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주(8)
동주는 아무리 복수에 미쳐 있더라도, 절차를 밟을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주 쪽에서 미승휴를 찾아갔다.
태평천국 황제의 처형 허가를 받기 위해.
“절대 안 되오.”
미승휴는 반대했다.
“황제 폐하와 국민 모두의 원수입니다. 처형해서는 안 된다니요?”
미승휴는 대체 왜 반대하는 걸까.
“혹시,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서 처형하실 생각이신지……?”
미승휴는 그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처형은 없소. 살려둘 것이오.”
동주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태사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살려서 이용할 생각이오.”
“이용이라니요? 처형해서 국민의 원한을 갚아준다는 것 말고 대체 어떤 이용 가치가 있습니까?
이 비참한 전쟁의 원흉을 살려 놓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씀입니까!”
날카롭게 따졌다.
그러나 미승휴는 동주의 호통 따위에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 그것 말고도 이용 가치는 있소. 일단 왕으로 격하하고, 태평천국의 영토 상당 부분을 고려의 속국으로 삼을 거요. 그 왕의 조정에는 고려인만 가득하겠지.
그렇게 준비 단계를 거친 뒤, 정식으로 합병해 고려의 식민지를 만들 거요.”
“처형은? 당연히 식민지로 만든 후에는 처형하겠지요? 하다못해 암살이라도!”
동주의 절박한 어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승휴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일단 태평천국 황제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각본’하에 죄를 면할 거요. 그 후에는, 한족들의 반발을 눌러야 하니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보호해야겠지.”
동주의 주먹이 책상을 부술 듯 두들겼다.
“우리 고려는 황제를 잃었소! 우리에게 폐하가 없는데 무슨 놈의 번왕이오! 번왕이라면 당연히 그를 다스리는 황제 폐하가 계셔야 하지 않소!”
“곧, 새로운 황제 폐하를 찾아내 모실 거요.”
“그래 모신다고 칩시다. 지금 태평천국의 우두머리 놈이 제후왕으로서 우리 폐하를 섬기게 된다고 칩시다.
그럼 선대께 저지른 그놈의 죄는 어찌합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자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자가 다음 폐하는 멀쩡한 얼굴로 섬긴다고? 말이 됩니까 그게?”
“말하지 않았소. 태평천국 황제는 이용만 당한 것으로 ‘각본’을 짠다고.”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만든다고 하셨지요. 그럼 그 극단주의자들을 다스리지 못한 책임을 그 자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고려는, 전범국인 태평천국과는 달리 원칙을 중시한다는 걸 세계에 보여 줘야 하오. 그런 죄로 한 나라의 군주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건 원칙을 벗어나는 일이오.”
“고려를 침범한 자는 죽는다는 게 세계에 보여 줄 원칙이오!”
미승휴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적잖이 놀랐다.
허동주가 노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토록 격노할 줄이야.
하지만 미승휴도 숱한 전장을 지나 살아남은 남자다. 살무사 앞에서, 그도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태평천국의 황제는 건드리지 마시오. ‘중사’.”
허동주의 원래 계급을 말한다.
지금 누가 우위에 있는지, 허동주의 ‘산동 총독’ 자리는 누구에게 받았는지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동주는 책상을 한 번 더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고는 미승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나갔다.
***
‘살무사’는 이미, 미승휴가 처형을 승인하지 않을 가능성에도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어제보다는 최소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람이다.”
지난번에 미승휴 앞에서 압도당했다면, 오늘은 미승휴 앞에서 반항한다.
격분하는 동시에 뒤로는, 미승휴를 기만할 준비를 한다.
부하 하나를 손짓으로 부른다.
“암호문을 전해라. 응천에 있는 신수덕에게. 짐승의 우두머리를 도살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각하, 이제부터 어떻게 합니까?”
“준비된 배가 있으니 곧바로 산동으로 간다. 거기서 미승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
허동주가 산동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그 시각.
