각해봐야겠죠.”
최근 읽은 책들이 꽤 도움이 된다.
견하는 말해가면서 두뇌가 전보다 훨씬 열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제 합법적인 활동을 인정받은 민국 정부지…….”
“만약 그들이 전용 열차 습격도 꾸민 거라면, 그래서 상황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모순의 상당 부분은 해명된다.
이게 사실이라 해도, 당장 안세규의 약점으로 써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일단 안세규 혹은 민국 정부에 있을 누군가의 수를 읽어낼 수는 있다. 수를 읽으면 앞지르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래도 간단히 생각할 문제는 아니야. 민국 정부 내 누군가의 소행이어도, 안세규의 소행은 아닐 수도 있어.”
“사회주의 계파가 먼저 판을 흔들고,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안세규가 협상에 나섰다, 그런 가정도 가능하겠네요.”
그렇게 본다면 고려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안세규의 입지도 그리 튼튼하진 않은 걸까? 여기에 찌르고 들 틈이 있을지도 모른다.
효윤도 한마디 덧붙였다.
“반대로 이 상황 자체가 허동주의 이간책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옳은 말이야. 일단 정보만 최대한 확보해 둘 거야. 본격적으로 물고 뜯는 싸움은 내전이 끝나야 할 수 있겠지. 먼저 당하지 않게 조심하자고.”
아, 그러고 보니 말인데, 하며 리안은 말을 이었다.
“이 가정 하에선 루우와 안세규 사이의 연결도 그리 튼튼하지 않다고 볼 수 있겠어.”
견하는 다음에 나올 말을 반쯤 예상하며, 리안의 눈을 들여다봤다.
견하 자신도 모를 무언가를 그 안에서 찾고 있는데, 보이질 않는다.
“루우를 우리 쪽으로 포섭할 방법은 없는지 찾아봐, 견하 군.”
***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효윤은 복도에서 견하를 불러세웠다.
견하는 효윤을 따라 빈방으로 들어갔다. 드넓은 현통전에는, 그 안을 다 채울 만큼 사람이 많진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효윤은 견하와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애매하게 가까운 거리였다.
효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 사실은, 어쩌다 보니, 봤거든. 너랑 각하랑…….”
견하의 얼굴도 빨개졌다.
그 모습을 보며 효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인지는 몰라도, 견하가 리안을 이성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모르는 게 아니다.
알게 된 지 며칠 안 된 견하에 대한 마음이 깊어졌을 리는 없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모습을 보는 게 유쾌한 것도 아니다.
태사, 상관, 보필해야 할 의무. 오랜 시간 같이 지낸 동지, 친밀함, 그런 걸 넘어서, 나, 최효윤은 지금, 질투하고 있나?
성인 여성, 예쁜 얼굴, 견하를 끌어당길 줄 아는 여자, 그런 생각들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온다.
그런 효윤의 생각이 전해질 리 없기에, 견하는 나름대로 효윤을 안심시킬 말을 늘어놓았다.
“아, 하지만 그땐 각하도 피곤하고 마음이 약해져서 그랬던 것 같아. 지금은 마음 다잡고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는걸.
그러니까 내가 각하의 마음을 흔들 염려는 하지 않아도……”
“너는 어떤데?”
갑작스러운 효윤의 질문에 견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얼굴을 보며 효윤은 생각했다. 나도 리안처럼 키스하면 어떨까. 그럼 견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귈 생각, 있어? 연인으로.”
나는 리안보다 매력적일까? 얼굴이나 몸매는? 나쁜 냄새는 나지 않겠지.
아니,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나는 견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나?
혼란스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효윤은 견하의 대답에 살짝 숨을 삼켰다.
“두근거렸어. 그야, 나도 키스는 처음이니까. 태사…… 아니 리안 누나는 예쁘기도 하고, 안 지 며칠밖에 안 됐지만 조금 정…… 도 든 것 같고. 그래, 사귀고 싶다는 게 내 본심이야.”
견하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냥 잠깐의 실수로 덮어두고 싶어 한다면 그러는 게 좋겠지. 내가 억지 쓴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효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안도의 한숨처럼 보이길 바랐다.
“그럼 됐어. 뭐, 각하 쪽에서 사귀자고 해서 결국 사귀게 되어도 내가 간섭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본분은 어쨌든 ‘각하의 보필’이야. 그건 절대 잊지 마.”
끄덕이는 견하의 얼굴을 보며, 효윤도 마음속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평양은 전성기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고려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성장 중이었다.
미승휴는 독단적으로 요동 천도를 밀어붙였지만, 천년 도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민심을 완전히 뿌리치진 못했다.
덕분에 평양은 많은 복구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황궁은 끝내 중건되지 않았다. 요동의 새 도읍 동명에 황궁을 건설하니, 평양 황궁은 유적지 이상의 가치를 두기 어렵다는 게 제3제국 정부의 견해였다.
대신 남은 전각과 터를 정리하고, 관광객을 위해 개방했다. 세계대전의 비극과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옛 황궁 터와 평양 시청 사이, 새하얀 칠을 하고 커다란 돔을 덮은 건물을 중심으로, 몇몇 건물군이 들어선 부지가 있다.
전쟁기념관이다.
이곳 본관 대연회장은 본래 참전용사들을 위한 만찬이나 각종 세미나, 세계대전 관련 대회 시상식을 하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다른 용도로 쓰인다.
동주는 연단 위에서, 둥근 탁자마다 자리를 잡은 기업가들을 내려다봤다.
내전에서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고, 나아가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역겹지는 않았다.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동주도 내전에 이길 힘이 필요해 저들을 이 자리로 불렀으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평양까지 와 주신 기업가 여러분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업가들은 박수쳤다. 동주는 박수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태사 미리안은 사회주의 세력과 손잡고,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태사 본인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전향한 건 아니겠죠. 아마 그런 행동을 통해 민심을 얻어 내전에서 승리하고, 더 나아가 제국을 개혁하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