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주(3)
그런 걱정에 잠겨있는 동주에게, 장교 하나가 다가온다.
중위다. ‘중령’인 이쪽을 보고 경례를 해 온다.
동주는 제대로 경례를 받아준 뒤, 말했다.
“서부군정부 총사령관 허동주다. 그쪽은?”
“예?”
서부군정부니 뭐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동주는 수덕에게 설명을 맡길까 하다가, 그냥 자신이 설명하기로 했다.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고려 제국 소속 군인은 사라지고, 고려인을 보호하는 군인들만 남았으니까.
“정부는 없어졌고, 명령체계도 없어졌다. 그래서 민간인들 보호 중인 실력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각자가 새 정부를 자처하고 최고 지휘관이 되는 세상이지. 몰랐나?”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말하자면 군웅할거 시대라는 거지.”
중위는 동주의 말을 잘 따라가지 못하겠는지,
“아, 예…….”
하고 얼빠진 대답을 내놨을 뿐이다.
“어떻게 할 텐가? 내 밑으로, 서부군정부에 들어올 텐가? 그렇다면 여기 마을 사람들까지 우리 관할 지역으로 피난시켜 주지.”
그쯤 되자 중위도 대충 사정을 눈치챈 모양이다.
“만약 따르지 않겠다면 어떻게 됩니까?”
“남 좋은 일만 시키고 갈 순 없지 않나. 저 한족들하고 계속 싸우려면 물자가 필요해. 그쪽 병력 중에서 지원자 받고, 안 따라오겠다는 사람은 무장해제시킨다.”
벌거벗은 채로 남겨두겠다는 협박.
정말로 그렇게 하면, 중위는 늦는 빠르든 죽는다.
야박해도 어쩔 수 없다. 동주는 세력을 키워야 한다.
누구도 서부군정부와 동주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면.
동주 자신의 의지대로 적에게 복수하려면.
중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오늘부터 중령님을 따르겠습니다.”
중위는 경례한다.
동주는 그 충성맹세를 받아주며 마을을 곁눈질했다. 동네 꼬마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본다.
어떤 꼬마들은 벌써 병사들 손을 붙잡고 깔깔거리고 웃는다. 신수덕도 그런 병사 중 하나다.
오랜만에 보는 평화롭고도 흐뭇한 광경이다.
그 모습에 미소지으려다, 동주는 다시 눈앞의 문제에 집중했다.
“적 병력이 적어서 다행이군. 우리도 뭐 만신창이지만. 그런데 왜들 저렇게 나뉘어서 돌아다니는지 아나?”
승세를 잡았다고 해도, 태평천국군에게 여긴 적지다.
아직 고려의 영토는 동북쪽으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저렇게 군율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돌아다닐 처지가 아닐 텐데.
“저도 이렇게 되기 전에 주워들은 이야깁니다만, 태평천국이 전선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려로 들어오면서 몽골 영토를 지나야 했을 테니, 당연히 전선이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겠지만…….”
평양을 시작으로 삼한반도에 상륙한 태평천국군이 형성한 전선이 하나.
칸발리크를 공격하며 시작된 대 몽골 전선이 둘.
그 동쪽으로 펼쳐진 요동 방면 대 고려 전선이 셋.
하지만 태평천국의 막대한 인구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 전선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텐데?
중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려와 몽골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도 전쟁을 시작한 모양입니다.”
“남쪽……?”
“아시다시피 이 전쟁, ‘한족의 옛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거라, 평양 공습이 성공하고 칸발리크도 함락된 후에 곧바로 남쪽에도 전쟁을 확대한 것 같습니다.”
태평천국의 남쪽에서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대예국이나 보우슈엥, 두 나라와도 전쟁을 시작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고려나 몽골 전선에서 병력을 빼냈을 테니, 이렇게 적은 수가 된 것도 말이 되는군.”
“게다가…… 정부가 없어진 고려는 이미 망한 나라, 따라서 대 고려 전역은 이미 이긴 싸움. 태평천국 놈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병사들을 느슨하게 풀어두고 마음대로 약탈에 나서게 하는 거로군. 고려인이 몇이나 죽건, 그놈들 입장에선 알 바 아니겠지.
그 대신 몽골이나, 남쪽 나라들에 전력을 집중시키겠다는 전략인가.”
적들의 오만함에 피가 끓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건 기회다.
적이 방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틈을 타서 패배를 수습할 수 있다. 숨을 돌리고, 반격에 나설 준비를 할 수 있다.
동주의 결단은 빨랐다.
“적들이 그렇다면, 아직 조금은 여유가 있다. 아직 우리나라의 남은 국토는 넓으니, 전선은 계속 넓어지겠지.
안 그래도 부족한 태평천국군 전력이 광대한 전선에 분산된다. 우리는 힘을 계속 모으면서 적을 각개격파한다.”
동주는 부대원들에게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철수 준비를 할 것을 명령했다.
곧, 자국군의 행방불명을 감지한 적군의 후속 부대가 마을로 들이닥칠 것이다.
“마을은 태워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적의 후속 부대가 제대로 판단을 못 하게 만들어야죠.”
동주에게 다가온 수덕이 그렇게 의견을 말했다. 동주는 끄덕였다.
그렇게 중위가 이끌던 병력, 마을 사람들까지 합류한 동주의 무리는 다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비슷한 일들이 반복됐다.
마을이나 피난민 행렬을 구한다. 그 피난민 중에서, 허동주 부대를 따라가고 싶다는 남자들이 합류한다.
그중에는 아직 소년에 불과한 자들도 있었지만, 허동주는 총이 남는다면 받아들였다.