신수덕은 태평천국 황실 구성원들을 끌어냈다.
임산부나 갓난아이까지 예외가 아니었다. 모조리 토막 나 장강에 뿌려졌다.
다만 머리는 소금에 절여서 보관했다. 나중에 허동주가 직접 황실 명단과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탈출한 황손이 반(反)고려 항쟁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신수덕은 뱀 비늘에서 나는 비린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때마침 피비린내도 장강 위를 떠돌았다.
***
당연히, 미승휴는 격노했다.
“천한 놈이 일을 망쳤어!”
요동, 이제는 ‘동명’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도시에는, 아즈텍과 일본의 반발이 빗발치고 있다.
전쟁은 이미 끝났는데, 포로뿐만 아니라 민간인인 그 가족까지 잔인하게 죽일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항의다.
“태평천국 황제는 우리의 번왕으로 삼았다가 합병 조약에 옥새를 찍게 할 꼭두각시였단 말이다!
대륙 북부는 몰라도 그렇게 하면 응천을 비롯한 남부는 고스란히 우리 고려의 영토로 만들 수 있었어! 제 놈이 점령한 산동까지 포함해서!
태평천국 황제가 산 채로 그 광경을 보게 하는 게 진짜 복수임을 왜 모른단 말인가!”
답답했다.
미승휴의 원대한 대륙 정복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아즈텍이나 일본의 반발을 피하면서 고려의 영토를 확장하려면, 일단 ‘겉으로는’ 독립된 꼭두각시 왕국을 만들어야 했는데…….
황제뿐만 아니라 그 일가를 모조리 죽여버리는 바람에 무산됐다.
“이제 와서 ‘그럼 고려가 직접 그 땅을 차지하겠습니다’라고 해봤자, 아즈텍과 일본이 반길 리가 없지…….”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 들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입가를 만지며 생각에 잠긴다.
“확보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산동 정도인가.”
***
“머저리 같은 인간.”
허동주는 미승휴가 내린 결정을 듣고는, 그렇게 씹어뱉었다.
“아즈텍과 일본의 반발은 시늉일 뿐이다. 전쟁이 이제 막 끝났는데, 새로운 전쟁을 시작할 만큼 그들 국가의 여론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원래 계획한 대로 영토를 확보하고 식민지를 세워도 됐을 텐데.”
하지만 미승휴는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산동을 제외한 태평천국 전역을 몽골에 양보해버렸다.
몽골은 대륙 북부와 남부에 각각 칸을 파견해서 ‘키타이’와 ‘낭키아스’라는 칸국을 세운다고 했던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질문은 동주 자신과, 미승휴 모두에게 향한 질문이었다.
미승휴는 자신에게 반발한 허동주를 용서하지 않고 공격할 것인가?
허동주는 미승휴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 보고 싸울 것인가?
두 사람이 아주 약간만 인내심이 부족했다면, 틀림없이 내전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금 당장의 원한보다, 권력을 향한 열망을 더 중시했다.
미승휴는 고려령 산동을 확보하여 민심을 얻고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허동주는 중앙정부에 들어가 정통 권력 서열에 서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타협했다.
허동주는 ‘원수’로 진급, ‘문하시중’의 직책을 받고, 동명특별시에 입성했다.
자신이 19년을 인내하며, 모략과 암투로 보내게 될 도시에.
***
그 후로, 동주의 기억은 세월을 타고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세계대전의 순간순간들과 달리, 동명 시절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아마, 허동주와 미승휴의 연합정권 성립 10주년 기념 연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1920년 언젠가.
자리가 파할 무렵, 허동주는 미승휴에게 다가갔다.
권력 서열 1위에게 다가가는 서열 2위의 앞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감히 그 둘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들으려는 자들도.
동주는 다른 걸 보는 척하면서, 승휴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위에 오르십시오.”
