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주(2)
허동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중령을 비롯한 장교들이 ‘항복’한다는 소식만으로도, 병사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병사들은, 민간인을 포함한 1만의 무리를 이끌고 적지를 돌파한 허동주에게 내심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여기에 더해, 중령의 행동에 반감을 품은 장교들도 가담했다.
자신을 데리러 온 병사들과 함께, 동주는 중령의 방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앞을 가로막지 않는다.
간부들은 도망치거나, 구금되거나, 아니면 반란에 가담했다. 병사들은 남김없이 허동주의 편을 들었다.
중령의 방 문을 걷어차며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간다.
중령은 권총을 들고 있지만, 어딜 겨눠야 할지 정하지도 못한 듯하다.
그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을 겨누는 십수 정의 소총을 바라볼 뿐이다.
병사들 사이에서 허동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 쏠 용기도 없고, 자결할 용기도 없소?”
“야 이 새끼야 이거 반란이야!”
목소리 하나만큼은 우렁차다. 중령다운 부분이라곤 그뿐이지만.
“안심하시오. 죽이진 않을 테니. 총 내려놓고 순순히 포박에 응하시오.”
중령은 눈알을 굴리다 권총을 책상에 내려놓는다. 병사들이 다가가 권총을 압수하고, 중령의 손을 묶는다.
그 모습을 보며 동주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임관할 때 맹세하시지 않았소. 군인으로서 황제 폐하의 신민을 수호할 의무를 지겠다고. 그 의무를 저버린 거야말로 반란이 아니면 뭐요?”
중령은 무장해제에 포박까지 당했으니 굳이 죽이진 않을 거라고 안심했는지, 마지막으로 발악을 했다.
“미친 새끼야 이제 황제고 나발이고 없어! 고려는 진즉에 망했어!”
“불경죄까지 더하시는군.”
동주는 중령에게서 빼앗은 권총을 건네받았다. 안전장치를 풀고 중령에게 똑바로 걸어간다.
“주, 중사! 살려준다면서?”
“지금 저지른 불경죄는 아니오.”
이마에 깔끔하게 한 발.
중령의 시체는 움찔대며 늘어진다.
신수덕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중령의 시체에서 계급장을 뜯어냈다. 그리고 동주에게 다가가, 그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계급은 칭하는 사람 마음이니, 높을수록 좋을 겁니다.”
원래 동주가 달고 있던 중사 계급장은, 동주가 내민 손바닥 위에 놓았다.
동주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걸 신수덕에게 달아줬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너도 하나 달아라.”
동주는 방 안에 선 사람들에게 돌아섰다.
“방금 처단한 반역자 말대로, 우리나라 정부는 무너졌다.”
다들 숨을 삼킨다. 반란 그 자체는 누구라도 실행할 수 있다. 반란이 실패하면 죽음뿐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반란이 성공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반란을 꿈꾸는 자 중 거기까지 생각하는 자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다들, 허동주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린다.
“우리가 오늘부터 새로운 정부다.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거다. 새로운 고려 제국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차렷 자세를 취한다.
절도 있게 올라가는, 경례.
허동주 군벌, 살무사 군단, 혹은 ‘서부군 정부’라 불리는 정예 집단의 시작이었다.
***
동주의 기억은 ‘중령’을 자처한 이후로 옮겨간다.
겨울. 그러나 해는 바뀌어 1906년이 되었다.
어떤 산골짜기 마을을 약탈하러 나선 태평천국군 병사 무리를 포착하고, 조용히 추격한다.
“한족 새끼들 또 저 짓인가.”
경멸과 분노를 뒤섞어 혀를 찬다.
그런데 신수덕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한다.
“……? 저놈들, 마을에 들어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랬다. 마을 주변에서 엄폐물을 찾아 웅크린다.
그리고 들려오는, 따닥따닥 뭔가 튀는 소리. 총성이다.
“교전인가?”
“마을에 아군이 있나 봅니다. 한족 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하는 겁니다!”
동주는 멈칫했다. ‘서부군정부’를 자처한 뒤로 마주한, 첫 아군이었다.
아니, 아군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저들을 구해준다 해도, 자신의 적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신수덕의 눈을 들여다본다. 소년병이라고 해도 믿을 얼굴.
점점 차가워져만 가던 눈빛이 오랜만에 순수한 빛을 찾았다.
“동포들을 구할 기회입니다!”
기회…….
지금까지는 없었던, 기회.
그 기회가 없어서 도망쳤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도망칠 수 있을까?
“변명거리가 없으니 도망을 칠 수가 없군. 아군을 돕는다.”
동주의 결단을 들은 신수덕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런 신수덕의 철모를 살짝 두드린 다음, 허동주는 그의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적들 바로 뒤로 접근하면 아군 총에 맞을 수도 있으니까, 측면을 친다. 똑바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뱀이 땅을 기듯이, 바싹 낮추고 접근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기습 효과를 극대화한다.
“내가 신호하면, 뱀이 머리를 들고 콱 물어버리듯이 친다. 한차례 총알 좀 퍼부어주고, 곧바로 백병전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착검들 해 둬.”
신수덕이 총에 대검을 부착하며 중얼거린다.
“……살무사처럼.”
동주는 왠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살무사처럼.”
착검을 마친 동주의 부대는 비늘 비비는 듯한 소리만 내며 산자락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
긴 수풀 사이로 허리를 숙인 채, 발을 재게 놀려 접근한다.
마을 안의 고려군은 맹렬하게 저항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불리해질 것이다. 어디서 탄환을 보급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몰살당하겠지.
그러나 돕는다면, 구할 수 있다.
허동주는 발걸음을 멈췄다. 적당한 거리다. 너무 접근하면 아군의 오인 사격을 받을 수 있다. 또 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기습의 효과가 떨어진다.