태평천국의 만행에 원한을 품은 자도 있었다.
그저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민병대도 있었다.
그들 모두를 받아들였고, 거기 딸린 민간인들도 보호하면서, 영역을 넓혀갔다.
하루가 다르게 서부군정부의 위상은 높아졌다.
“전쟁이란 이렇게, 뜻하지 않은 재능을 발굴해 내는 걸까.”
어느 산골짜기, 또 다른 전장에서, 동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감상은 비웃음과 함께 지워버리고, 신수덕을 향해 명령했다.
이제 그 이등병은 충실한 부관이다.
“혹시라도 춥다고 불을 지피지 않게 단속하도록. 불빛이 퍼지면 다 죽는 거다.”
“알겠습니다.”
신수덕이 동료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파하고, 병사들은 민간인들 틈으로 흩어져 불을 피우지 말도록 단단히 주의를 준다.
이렇게 쫓기는 와중에는, 담배에서 나오는 불빛 한 조각도 조심해야 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마자, 산속을 가득 채우는 울림이 들려온다.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다. 여러 대인 것 같다. 고려군의 것일 리는 없다. 틀림없이 태평천국군의 항공기가 야간 정찰을 나선 것이겠지.
혹은, 어딘가를 폭격하러 가는 것이거나.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단이라도 한 번 마주쳤으면, 떼죽음이었겠지.”
몇 차례 교전이 있긴 있었지만, 사방으로 흩어진 적군의 일부 분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산속을 전진하다 마주쳐서 다행이었다.
허동주는 부대를 산등성이 여기저기로 옮기며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기습하는 방식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비행기 소음이 멀어져 간다.
***
민간인들이나 병사들 사이에서는 ‘살무사 군단’이라는 별칭이 더 많이 쓰인다.
특히 병사들은 그들의 수장에 대한 애정과 친근감을 담아, 훨씬 계급이 높아진 후에도 동주를 ‘살무사 중사’라고 불렀다.
동주도 그런 별명에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다만 되도록 정식 명칭인 ‘서부군정부’를 사용해 줄 것을 권했다. 특히 외부 세력을 상대할 때에는.
이 서부군정부가 훗날, 고려 제3제국 내에서 허동주를 지지하는 최정예 파벌, ‘서부군’이 된다.
“‘정부’라는 이름이 갖는 힘이 이렇게 크군.”
속속 합류하는 다른 부대들의 목록을 보며, 동주는 그렇게 소감을 말했다.
“아무래도 다들 ‘의지할 정부’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합류한 부대들의 장교 중에는, 허동주가 계급을 사칭했다며 다시 떠나려는 자들도 있었다.
병사들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권위 의식만 높은 자들에게 반감을 품었다.
허동주 본인이 그랬듯이, 병사들의 그런 반감을 이용해 장교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렇게 뒤집어진 부대는 곧바로 허동주 밑으로 합류했다.
“정말 믿을만한 사람들은, 장교의 권위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런 장교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보다, 허동주의 실력에 더 무게를 둔 자들이었다.
이 나라 고려를 구할, 실력.
서부군정부의 규모가 커질수록, 허동주가 자처하는 계급도 점점 높아졌다.
때로는 장교들이 ‘우리를 지휘하려면 격을 맞춰야 한다’면서 추대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장군’이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꾸준히 ‘실력’을 보여야 했기에, 동주는 적극적으로 항전에 나섰다.
주로 태평천국군을 기습적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에 가까웠지만.
동주는 성과가 돋보이도록, 적군에게는 서슴없이 잔인한 수단을 취했다.
여기엔 동주나 부하들의 개인적인 원한도 더해졌다.
태평천국인들이 지르는 비명을 아무리 들어도, 사람이 지르는 비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네 말로 저주를 뱉었다.
허동주는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껄껄 웃기도 했다.
이렇게 잔혹하지만 확실한 성과에 열광하는 자들이 계속 모여들며, 서부군정부는 제국의 서북방을 지배하는 한 축으로 떠올랐다.
태평천국군 일부를 유인하고 함정에 빠뜨려서 섬멸한다.
적을 유인할 때는, 잔인하게 해체된 적군의 시체를 나무에 걸었다. 아니면 목숨만 붙여서 계속 비명을 지르게 하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을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이불에 오줌 싼 일까지 불게 하고 죽였다.
고려말을 할 줄 아는 태평천국 병사는, 그 애인이나 누이를 어떻게 짓밟아 줄지 상세히 이야기하고 죽였다.
그렇게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적을 기만하길 수차례.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방법이 통할지 알 수 없다.
“한 번 전투를 치를 때마다, 총알을 얼마나 쓸 건지, 앞으로 남은 총알이 있는지, 계속 신경 써야 해.
총알은 밭에서 거둘 수 있는 게 아니야. 누가 공장에서 생산해서 여기로 가져다줘야 하는 거지.”
그 밖에도 신경 쓸 것은 많다. 붕대, 구급약, 식량, 모포, 양말 등…….
“지금까지 이렇게 해 온 것도 기적이야. 지금쯤 적들이 우리를 포착하고 섬멸하려고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서 다가오고 있을지도 몰라.
내일 당장…… 중화기라도 갖춘 부대와 맞닥뜨리면 전멸이야. 그리고 여기엔 이단 한 명 없어. 적 비행기가 민간인들이 모여있는 것만 봐도 끝장이란 말이다.”
푸념한다고 당장 해결책이 나오진 않는다.
요령 좋은 신수덕도 이럴 때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동주의 고민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동주의 급격한 성장세와 놀라운 전공을, 다른 실력자가 주목하기 시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