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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2화 (32/541)

허동주(6)

태평천국군이 칸발리크를 버리고 퇴각하자, 곧바로 몽골과 서부군정부 연합군이 칸발리크로 진입했다.

-해방!

몽골인들은 자기네 말로 그렇게 외쳤다.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려의 장병들을 환영한다.

“기묘한 느낌입니다.”

신수덕이 그렇게 소감을 말했다.

“다들 그렇게 느끼고 있겠지.”

“예, 다들…… 지금껏 한족을 어떻게 죽이느냐, 원한을 어떻게 갚아주느냐에만 몰두하다가, 이런 환영을 받았으니까요.”

해방군.

그들이 몽골인들로부터 받는 대접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몽골인 소녀가, 수염이 꺼끌꺼끌한 고려인 병사의 얼굴에 연거푸 입을 맞춘다.

그제야 고려인 병사는, 복수에 미쳐 지내던 전사에서, 청년의 수줍은 얼굴을 회복했다.

그런 광경들이 칸발리크 시내에 무수히 펼쳐진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동주의 옆에, 몽골인 장군이 다가온다.

“역시 우리가 함께하면 해낼 거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알타이 민족이니까요!”

그 말이, 동주의 삶을 또 한 번 흔들었다.

-같은, 알타이 민족……?

그 자리에선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동주는 잠들기 전까지 그 생소한 개념에 대해 고민했다.

***

칸발리크를 탈환했다고 해도, 결국 도시 하나일 뿐이다.

도시의 동쪽과 남쪽으로 이어진 땅에는 아직 연합군이 진입하지 못했다.

여길 차지하고 황해의 바닷냄새를 들이마실 수 있어야, 비로소 고려 국내에 남은 태평천국군의 퇴로를 끊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고려 땅에 포위된 적은 본국으로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포위된 적을 섬멸하느라 시간을 끄는 사이, 태평천국이 본토 방어를 굳힐 수도 있다.

“우리 서부군정부 단독 진격은 어렵다. 몽골군과의 협의가 필요하겠지.”

그래서 동주는 분주하게 몽골군 사령부를 들락거렸다.

연락장교를 둬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는 직접 보고 듣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고집을 세웠다.

동주가 탄 차가 칸발리크의 광장을 가로지른다.

광장 저편으로, 먼 옛날 쿠빌라이 카간이 건설한 황궁이 보인다.

광장에는 참혹하게 찢겨나간 시체들이 여러 구 걸려있다.

광장과 황궁을 배경으로 내장과 뼈를 드러낸 시체들이 걸린 광경은, 승자와 패자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선전물 같다.

그 시체들 아래에서 칸발리크 시민들은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다.

잔혹한 복수와 순수한 행복이 한 장소에서 교차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동주는 얼마 전에 들은 말을 중얼거렸다.

“‘알타이 민족’…… 이라.”

***

몽골군 측에선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길든 짧든, 칸발리크에서 대기할 수밖에 없다.

동주는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번 셈이다.

“알타이 민족.”

몽골군의 배려로, 서부군정부 수장을 위한 임시 관저를 받을 수 있었다.

그곳 집무실 의자에 앉아,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알타이 민족이라는 그 생소한 개념에서 유독, ‘민족’이라는 말이 동주의 마음을 끌었다.

“한족 놈들의 침략을 물리친다고만 생각했지, 지금껏 그렇게 맞서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어…….”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은 못 떠올렸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고려, 민족.”

고려어를 쓰고, 고려의 역사를 배우고, 고려의 전통문화를 이어나가는, 동질적 집단.

“몽골인들에게선 확실히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전장에서는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에게 맞섰다.

칸발리크 해방 이후에는,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고서도 동지애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고려 민족’이라는 집단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고려 민족과 몽골 민족의 상위 범주로 ‘알타이 민족’을 상정하고 ‘동포’라 말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래서, 그 ‘민족’ 집단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이때의 동주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사상이 전혀 여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민족’을 중심으로 국가, 정치, 군사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동주는 책상 위에 던져둔 책들로 시선을 옮겼다.

요즘 유행한다는 사회주의 관련 서적이다.

무굴 제국이 공산 혁명으로 무너지고, 새로 바라트라는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설된 이후로 큰 주목을 받는 듯했다.

참고가 될까 해서 몇 권 구해서 읽어봤지만…….

“전혀 참고가 안 되는군.”

저 사상이 대체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미래를 그리는지, 어떻게 그런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 그 논리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했다는 말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전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마침내 모든 모순에서 해방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동주는 도저히 한족들을 ‘같은 인간’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말인가. 저들은 사람이 아니다. 해충이다. 우리 고려 민족의 생명을 갉아먹는 해충.”

다시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동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걸어 다녔다.

“해충은 박멸의 대상이지 공존의 대상이 아니야. 해충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논하는 자는 정신병자임이 틀림없다.”

애초에 사회의 하층민들끼리 국적을 초월해 서로 뭉쳐야 한다는 이야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태평천국의 상류층은 이 전쟁을 결정했을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악행은 태평천국의 하층민 출신 병사들이 저질렀다.

“이 사상을 만든 자는 한 번도 실제 하층민이나 병사를 본 적이 없겠지.”

책상 앞에서, 막연히 없이 사는 불쌍하지만 착한 사람들끼리의 유대가 가능하리라 믿으며 써 내려갔으리라.

“나중에 더 연구해 볼 가치는 있겠지.”

어쨌든 한 제국의 정부와 황실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배울 구석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야.”

동주는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

1908년에도 어김없이 여름은 찾아온다.

연합군은 포위망 안에 고립된 태평천국군을 북, 서, 동쪽에서 압박.

