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주(5)
1907년으로 넘어가면서, 태평천국은 남부 전선에서 대예국과 보우슈엥을 끝내 무너뜨렸다.
그 두 나라를 지원하던 무굴 제국은, 그래도 인도 아대륙의 역량이라는 게 있으니, 버텨줄 거라고 다들 기대했었다.
그러나 무굴 제국 역시 서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신 이슬람 제국과, 동쪽에서 적을 소멸시킨 태평천국의 공세 앞에서 무너졌다.
오랜 세월 무굴 제국을 괴롭혀 온 종교, 계층 간 갈등이 폭발하면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깃발을 드높였다.
무굴 제국은 혁명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이 대체했다.
-바라트 연방, 태평천국 및 이슬람 제국과 단독 강화!
1907년 중순의 일이었다.
태평천국은 이제 남쪽 전선을 정리하고, 모든 역량을 북쪽 전선으로 돌릴 여유가 생겼다.
***
그래도 마냥 암울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태평천국군이 남쪽에서 무굴 제국의 항복을 받아 내는 사이, 허동주의 서부군정부는 남쪽으로 적을 상당히 밀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해두면 몽골 쪽에도 상당한 여유가 생기지.”
지도를 보며, 동주는 참모들의 동의를 구하듯 그렇게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각하의 말씀대로 몽골군도 초원에 진입한 태평천국군은 전부 밀어냈고, 이제 사막 이남에서의 작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선 전체에 걸친 공세를 펼치기엔 무리가 있겠지.”
“그렇습니다. 아마 전력을 집중해서,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땅을 탈환하려 하겠죠.”
“정치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땅이지.”
칸발리크. 몽골의 수도.
국민과 군의 사기를 높이고, 카간을 비롯한 정부의 권위도 높이려면, 하루빨리 되찾아야 할 땅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칸발리크 탈환전에 몽골군을 도와 참전할 것인가, 아니면 지켜볼 것인가.
“……일단은 지켜본다.”
한참 만에 입을 연 동주의 결정은 그러했다.
“인도 아대륙의 공산주의자들이 항복했으니 태평천국도 가용 병력을 마음껏 북쪽으로 보낼 거다. 저들도 애써 확보한 칸발리크를 쉽게 내주진 않겠지.
적의 움직임이 어떤지를 먼저 읽어야 한다. 공세에 대한 논의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
태평천국의 수도, 응천.
옛날엔 말릉, 건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다.
그 땅의 황궁 깊숙한 곳을, 태평천국의 황제가 서성이고 있다.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
한참 걸음을 옮기다가 그렇게 중얼거린다.
“순나라의 폐제, 이자성.”
또 두어 걸음 옮긴다. 황제는 고개를 떨군 채 들지 않는다.
“주나라의 태조, 오삼계.”
거기까지 말하고서야, 고개를 든다.
“나의, 우리 황실의 시조, 홍수전!”
마치 조상에게 도전하듯, 그렇게 이름을 부르짖는다.
“다들 이 땅에 도읍하실 땐, 자자손손 영원하리라 생각하셨겠죠!”
그렇게 외치곤 미친 듯이 웃는다.
불안에 찬 웃음이면서 동시에, 그런 불안을 떨쳐내려는 웃음이다.
“저는 지금도 그리 생각합니다. 한인(漢人)들의 땅을 되찾고, 응천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거듭나게 할 겁니다!”
황제는 목에 건 나무 십자가를 꽉 쥔다.
앞선 왕조들과 달리, 태평천국은 크리스트교적 이상사회를 목표로 건국된 나라였다.
듣는 귀는 없다. 그래서 황제는 마음껏 소리를 질러댔다.
“……저는 마지막 황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제 뒤로 얼마나 더 이어질진 모르지만, 그렇게 되게 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다짐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07년 중순에서 말에 걸쳐, 태평천국군 병사들을 계속해서 북방으로 옮겼다.
이번 작전은, 세계대전의 아시아 전선을 결정짓는, 최후의 대공세가 될 것이다.
황제는 십자가에 입을 맞춘다.
“이제는 주의 보좌 곁에 계신 시조께서, 그리고 우리 주께서 돌봐주시길.”
