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주(1)
안세규가 꾸민 속임수는 길어야 이틀 정도 갈 것이다.
그 후로는 반란군도 상황을 수습하겠지. 그 이상 효과를 보려면 선로를 아예 파괴하거나, 기관차를 망가뜨리거나, 기관사들이 모조리 도망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서부, 즉 칸발리크 방향 몽골 접경 지역에서는 이미 그러고 있다.
리안은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서부에 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서부는 허동주의 최정예 부대들이 밀집한 곳이다. 동북부가 미리안 충성파의 근거지인 것처럼.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가장 희생이 큰 전선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 모든 게 시간 싸움입니다. 삼한반도나 개마고원 일대 부대 중 충성파를 최대한 안전하고 빠르게 북쪽으로 결집시켜야 합니다.”
삼한반도의 반란군이 평양에 집결하는 동안, 거기 있는 혁명군은 고립된다. 그들을 구해야한다는 말이다.
“동북부 전투를 서둘러 끝내고 이들의 배치를 전환하는 것도, 반란군이 정신 차리기 전에 이뤄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압록강 도하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서쪽과 남쪽에서 수도를 협공당하면 곤란합니다.”
“서북방 반란군이 몽골군을 무시하고 남하하면 삼면 협공입니다.”
리안은 의자 팔걸이를 매만졌다.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나? 이쪽에서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만한 방법은? 서부 전선 부대들을 설득할 수는 없나?
머릿속 질문은 리안의 시선을 잡아끄는 움직임에 의해 끊겼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이 보좌관의 귓속말을 듣는다.
리안은 강태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강태훈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곤, 입을 열었다.
“여러분, 허동주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평양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
평양까지 내려오고 나서야 간신히, 허동주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역시 미승휴의 조카답군.”
웃음 섞인 말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섭고도 맹렬한 기습이었다. 자신이 한동안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도망만 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너털웃음을 웃다가, 피로로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닫는다.
그러고 있으면, 자신을 ‘키워준’ 세계대전의 참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첫 기억은, 역시 ‘군벌’로 걸음을 내딛던 그 순간.
상급자를 배신하고, 없어진 정부를 대신해 자신이 정부가 되기로 한, 반역의 기억.
***
동주는 1905년의 기억을 더듬는다.
전쟁도, 패전도 처음이던 그 때를.
달려서 도망치는 것, 그렇게 해서 목숨을 건지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진짜 전쟁 속 진짜 패배.
“중위나 소위조차 없는 건가.”
도망 끝에 도착한 어느 산자락에서 그렇게 중얼거리자, 곁에 주저앉은 이등병이 답한다.
“중사님이 최선임인 것 같습니다.”
내가 최선임…… 전쟁 전에는 이런 건 생각도 못 해봤다. 그냥 남들처럼 부사관으로 경력을 쌓고, 퇴역해서는 연금을 받으며 느긋하게 사는 삶을 꿈꿨을 뿐인데.
꿈…… 그렇다. 이렇게 패잔병이 되어서 산속을 헤매는 상황 자체가 꿈같다.
“중사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질문을 받아도 당시의 동주가 대답할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간신히,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소리를 지르지 않을 정도의 자제심을 발휘했다.
동주는 말없이 패전병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도망쳐 나온 전장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잘린 팔다리, 흘러나온 내장과 뇌, 헐떡이는 마지막 숨, 좀처럼 끊기지 않는 비명.
군인이면 감당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건만, 평생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해왔던 광경이었다.
“왜 그렇게 졌지?”
그런 의문이 떠오른다. 정신없이 공격을 얻어맞고, 퇴각령에 따라 도망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군이 완전히 붕괴되어 어디로 어떻게 도망치라는 명령체계마저 사라졌다.
그 충격이, 동주를 변모케 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지고 있었지……?”
수도인 평양이 공습을 당했다. 삼한반도 곳곳에 태평천국군이 상륙한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동주도 소속된 서쪽 국경 근처 주둔 부대들은 주둔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에는, 몽골이 태평천국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식에도 이동 명령은 내려오지 않다가, 몽골이 수도 칸발리크를 내주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나서였다.