‘살무사’에게선 세계대전 때와 같은 거친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동명에 머무는 10년 동안, 그는 노련해졌다. 공손함 속에 칼날을 감출 줄 알게 된 것이다.
동주의 말을 들은 미승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상조차 못한 건 아닌가.
허동주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늙은이, 황제가 되고 싶은 꿈 정도는 꿔 봤구나.
한참 만에야 미승휴는 겨우 이렇게 대꾸했다.
“나를 역적으로 만들 셈이오?”
“로마의 황제는 군사적 업적과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법적 정당성을 얻습니다.
나폴레옹 1세 또한 비슷한 배경을 통해 신성 제국의 황위에 올랐습니다.
각하라고 해서 안 될 게 있습니까? 왕씨의 자리를 찬탈하라는 게 아닙니다. 고려 제국의 황제가 되시라는 게 아닙니다. 고려 ‘민족’의 황제가 되십시오.”
유럽의 사례를 슬쩍 왜곡하긴 했지만 허동주에겐 이 ‘민족’이 중요했다.
‘민족’의 황제는, 제정의 관습을 존중하면서, 고려를 ‘민족의 국가’로 거듭나게 할 구심점이 될 것이다.
“문하시중은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마시오. 황제께선 반드시 돌아오실 거요.”
그럴 리가요. 허동주는 쓴웃음과 비웃음을 섞어 삼켰다.
그러고선 남몰래 중얼거린다.
당신이 이 애매한 체제와 절대권력을 유지하려고 대체 얼마나 많은 황족을 죽였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데.
***
동주의 기억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미승휴가 의식을 잃기 몇 주 전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1927년인가 28년의 일.
허동주는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아즈텍처럼 제정을 폐지하고 통령을 칭하십시오.”
8년만의 또 다른 제안에, 그때보다 훨씬 더 늙어버린 태사 미승휴는 간신히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문하시중의 제안은 아부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떠보는 것인지 모르겠구려.”
“둘 다 아닙니다. 저는 ‘황제의 제국’보다 ‘민족의 제국’을 원할 뿐입니다.”
“나는 배냇적부터 충의를 배운 자요. 야심이 있어도 수십 년 관습을 뿌리치기엔 너무 늙어버렸소.”
웃기는군.
아니,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미승휴는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도, 혹시나 국민이 뒤에서 욕할까 두려워 철저히 감시했지만, 차마 황위로 나아가진 못했다.
그게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을까.
이 불쌍한 늙은이는 권력 표면의 달콤함은 핥아도, 쓴맛 나는 안쪽은 감히 혀를 대지 못하는 어린애로 퇴행했다.
19년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내가 이겼소.
허동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물러났다.
그것이 허동주와 미승휴의 마지막 독대였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몇 번 얼굴을 마주했지만, 단둘만의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
“서북부로 대규모 몽골군 접근 중! 지휘체계는 여전히 혼란!”
“서부의 몽골군 동태도 심상치 않습니다! 섣불리 후방으로 뺄 수는 없습니다!”
“극북방위군 수도로 접근 중! 태사군에 합류하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휘하 참모들의 외침에 허동주는 추억에서 깨어났다.
과거에 깊이 취해 있었지만, 금방 눈앞의 현실로 돌아왔다.
그 현실은 1929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호랑이가 개를 낳지는 않지.”
느릿느릿 말하며 허동주는 턱수염을 쓸었다.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리안이 갑자기 황궁을 기습해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었지.
“그래도 꽤나 얕은 수작이구나, 리안.”
그는 테이블 위 제국 전도를 쏘아봤다. 귀퉁이에 극북 지역이 따로 그려진 지도였다. 그 위에 전선과 부대의 위치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내전이 끝나면 개혁해야 할 요소가 하나 더 늘었군. 철도를 놓고 철도성과 군이 협력할 게 아니라, 아예 군의 통제에 둬야겠어. 무엇이든 군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