몸을 일으킨다.
“이거나 먹어랏!”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동주를 따라온 아군도 몸을 일으키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풍 같은 총성이 두 귀를 때린다.
“돌격!”
그렇게 외치며 달려 나간다.
적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선 안 된다. 기습에 당황한 상태 그대로, 계속 새로운 상황을 던져줘서 대책을 세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적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반격해오면, 아군의 손실도 커진다. 그러면 기습이라 할 수 없다.
순식간에 적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짐승 같은 한족 놈의 눈은 당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겠지. 갑자기 산등성이 수풀 속에서 적군이 튀어나왔으니.
소총을 휘둘렀다.
대검이 그대로 놈의 목줄기를 긋고 지나간다.
켁켁거리며 쓰러지는 놈의 몸을 방패 삼아, 그대로 밀어붙이며 다음 적을 향해 나아간다. 동주의 좌우로도 아군이 튀어 나가 대검을 찔러 박는다.
“아군이다! 아군이야!”
“착검! 착검! 우리도 착검 돌격한다!”
그런 외침이 마을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반가운 고려의 언어다.
그래, 이대로 협공하자. 지금까지 고려의 국토를 유린한 저 짐승들을, 이제 우리가 유린해주자.
대검을 막을 준비를 하는 놈에게 총알을 먹여준다.
그대로 몸을 틀어서 옆에서 달려드는 놈 가슴팍을 찌른다.
그런데 놈이 쓰러지면서 동주의 총열을 잡는다.
“이 새끼가……!”
짐승 같은 놈이 웃는다. 침략자인 놈이 뻔뻔하게, 죽음에 저항한다. 침략자면 침략자답게 이만 뒈져랏!
방아쇠를 당긴다. 놈이 움찔거린다. 그러나 여전히 총열을 쥐고 놓질 않는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다른 한 손으로 동주의 목을 향해 대검을 찌르려 든다.
“……!”
동주는 총을 놓고 물러나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적의 팔만 따로 몸뚱이에서 떨어졌으니까.
마을 쪽에서 나온 아군이 적의 팔을 베어낸 것이다.
적의 눈이 그제야 커진다.
곧 동공이 풀린다. 묘하게 그 모양이 잘 보였다.
고개를 들어 아군을 본다. 마주 웃었다. 도움을 받았을 때의 고마움, 안도감, 반가움, 전우애를 담아서.
하지만 동주의 웃음에는 그런 감정만 담긴 게 아니었다.
마지막 발악이 좌절된 것에 절망하며 죽은, 그 적의 얼굴이 묘한 쾌감을 줬기 때문이다.
그 쾌감을 음미할 수는 없다. 동주는 곧바로 몸을 틀어 다시 적에게 달려들었다.
다리에 총을 맞은 적이 보인다. 기어서 도망가는 중이다. 그렇다. 적은 도망치고 있다.
애초에 마을을 약탈하려고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오합지졸이다. 이런 반격에 대처할 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었겠지.
“놓치면 안 된다! 다 죽여!”
동주의 그 말에 신수덕이 뛰쳐나가 기어가는 적의 뒤통수를 찌른다.
적의 얼굴이 흙바닥에 처박히지만, 귓등을 찔렀는지 아직 살아있다.
신수덕은 괴성을 지르며 대검을 뽑아 다시 뒤통수에 똑바로 찔렀다.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적이 두 다리를 바르르 떤다.
신수덕은 대검을 뽑아내고 곧바로 나머지 적들의 등에 총구를 겨눴다.
적은 반대편 산등성이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말인즉슨, 등을 아군에게 훤히 노출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방적인 사격이 이어진다.
한 놈이라도 살아서 본대로 돌아가면, 곧바로 적의 반격을 맞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이놈들은 여기서 ‘행방불명’이 되어야 한다.
겉보기엔 적들이 다 등에 총을 맞고 쓰러진 것 같다. 하지만 동주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저쪽 산등성이를 싹 뒤져! 한 새끼라도 숨통 붙어 있으면 안 돼!”
***
병사들이 적의 시체를 질질 끌어다가 마을 가운데 공터에 던져놓는다.
다른 병사들이 시체의 수를 잘 셀 수 있도록 가지런히 정리한다.
옷은 벗기고, 쓸만한 물건들은 모두 빼앗는다. 언제 보급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처지니까.
“……이단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까 아군과 교전 중이던 적이 마을로 진입하지 못하는 걸 보고, 적에게 지금 이단이 없다고 판단했었다.
이단이 있었다면 순식간에 저항을 짓밟고 마을로 진입했을 테니까.
물론 애초에 이단들은 장교급이라, 이런 일선의 약탈에는 직접 나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부하들이 가져온 헌상품만 취할 뿐.
그래도 어딘가에서 이단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지금 저런 시체가 되어 있는 건 태평천국군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을 터.
그렇다.
이단은…… 전장의 악몽. 그렇게 불러야 할 존재다.
아무리 참호를 깊게 파고 열심히 요새화를 해둬도, 이단은 무참하게 짓밟으며 쳐들어온다.
애써 전선을 만들어도 이단은 반드시 돌파구를 만들어 붕괴시킨다.
물론 이단도 총에 맞으면 죽고, 대포에 맞으면 산산조각이 난다. 문제는 총에 맞거나 대포에 맞을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지.
그 이단들에 대응할 이단이 고려군에 없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수가 너무 부족했다.
상당수 이단이 평양 쪽 전선으로 차출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게다가 그…… 비행기를 이용한 공격에는 이단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고려도 하루빨리 군수물자를 항공 전력을 생산하는 데 돌려야 하건만.
그때까지 적의 공세를 버틸 수 있을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