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주(7)
태평천국의 특사는 일본에 들어가 중재를 요청한 후, 거기서 다시 고려로 들어왔었다.
이때 미승휴는 요동을 떠나 비밀리에 산동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길이 엇갈렸다.
때마침 허동주는 산동 지역을 완전히 제압하고, 거기서 더 남하할 작전을 짜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강을 마주 보게 되면, 그다음은, 적의 수도, 응천을 공략하는 일만 남는다.
그때 산동에 미승휴가 나타난 것이다.
의외의 방문에 동주는 놀랐지만, 미승휴와 대등한 입장에서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대응했다.
“내 지위는 내가 스스로 쟁취한 것이지 누군가에게서 받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경례를 올릴 수 없습니다.”
“이해하오.”
동주는 자신의 임시 관저로 미승휴를 안내했다.
본격적인 논의는 거기서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미승휴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까 하던 이야기를 바로 이어나간다. 동주는 눈앞의 남자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끼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감상이, 이후 20여 년이나 지속하리라고는 짐작도 못 한 채.
“살무사 중사, 당신을 고려 정부의 정식 ‘산동 총독’으로 임명하고 싶소. 수락해 주시겠소?”
그 말을 들은 동주의 감상을 정리해보자면 이랬다.
미승휴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귀족’다운 사내였다. 오만하지만, 의무는 반드시 수행하는 그런 ‘귀족’.
“물론 당신이 자처한 ‘대장’ 계급도 정식으로 인정해주지. 어떻소?”
허동주는 미승휴의 의도를 재본다.
미승휴의 제안을 수락하면, 자신에게 부족한 정통성은 얻는다.
고려의 관료 집단을 손에 쥔, 가장 정통성 있고 가장 강력한 정권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허동주가 저지른 상관 살해도 덮고 넘어가게 될 뿐만 아니라, 뒤에서 ‘평민 출신 중사 주제에……’ 라며 수군대는 목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 휘하로 들어오라는 말이기도 하지.”
“전쟁은 우리가 이겼소. 곧 끝나겠지.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셋으로 나뉜 고려의 통일이오.
내 정부에 가담하시오. 새로운 정부의 관리가 되시오. 안전도, 지위도, 명예도…… 지금 누리는 권세까지 모두 보장하겠소.
지방에 할거하는 정권이 되기보다는 중앙정부의 실권자가 되는 편이 낫지 않겠소?”
“만약 거부한다면, 태사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미승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고뇌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묘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동주는 더욱 압박감을 느낀다.
“그러면, 내 사람 중에 산동 총독을 파견해야겠지요.
내가 굳이 여기까지 온 건, 산동만큼은 고려의 새로운 영토로 확보하기 위함이오. 산동이 고려의 손아귀 밖으로 나가는 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을 생각이지.”
“그렇게 하면 내가 가만히 앉아만 있겠습니까.”
“당연히 반발하겠지요. 우리 정부와 서부군정부 사이엔 내전이 일어날 테고. 나는 그 내전을 피하려고 여기 온 거요.”
아무렇지도 않게, 각오한 바를 말한다.
그것이 미승휴라는 인간의 기백이 된다.
동주는 미승휴의 기백이 자신을 앞질렀음을 직감한다.
자신은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고 세력을 불려 왔어도 일개 군벌에 불과했다.
미승휴를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경험이 더 필요하다. 미승휴처럼 중앙정부에서 ‘권력’을 다루는 경험이.
게다가 세력 면에서도, 허동주는 미승휴에게 미치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것뿐인가.
“조건을 두 가지 붙일까 하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할 입장은 아니니, 귀 기울여야겠지요.”
“첫째, 내 작전에는 간섭하지 말아 주십시오. 간섭할 기미라도 보이거나, 작전에 방해된다고 판단되면 태사의 부대라 해도 공격하겠습니다.”
“좋소. 지금까지 그래왔던 거고, 나는 서부군정부의 지휘 역량을 믿소.”
“둘째, 내 휘하 부대를 함부로 빼내지 마십시오. 그때는 전쟁입니다.”
“그 역시도 어려울 게 없지.”
