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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0화 (30/541)

허동주(4)

1906년도 가을에 접어들었다.

전쟁이 1905년 11월에 시작했으니, 곧 발발 1주년이 되는 셈이다.

적들이 국토를 유린하고 있는 동안엔 시원한 가을 날씨를 즐길 틈도 없다며, 태사 미승휴는 씁쓸하게 웃었다.

미리안의 백부, 미승휴가 이끄는 또 다른 정부는, 상경을 임시수도로 정하고 급하게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남아 있는 산업을 정비하고, 최전선의 공장들은 어떻게든 뜯어서 후방 지역인 동북방으로 옮겼다.

생존한 관료들을 긁어모아, 어떻게든 정부 꼴을 갖추려고 분투했다.

그렇게 해서 대충 숨을 돌리는 데에, 꼬박 1년이 걸렸다.

태평천국이 자기네 국력은 생각도 않고 전쟁을 확대한 덕에, 그 1년을 버틸 수 있었다.

버티고 나니 이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이 허동주라는 자 말이야, 대장 계급을 자칭한 건 괘씸하지만, 대단한 사내긴 해.”

미승휴의 말에, 훗날 미리안 정권에서 법무성 장관이 되는 류성일도 동의했다. 그는 이때 미승휴의 참모로 일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허동주가 적 전력을 분산시켜준 덕분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삼한반도 동남쪽, 신라성(新羅省)을 중심으로 저항하는 고려민국 임시정부도, 적의 전력을 분산시켜주고 있다.

“단순히 그런 군사적 역량만이 아니야. 허동주는 피난민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다시 병사를 징발하고, 훈련하면서 규모를 키우고 있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병사를 단순히 지휘하는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 병역 체계를 관리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갖췄다는 거군요.”

“그래, 이건 말하자면, 어설프긴 하지만 그럭저럭 작동하는 국가지. 허동주는 그 나라의 건국자고.”

무정부 상태에서 스스로 정부를 세우는 수완. 보통 능력이 아니다.

문제는 미승휴의 정부가, 허동주의 정부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보니까 상관 살해도 여럿 저질렀어. 이걸 인정해줘야 할까?”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봤자, 허동주를 칠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불문에 부쳐야겠군.”

미승휴의 ‘태사’ 직책도 황제의 인정을 받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미승휴는 원래 원수 계급이었던 데다, 태사 자리는 구 정부의 관리들로부터 추대받은 것이다. 허동주보다는 좀 더 정통성에 근접해 있다.

“이런 건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애매한 ‘동맹’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는 게.”

류성일의 제안에 미승휴는 생각에 잠겼다.

허동주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 것인가, 하는 고민이었다.

“허동주가 자칭한 대장 계급을 당장 인정해주긴 어렵겠지만, 물자를 지원해 주면서 협력하자고 제안하면,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방정부’를 지원하는 ‘중앙정부’라는 모양새를 만들 수도 있고요.”

류성일의 말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미승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안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왕 지원하려면 통 크게 하는 게 좋지. 소총이나 식량뿐만 아니라 화포도 지원해 주고, 필요하면 우리 공군 지원도 받을 수 있게 연락망도 개설해주도록 하지.”

“공군…… 말씀이십니까?”

아즈텍 연방의 지원을 받아 이제 막 창설된 공군의 지원까지 더해준다. 미승휴가 허동주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동주가 확보한 인력과 자원으로 자기 지역에 공군기지를 건설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그러면 우리 공군의 작전 범위도 넓어질 테니 말이야.

아, 말 나온 김에, 시험 삼아 이번에 나온 ‘전차’를 좀 줘 보자고. 살무사가 어떻게 운용하는지 보고 싶군.”

***

미승휴 정부만이 허동주를 돕는 건 아니었다.

칸발리크 함락 후, 사막 너머의 초원으로 정부를 옮긴 몽골 제국 역시, 허동주를 지원했다.

“이제 슬슬 게릴라전에서 벗어나 정면에서 싸움을 걸어도 밀리지 않습니다.”

신수덕은 아군의 전력을 그렇게 평가했다.

대장을 자처하게 된 동주와 마찬가지로, 신수덕은 이때 준장 계급을 받았다.

“음.”

동주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리를 흘린다. 현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위해 생각에 잠길 때 내는 소리다.

“화포에 기관총까지 제대로 갖추니, 산에서는 고지전을 수행할 수 있고, 평원에서는 참호전을 수행할 수 있다…….

여기저기 도망 다니지 않고 현 전선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해진 건가.”

지금까지 치고 빠지며 태평천국군을 괴롭힌 게릴라전은 순전히 허동주의 역량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하게 될 적과의 정면승부는 허동주의 역량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장 계급을 자처하게 됐다고 해도, 내 본질이 중사임을 잊어선 안 돼.”

눈앞의 적과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하는, 전술적인 측면.

거기서 동주는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전선을 움직이는 전략은 내 분야가 아니야.”

살무사는 적을 물기 전에 도사린다.

도사리면서, 분석하는 것이다.

적을, 그리고 자신을.