***
“칸발리크는 고려 국내로 진입한 태평천국군의 주요 보급로다.”
허동주는 참모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듯 다시 말했다.
“태평천국이 여길 잃으면, 요동 방면의 항구를 통한 해상 보급에 의존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삼한반도 쪽 전선에는 해상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즈텍 연방과 일본공화국의 방해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여기서 더 많은 해상 보급의 부담은, 태평천국 해군의 역량을 넘는 것이다.
“따라서 태평천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칸발리크 일대를 사수하려 들 것이다. 상경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되더라도.”
미승휴 정부의 임시수도, 상경. 여길 공략하기 위해 태평천국의 병력이 속속 동북방으로 집결하는 상황이다.
참모 중 누군가 발언 허락을 구한다. 동주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그래도 상경 공략에서 곤란을 겪는다면, 태평천국도 칸발리크 방면 병력을 빼지 않겠습니까.”
상경을 공격하는 병력에 조금이라도 더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서.
혹은 상경 공략을 포기하고, 국내 방어로 전환하기 위해서.
“그렇다. 우리가 몽골군을 도와 칸발리크 탈환전에 참여하는 건 그때가 되겠지.”
“그러면 우리는 계속 상경 공방전을 지켜만 보는 겁니까?”
철저하게 수비 태세인 칸발리크를 공격하는 건 위험하다. 칸발리크의 수비가 약화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친다.
일견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그때까지 미승휴 정부가 상경에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미승휴 정부가 상경 공방전에서 패배한다면?
고려의 3대 세력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이자, 가장 정통성에 근접한 세력이 몰락하는 것이다.
그러면 칸발리크 탈환이고 뭐고 이전에, 고려 자체가 정말로 멸망해버릴 수도 있다.
고려가 멸망하면? 몽골은 저항을 포기하고 태평천국과 강화를 맺으려 할 것이다.
몽골, 고려가 몰락한 이상, 일본공화국이든 아즈텍 연방이든 아시아 문제에서는 손을 뗄 테고.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상경이 함락당하는 건 막기 위해서.
동주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옳은 의견이다. 그렇기에, 수비가 단단한 칸발리크를 우회해서 적의 보급로에 타격을 주는 작전을 세우려 한다.”
보급이 지나가는 모든 경로의 수비를 동일하게 강화할 수는 없다. 반드시 약한 부분이 있다.
태평천국군은 애써 전선을 유지하긴 했지만, 상경 공략에 힘을 기울이느라 구멍이 숭숭 뚫린 상황.
그 틈을 돌파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적 전선 돌파와 보급로 습격에는, 지금까지 아껴둔 전차를 대량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도입할 예정이다.”
미승휴 정부와 몽골에서 받은 전차를 차곡차곡 쌓아왔기에, 지금은 그 수가 꽤 된다.
아껴가며 시험 삼아 몇 번 써보긴 했지만, 그 유용성은 충분히 입증됐다.
물론 훗날의 제대로된 전차에 비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중화기나 이단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보병보다는, 훨씬 생존율이 높다.
“기갑 부대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시험해본다. ‘우리’는 살무사다. 도사리고 있다가 적의 발꿈치를 무는 것만큼 익숙한 일도 없지.”
***
1907년 겨울, 상경 대공세가 시작됐다.
동원 가능한 모든 이단, 항공기, 전차, 화포, 기관총을 쏟아부었다.
특히 이단의 능력을 활용해 항공 전력을 극대화했다.
물론, 태평천국이 동북쪽 전선에 몇 달 동안 전력을 집중시키는 동안, 미승휴도 놀고만 있진 않았다.
“고려 제국의 운명은 이 폭이 몇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공간에 달렸다.”
그렇게 말하며 직접, 상경 외곽 수 킬로미터 앞에 구축된 요새선을 시찰했다.
단순히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배치한 정도가 아니다.
쓸 수 있는 콘크리트를 모조리 들이부어서 만든 튼튼한 장벽과, 화포를 빈틈없이 배치해 다가오는 적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버릴 화망을 구축했다.
몇 달을 포위당한다 해도 버틸 식량까지 비축해뒀다.