미승휴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말한다.
“나는 살무사 대장, 당신이 내가 수여하는 계급을 정식으로 받고, 산동 총독 자리를 수락하면 그걸로 만족하오. 일단 겉모양이나마 우리 두 사람이 이끄는 정부가 하나가 되는 셈이니.”
“두 가지 조건을 지켜만 주신다면야, 그건 어려울 게 없습니다.”
협상은 마무리됐다.
미승휴는 왔던 것처럼 여유롭게 떠났다.
미승휴를 배웅하고 나서도, 동주는 선 자리에서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패배감.
모든 면에서, 허동주는 미승휴에 미치지 못한다.
“왜지? 왜 내가…….”
그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동주는 그 문제로 또 며칠을 고민했다.
“미승휴의 안에는, 어떤 기둥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그에 비한다면 나는, 분노에 미쳐 날뛰는 원숭이에 불과해.”
그렇기에 그와 같은 여유를, 관록을 보이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과 지위가 어떻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미승휴의 약속을 구걸했다.
“이런 수치는 두 번은 없어야 해.”
그러려면, 자신도 마음속 기둥을 세워야 한다.
“‘민족’…….”
왜 이 시점에,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았던 단어가 떠오르는 걸까.
“나도, 내 사상을 ‘체계화’해야 한다.”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의 건국자들처럼.
고려의 미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며 걸음을 내딛는 미승휴처럼.
자신도, 미래상을 그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상의 물감은 체계화된 사상이다.
***
민족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인간의 공동체다.
이는 ‘전 인류’ 같은 허상보다 현실적이다.
이 공동체가 어떻게 안전해질 수 있을까?
동주가 겪은 세계대전의 경험은 가장 유력한 방안을 제시한다.
‘물리적인 힘.’ 군사력, 그것을 뒷받침할 인구, 그들이 자랄 넓은 대지.
강력한 군대는 민족의 생존 기반이 된다.
여기에는 민족 구성원 전부가 가담해야 한다. 또 그들에 의해 유지돼야 한다.
군대는 타민족과의 투쟁에서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이 투쟁은 미룰 수는 있어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따라서 강력한 군대로 투쟁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거머쥘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고려 민족이 최종적 투쟁에서 승리해 세상의 주인 자리에 서면, 다음 세대는 우리의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된다.
허동주의 사상은 그렇게 뿌리를 내린다.
***
1909년 한 해 동안 연합군은 장강 이북의 모든 땅을 장악했다.
태평천국은 장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해보려 했지만, 인력과 물자 동원 체계가 망가진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다만 수도 응천엔 최선을 다해 방비를 굳혔다.
이는 상경이 지난 상경 공방전에서 선보인 요새화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상경 공방전에서 고려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응천 방위전에서 적을 입히고 물리치는 데 성공하면 된다.
그러면 그다지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강화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을 배신하듯, 좋지 않은 일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이 내전에서 승리! 반혁명 세력의 완전 척결을 선언했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그런 보고가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라트군이 버마에 진입해, 주둔하던 태평천국군을 섬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속국 상태에 놓여 있던 라타나코신과 베트남이 독립을 선언했다.
“우리 식민지인 다리다, 마닐라, 마자파히트에도 아즈텍과 일본의 연합군이 상륙! 더 남쪽 식민지인 봉래에도 연합해군이 출현했다 합니다!”
“아이누에서 선전포고를!”
“류큐도!”
“티베트, 알티샤흐르, 탕구트도…… 단교와 동시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누구도 태평천국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전 세계적인 포위망이 완성된 것이다.
***
“이 응천 공방전은, 투입된 화력만으로도 세계사적으로 손꼽히는 전투가 될 거다.”
쌍안경으로 응천 주변의 요새를 살피며, 동주는 말했다.
그 옆에 서 있다 쌍안경을 넘겨받은 신수덕도, 동주의 말에 동의했다.
“과연, 그렇겠습니다. 현대화된 요새도 보이지만, 전근대 성벽이나 유적 성터까지 모조리 요새화했군요.”