태평천국군이 칸발리크를 짓밟고 고려의 서쪽 국경을 넘자 비로소 움직인 것이다.
“우리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어…….”
원래는 분명, 동맹인 몽골의 영토로 들어가 몽골의 남쪽 국경에서 함께 태평천국을 저지한다는 작전 계획이 있었을 텐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왜지? 누가 그런 계획을 실행하지 않고 망설인 거지?
준비되지 않은 채, 자국 내에서 태평천국군을 맞이한 고려군은 접전하는 족족 패퇴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은 일개 중사에 불과하다.
상급자, 상급 부대를 찾아내서 재편되어야 한다.
“중사님……?”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까 그 이등병이다.
흙먼지투성이 얼굴이라 아까는 못 알아봤는데, 동주보다 한참 어리다.
“날이 저뭅니다.”
“……조금만 더 행군해서 고개를 넘어 내려가도록 하지. 골짜기 바닥이면 바람도 피할 수 있고, 혹시 모를 적의 추격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불을 피우는 건 조심해야겠지만…….”
병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돌아가 명령을 전하려는 병사를, 동주는 불러세웠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병사는 돌아본다. 날카로운 눈매가 두드러지는 마른 체형이다.
“신수덕이라고 합니다.”
훗날 허동주의 심복이 되는, 신수덕과의 첫 만남이었다.
전우와의 기억은 그 참상을 회상하면서도 미소 짓게 한다.
***
1905년.
세계대전이 터진 그해, 동주는 아직 젊은 중사였다.
충격적인 패배를 겪은 후, 동주는 흩어진 아군 병사들, 피난민들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을지 어떨지 모를 상급 부대를 찾아, 끝없이 북쪽으로 향했다.
일개 중사에 불과한 그가 1만에 가까운 패잔병과 피난민 무리를 이끌게 된 건, 장교들 중 그 역할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패배.
정부의 소멸.
황실의 전멸.
그 결과 귀족 출신인 장교들에게 찾아온, 무기력증.
다행스럽게도 한계를 맞이하기 전에 상급 부대를 찾을 수 있었다.
예상외로 거기 지휘관인 중령이 이끄는 병력보다, 중사인 허동주가 데려온 사람 수가 더 많긴 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가 피난민 대피소인 줄 알아!”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동주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야, 너 어쩔 거야 저거?”
“인솔자 몇 명 붙여서 후방으로만 보내면 됩니다.”
“후방으로 보내는 동안에는 뭐? 피난민들은 밥 안 먹어? 여기엔 저 사람들까지 먹일 밥은 없어 이 새끼야.”
동주는 대책 없이 머릿수만 늘리지 않았다. 패잔병, 피난민들을 데리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싹싹 긁어서 왔었다.
-그렇게 우리가 노획해 온 식량을 다 갖다 바쳤는데, 먹일 식량이 없을 리가.
이 중령이라는 작자가 민간인들 식량까지 싹 징발해가지 않았다면 저절로 해결됐을 문제다.
“후방으로는 못 보내. 그러니까 남쪽으로 돌려보내.”
“중령님! 그러면 저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이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민간인들을 많이 구출해내면 그만큼 당신의 공도 커지지 않나?
“다른 민간인들도 지금 죽고 있어요오? 쟤네만 죽는 거 아니야.”
중사인 자신도 해냈는데, 중령이나 되는 당신이 못하겠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오면서 봤다. 일개 소위가 자신을 희생해서 마을 하나를 지켰다. 당신은 얼마 전에 임관한 소위만도 못하단 말인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이 중령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식량이나 비축하면서, 패잔병들 끌어모으면서, 여기서 왕 노릇을 할 생각이든지.
아니면 태평천국군에 비싼 값으로 항복할 생각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놈도 아까까지의 자신과 마찬가지다. 이놈 뒤에 상급자가 없다. 그러니 이렇게 구는 거겠지.
“어쨌든 닥치고 돌려보내. 총으로 쏴 갈기든, 지랄을 하든.”
동주는 일단 경례를 하고 중령이 머무는 오두막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병사를 하나 불렀다.