남쪽, 바다를 향해 몰아붙여, 전멸시켰다.

태사 미승휴는 포위된 적을 섬멸하면서, 동시에 고려의 노른자 지역들을 손에 넣었다.

“태평천국의 주력은 전멸했습니다. 남은 전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류성일은 그렇게 평가했다.

“태평천국이 아무리 인구가 많아도 갓 뽑아낸 병사들을 주력으로 길러내려면 시간이 걸리지. 잃은 장비와 물자를 다시 생산해내는 것도 그렇고.”

미승휴도 류성일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병력 육성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우리 정부의 통치 구역도 동북부에서, 요동 일대의 대평원과 평양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로써 서부군정부와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비해 확고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군사적 고찰 뒤에는 정치적 고찰이 이어진다. 미승휴는 그런 류성일의 말을 듣다가, 가슴 아픈 한 단어를 되풀이해 말했다.

“평양…….”

잿더미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전쟁 첫날의 폭격뿐만 아니라 태평천국군의 각종 만행으로 과연 회복될지 장담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다시 수도로 삼긴 어렵겠지.”

“그렇다는 말씀은……?”

“여기 요동을 우리 고려의 새로운 수도로 삼을 걸세.”

미승휴의 군대가 해방하고 장악한 요동.

그런 땅을 수도로 삼겠다는 건 미승휴 입장에서는 타당한 생각이다.

게다가, 이 땅은 또 다른 아픔 끝에 얻은 땅이다.

요동과 평양을 잇는 선 한 가운데, 압록강 하구의 도시 서안평.

그곳을 점령하고 태평천국군 전선 전체를 동강 내기 위한 처절한 공방전이 있었다.

거기서…… 미승휴의 동생이 전사했다.

부인과, 훗날 미승휴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는 유복자 하나를 남겨두고.

-동생의 피로 얻은 땅.

류성일은 그래서 미승휴가 더 요동을 각별하게 생각할 것이라 짐작했다.

“새로운 이름도 지었네. 동명(東明).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에서 따 온 이름이지.”

류성일에겐 이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

미승휴가 고려 내에서 확실히 우위에 선 만큼, 이제 어떻게 허동주와 고려민국 임시정부 세력을 흡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

요동을 수도로 삼은 이상,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한 국토의 설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첫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문제는 이야기가 나온 지금 생각해봐야 한다.

“요동의 입지는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최선이라 할 만하죠.

서쪽으로 황해를 접했기 때문에 무역항을 확보할 수 있고, 요하라는 큰 강은 공업용수를 제공해줄 겁니다. 다만…….”

류성일은 미승휴와의 사이에 놓인 지도를 향해 고개를 죽 내밀었다.

“평양이 안고 있던 문제를, 요동 역시 안고 있습니다.”

“서쪽 대륙으로부터 수도를 향한 공세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지.”

황해 서쪽에는, 평양이나 요동을 향해 화살처럼 비죽 튀어나온 반도가 있다.

산동.

이번 전쟁에서 평양을 초토화한 태평천국 공군과 해군의 기지가 즐비한 곳이다.

“따라서,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산동을 우리 고려의 영토로 넘겨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육로를 통해 적을 견제할 수 있으며, 동시에 수도도 안전해진다.

“그런데 지금 막 허동주가 산동으로 진입했지.”

“예.”

미승휴가 국내의 적을 포위하고 섬멸할 때, 허동주와 몽골도 협력하긴 했다.

그래도 그들은 주력 대부분을 남하시켜, 아직 완성되지 못한 황하 방어선을 돌파했다.

몽골군은 황하 남쪽에 펼쳐진 광대한 땅으로 전진, 수백 년 만의 재정복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한편 허동주는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동으로 진입했다.

“허동주와는 반드시 협상해야겠군.”

허동주를 무력으로 흡수하려 들면,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산동이 엉뚱한 자들에게 넘어갈 우려가 컸다.

지도에 시선을 둔 채, 골똘히 생각하던 미승휴는,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직접 만나봐야겠군.”

***

“……저들은, 거절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특사는 고려 태사를 만나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몽골로 파견된 특사도, 카간을 만나지 못했다고…….”

황제는 어좌에 아무렇게나 몸을 기댄 채, 황궁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짐의 퇴위나 영토 할양으로도 강화가 안 된단 말이냐…….”

퇴위하면 적어도 마지막 황제의 선대 황제는 될 수 있었으련만.

“저들은……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킬 생각이었으면서 나라를 보존하길 바라는가. 이웃을 멸망시키려 했다면 너희도 멸망할 각오를 하라’고 했답니다.”

“그것으로 끝인가?”

대답이 없다.

황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턱을 내렸다.

“저들이 한 말이 더 있는가? 왜 말하지 않는가?”

“그…… 실로 참람한 말인지라…….”

“이 상황보다 더 참람하랴. 말하라.”

“고려 태사가 직접 한 말은 아니오나, 폐하께서…… 고려의 번왕(藩王)이 되는 조건이라면 화친을……”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소란이 일었다.

“천자가 어찌 오랑캐의 신하가 된단 말인가! 말을 삼가시오!”

“대체 그런 협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왔소?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지만 그런 자는 군율로 다스려야 하외다!”

“천자가 오랑캐의 제후왕이 되는 건 없었던 일이오!”

“차라리 송나라처럼 장렬하게 멸망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이지!”

황제는 감정이 메마른 눈으로 신하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 저들은 짐더러 망국의 황제들처럼 죽으라고 말하는가.

황제에게 구차한 목숨을 지키지 말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라 하는 게 충성이라고 믿겠지.

황제는 일어섰다.

“짐은 들어가겠다. 나머지 논의는…… 그대들이 알아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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