“이걸 그냥 도하해서 뚫으려 하면 어마어마한 희생을 내겠지. 태평천국군도 그럴 생각으로 저런 배치를 한 거겠지만.”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의도대로 자기들 의도대로 놀아날 거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확실히 망할 때가 됐나 봅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제발 우리가 바보이길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동주의 말에 수덕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손을 들어 동쪽을 가리킨다.
“아즈텍 연방과 일본공화국 해군입니다. 정말로 군함을 동원했습니다.”
“음, 일단은 함포로 두들겨서 요새를 부순 후에 들어간다는 작전이지. 태평천국군에겐 꽤나 절망적인 소식이 되겠군.”
동주의 예상 그대로였다.
태평천국에 절망적인 소식이 이어지는 동안, 연합군에는 희소식이 계속 이어졌다.
동남쪽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이 북상, 응천 남쪽으로도 포위망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다.
그다음부터는, 일종의 감상 시간이었다.
“아예 완전히 평지로 만들 작정인가.”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릴 정도로 무자비한 포격이, 태평천국의 요새 위로 쏟아졌다.
장강에서 거대한 함포들이 불을 뿜고,
남쪽에서도 화포들이 요새들을 짓부수어놓는다. 태평천국의 응사가 완전히 잦아든 이후에도, 계속.
지상뿐만 아니라, 하늘 위에서도 연합군 공군이 시가지 위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었다.
“……평양의 복수다.”
1905년, 전쟁이 시작되던 그날 밤, 평양이 맛본 절망과 공포를 그대로 응천으로 옮겨왔다.
“이런 게 인과응보지.”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응천 시민 중에는 이 포격 때문에 20여 년이 지나도 큰 소리에 발작을 일으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동주는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고려에도, 몽골에도 많이 있으니까.
괜히 ‘우리의 복수 때문에 그런 무고한 피해자가……’ 라면서 수작에 넘어가면 안 된다.
가해자의 모든 수작은 철저히 무시해야 한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저들의 비명소리처럼.
***
요새가 완전히 붕괴했다.
결국 연합군 육군의 거침없는 진격만을 앞두게 되자, 태평천국은 항복했다.
다들 황궁 앞 광장을 행진하며 아군의 승리를 드러내고, 적에게 확고한 패배감을 안겨주자고 들떴다.
하지만 동주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복수다.
동주는 응천의 황궁으로 곧바로 들어갔다.
부하들이 황궁 안을 장악했다.
예의를 지켜달라는 둥 항의하는 자는 사살했다.
피와 뇌수가 황궁의 아름다운 벽 위에 튀었다.
동주는 어좌까지 올라가 군홧발을 올려놓고, 먼지를 털었다.
한창 그러고 있을 때, 부하들이 태평천국 황제를 끌고 왔다.
일부러 제대로 걷지 못하도록 넘어뜨린 다음,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아마 황제는 당당하게 ‘내 발로 걸어가겠다!’고 외쳤겠지. 하지만 그걸 두고 볼 고려인들이 아니다.
짐승들의 황제는, 짐승답게 기어야 한다.
도살장에 끌려가듯.
난생처음 겪어보는 굴욕에 분노보다는 놀라움이 컸나 보다. 황제는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황제를 패대기치듯, 밀었다.
“네가 한족이라는 짐승들의 우두머리냐.”
굳이 통역을 쓰지 않아도, 황제는 동주의 말에 담긴 경멸의 어조는 알아들었다.
황제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군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별명이 살무사라 했던가.
일어나서 마주하려 했으나, 살무사의 부하가 오금을 세게 걷어차는 바람에 다시 쓰러졌다.
뒤에서 아들과 딸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얻어맞은 오금이 너무 아파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고개 들어.”
황제가 그 말에 반응할 틈도 없이, 동주의 부하들이 황제의 턱을 부술 듯 잡고 들어 올렸다.
얼굴에, 차갑고 끈적한 무언가가 끼얹어졌다.
동주가 황제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다.
황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식들이 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한 방에 몰아넣어.”
그의 머릿속에는 칸발리크 해방 때의 풍경이 떠올랐다. 잔인하게 찢겨서 광장에 내걸린 시체들.
이들도 그런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