여기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신뢰를 쌓은 전우, 신수덕이다.
“수덕아, 중령님 당번병한테서, 장교들끼리 무슨 이야기하는지 물어봐라.”
잠시 뒤에 동주의 막사에 온 신수덕이 전한 이야기는, 동주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항복할 생각이다.
“……아직도 저런 참상이 계속되고 있는데, 못 본 척하겠단 말이지.”
동주가 지나온 길은, 눈물의 퇴각로였다.
그 눈물이 말라 버릴 때까지 도망쳤다.
찾고 있는 상급 부대는 나오지 않고, 곳곳에 흩어진 태평천국군 무리만 보였다.
태평천국의 야만인들이 고려를 유린하는 걸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땟국물이 흐르는 더러운 짐승들이 떽떽 짖으며 고려의 소녀들을 짓밟았다. 부모를 자식의 눈앞에서 죽였다. 어린아이를 짓이기거나 베거나 터뜨려 죽였다.
“한족이라는 새끼들은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또 다른 참상이 펼쳐진 마을에서 동주는 그렇게 뇌까렸다.
그놈들은 군율이고 뭐고 없었다. 각기 흩어져서 눈에 보이는 마을마다 이렇게 짓밟고는 사라졌다.
“중령은 그런 광경을 못 봤단 말인가?”
동포들이 유린당하고 있는데!
꽃다운 목숨이 유언도 못 남기고 스러졌는데!
동주의 눈에, 살무사다운 빛이 깃든다.
그 눈을 보며 신수덕은 어깨를 움츠렸다.
“수덕아, 중령님이 항복할 거라는 얘기, 우리 애들한테 다 전해라. 아니, 부대 전체에 다 전해. 그리고 그 반응 좀 살펴서 나한테 이야기 좀 해 줘.”
***
장교 하나가 영내를 걷고 있다.
그런 그의 어깨를 뒤에서 뭔가가 툭 치고 지나간다.
장교가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할 정도로 세게.
장교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친 뭔가를 본다.
병사다.
“너 뭐야?”
장교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묻는다. 병사는 그냥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실수로 어깨를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그리고 장교를 봤으면 경례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병사는 피식 웃는다.
“장교가 장교다워야 경례고 나발이고 하지.”
“뭐?”
몸을 똑바로 세우고 병사에게 다가가 따귀를 갈기려다, 병사의 눈빛을 보고 멈춰 섰다.
그냥 항명하는 정도의 눈빛이 아니다. ……적을 보는 눈빛이다.
“너 이 새끼 지금……? 눈깔 왜 그따위로 떠?”
“무능한 장교는 적보다 더 해로운 거요. 안 그렇수?”
“뭐?”
장교는 황당함과 분노로 얼굴을 붉혔다.
“댁 같은 장교 나으리들이 지휘를 똑바로 했으면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 그렇게 죽어 나자빠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오.”
장교는 대화가 소용없음을 깨닫는다. 권총으로 손을 뻗었다.
“너 지금 전시라는 거 몰라? 내가 즉결……”
장교는 말을 멈췄다.
뒤통수에 와 닿는 차가운 총구 때문이다.
다른 병사가, 소총을 겨누고 있다.
“이 새끼들이……?”
“머리 날아가기 싫으면 손드쇼.”
주위를 돌아본다. 다른 장교들이 권총을 빼 들고 몰려오지만,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이 소총을 들고 그들을 겨눴다.
마치 포위라도 하듯.
“이거 반란이야.”
“알면 입 다무쇼. 자꾸 떠들면 ‘반란군’이 사정 봐줄 것 같소?”
다른 병사들이 장교들에게 다가가 무장을 해제한다.
“옷에 뭐 들었을지 모르니까 그냥 싹 다 벗겨.”
누군가의 말에 장교들은 알몸이 되어야 했다.
병사들은 장교들을 공터로 몰아넣고 엎드리게 한 다음, 포박한다.
“끙끙대는 소리라도 나오면 싹 갈겨버려.”
감시하는 병사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나머지 병사들은 중령이 머무는 오두막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