그런 분석은 곧 배움이다.

배움은 곧 성장이고.

“뭐가 부족한지 알았으니, 어깨너머로라도 배워야지.”

“각하의 그런 점이 젊은 장교들의 존경을 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시점엔가, 신수덕은 동주를 ‘각하’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건 나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수덕이, 자네도 배워야지.”

신수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동주가 저렇게 말한 이상,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앞으로 피로한 나날을 감수해야 하기에.

동주는 수덕에게서, 벽에 걸린 지도로 눈을 돌렸다.

지도에는 대략적인 각국 군단의 세력과, 그들 사이의 경계선이 그려져 있다.

미승휴가 단순히 선의로 허동주를 돕는 게 아니듯, 몽골이 허동주를 돕는 것도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나에게 지원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겠지.

바꿔 말하자면, 그들에게 허동주는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몽골은 북방으로 밀려나 있고, 미승휴는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만약 허동주가 없다면, 그사이에는 크나큰 빈틈이 생겨버린다.

즉, 허동주는 그 사이를 메우면서, 대(對) 태평천국 전선을 하나로 잇는 중요한 동맹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를 지원해서 내 세력이 커질수록, 태평천국도 나를 점점 더 견제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태평천국은 허동주 방향의 전선으로 병력을 좀 더 많이 보낼 것이고, 몽골 측 전선이나 미승휴 측 전선은 상대적으로 부담을 덜게 된다.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두 동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야 할까?

하지만 서부군정부가 아무리 게릴라를 통해 단련되었다고 해도, 정면 공세에서의 막대한 소모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허동주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꼴이니까 동맹들이 허동주를 외면하진 않겠지만…….

다른 세력의 지원에만 의존하게 되면, 곧 그 세력에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미승휴 밑으로 들어가면, 지금 같은 세력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지겠지.

모든 지휘권을 빼앗기고, 일개 의용군 우두머리로 전락할 것이다.

아니, 그 정도에서 그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허동주가 저지른 상관 살해 등을 구실로 제거하려 들 수도 있다.

-일단은 상황 변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나.

태평천국이든, 몽골이든, 미승휴 정부든, 뭔가 변화가 있기를 기다려야 한다.

허동주의 서부군정부는 그 틈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대국을 보는 동주의 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높아져 갔다.

난세가 그렇게 살무사를 키웠다.

***

1906년 시점에서 태평천국이 저지른 실수들을 돌이켜보면, 그들이 맞이한 비극적 결말의 씨앗들이 이미 뿌리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태평천국놈들, 전략 목표가 없는 건 아닌가?”

허동주의 참모 중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태평천국도 ‘한족의 옛 강역을 되찾자’느니 하는 구호로 열심히 자기네 국민을 선동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그런 말로 국민에게 열기를 불어넣고, 몽골과 고려를 공격했다.

처음 말을 꺼낸 참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이상해. 물론 그런 명분을 내세우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영토를 되찾고, 그 ‘고토 회복 전쟁’을 마무리 지을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생각하지 않았다니, 그럼…….”

“그래, 이놈들, 막연히 전투에서 크게 이기면, 전쟁은 저절로 마무리될 거라고만 생각한 것 같네.”

또 다른 참모가 묻는다.

“고려와 몽골이 수도를 빼앗기고도 계속 저항하리라는 생각은 못 했다는 건가?”

“수도가 함락당하고 전력을 크게 잃으면 상대가 알아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겠지, 그런 심산이 아니었을까.”

“정묘한란(丁卯漢亂) 때도 황제께서 몽진해가면서까지 항전하셨는데…… 그놈들은 기초적인 역사도 모른단 말인가?”

고려는 지금 원래의 정부가 소멸하고, 임시정부가 세 개나 생겨났다.

그런데 그 정부들이 하나같이 복수와 저항을 부르짖는다.

“태평천국군 참모진들에겐 악몽 같은 일이군.”

“옛 한족의 강역을 적당히 회복하고, 그 적당한 영토 확장에 만족하면서 전쟁을 끝내는 게 불가능해졌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우리 국토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인데…….”

“그게 말처럼 쉬우면 벌써 했겠지. 군정을 실시하면서 꼭두각시 정권을 세울 준비, 혹은 식민지로 만들고 총독부를 설치할 준비, 그런 게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태평천국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복한 지역의 치안과 보급선 유지를 위한 병력도 부족해. 남쪽 전선으로도 한창 전쟁이 확대되고 있는데, 여기로 돌릴 병력이 남아있을 리가.”

“우리 내부의 ‘민족반역자’들과 내통할 방법도 마련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러려면 그런 약탈과 학살을 자제했어야지. 원한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는데 그런 방법이 통하겠나?”

“이미 항복했던 부대들도 제대로 무장해제 시키거나 하질 못해서 다시 저항 쪽으로 돌아서는 판이지.”

훗날 어떤 이들은 태평천국이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고 소멸할 계획이었기에 그렇게 잔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설은, 애초에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무계획적으로 나선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태평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소멸한 시점에선, 실상은 누구도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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