“내 평생 군인으로서 배우고 익힌 병참의 모든 것을 선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경 요새선은 미승휴 정부가 확보한 고려의 모든 역량 그 자체이자,
미승휴가 보낸 군인으로서의 삶 그 자체였다.
“그러니 여길 돌파당한다면…….”
자결하는 길 말고는 남은 게 없다.
고려 제국도 태사 미승휴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리라.
“한번 와 봐라. 오히려 여기서, 태평천국은 소멸한다.”
이 공방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패자는 반드시 멸망한다.
모두가 그런 예감을 느끼면서, 전투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
해가 바뀌어 1908년이 됐다.
태평천국의 황제는, 신이 자신을 버렸음을 직감했다.
한 달여에 걸친 대공세에도, 상경 요새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통수회의가 열리는 어전.
분명 적절한 조명이 비추고 있는데, 분위기 탓인지 어두운 느낌이 들었다.
황제 본인 마음도 어둠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듯하다.
“……서부군정부라는 자들의 보급 방해를 처리하지 못했다.”
참모라는 이름의 장성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경들은 분명 경미한 피해라고 보고했는데, 왜 최전선에서 보내오는 보고는 다른가. 지금까지 최전선의 장병들이 짐에게 보낸 탄원을 가로막은 건가. 이것이 짐을 기망한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런 상황을 두고,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고 하던가.
그러나 신하들의 탓만 하기엔 황제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그가 이 전쟁에서 그 어떠한 전망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신하들이 ‘폐하의 탓도 있습니다!’라고 대놓고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삼한반도의 병력을 빼서 상경 공방전에 투입해도 무방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상경만 점령하면, 그래서 고려의 태사 미승휴만 무너뜨리면 된다고.
그러면 삼한반도야 얼마든지 다시 점령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평양 이남의 삼한반도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넘어갔다.
상경 공방전에서 소모될 대로 된 전력으로, 지난날의 전선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
“칸발리크 수비 병력은 대체 왜 상경 공방전 쪽으로 돌리자고 했지? 상경만 함락하면 설령 칸발리크를 잃어도 얼마든지 종전 협상이 가능하다는 계산은 대체 누가 했던가?”
상경은 함락시키지 못했고, 수비가 약화된 칸발리크에서는 적의 어마어마한 공세를 받는 중이다.
“우리는 처절할 정도의 공세를 펼쳤다. 그런데 왜 졌지? 왜 상경을 함락하지 못하고, 더는 공세를 지속할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지?
그렇게 승리를 자신하던 경들은 지금의 경들과 다른 사람인가!”
끝내 황제의 노성이 어전을 울렸다.
장성 중 누군가 조심스레 대답합니다.
“우리가 처절했던 만큼, 적들도 처절하게 저항했습니다. 그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저항이었습니다, 폐하.”
“당하면 저항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경은 어린아이도 아는 것을 몰랐다 하는가!”
다시 침묵이 어전을 휩쓴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참모들을 질책하는 건 이 정도로 됐다. 더 질책해봤자 전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칸발리크가 함락되기 전에, 고려에 진입한 병력을 칸발리크 쪽으로 빼낼 방법은 있는가.”
누군가 주저하며 답한다.
“……시간이 도저히…….”
“칸발리크가 버틴다고 해도, 이미 서쪽 출구는 허동주가 막았습니다.”
“그렇다면, 바다를 통한 구출은?”
“그것도 아즈텍과 일본 해군으로 인해…….”
아즈텍 연방과 일본공화국이 고려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그 선박들을 침몰시켰지만, 두 나라의 정식 참전만 불러왔을 뿐이었다.
자업자득이다.
“폐하, 고려 내에 있는 아군의 구출은 불가능합니다. 남은 병력이라도 보존해서, 새로 방어선을 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해안의 방어도 강화하고, 북쪽의 산업 시설도 남쪽이나 서쪽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병력으로 효율적으로 방어할만한 지형을 찾아 전선을…….”
황제는 손을 들어 신하들이 일단 말을 멈추게 했다.
“새로운 방어선이라면, 어디가 적당하겠는가.”
“황하…… 가 어떠할지.”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