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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6화 (26/541)

개막(6)

몽골은 일단 고려의 독립과 황제국 지위를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다.

명나라를 상대하면서 고려까지 정벌할 여유는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고려는 몽골을 도와 칸발리크 방어전에서 명나라 군대를 격퇴할 정도로 충실한 동맹이 됩니다.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완충 지대를 만든다는 계산이었죠.

그로부터 수백 년간 고려와 몽골 사이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법무장관 류성일이, 턱을 당기며 말했다.

“아, 거기서부터는 제가 이야기하지요. 그건 제가 선대 태사 때 있던 사건과도 관련이 있으니까요. 저도 직접 곁에서 보고 들었고.”

류성일의 차분한 어조에 맞추듯, 하얀 턱수염이 조심스레 움직인다.

“민족의 분포와 국경선이 일치하지 않으면, 민족주의자들은 ‘동포들이 사는 곳’으로 국경을 확장하려 듭니다.

서북부의 주민 대다수가 몽골계인 만큼, 몽골 내에서는 ‘국경 재조정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주장이 나왔죠.”

그리고 태평천국군의 공습으로 인해, 제2제국의 황통도 단절됐다.

“원래 고려 황실에는 칭기스-쿠빌라이의 혈통이 섞여 있었습니다만, 제2제국 성립 후에는 이 경향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몽골에서 카간의 ‘카툰’, 즉 황후를 배출할 만큼 고귀한 가문은 세상에 딱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나는 서쪽의 티무르 왕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쪽의 고려였다.

“자연스럽게 고려 황실에 섞인 몽골 혈통은 진해졌습니다. 얼마나 진해졌냐면…… 몽골의 황통이 단절되면, 친척인 고려의 황제가 그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리안이 무심코 중얼거린다.

“말도 안 되는…… 아니, 그렇다는 의미는.”

“예. 반대도 적용되는 거죠.”

고려의 황통이 단절되면, 몽골의 황제가 계승권을 주장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몽골 측이 실제로 그런 주장을 했었나요?”

“대놓고 정식으로 요구하진 않았습니다만, 넌지시 의향을 전하긴 했죠. 겉으로는 황실에 일어난 참극을 애도하는 듯하면서도, 이제 비어있는 황위는 어찌할 것이냐고…….

그 숨겨진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백부님…… 선대께선 어떻게 대응하셨죠? 가만히 계시진 않았을 텐데.”

류성일은 옛일이 떠오르자 유쾌했는지 가볍게 웃었다.

“처음엔 코웃음 치셨죠. 어디서 중세 시절 계승권을 들고나오냐며. 하지만 몽골 측의 요구가 점점 잦아지고, 또 노골적으로 되어 가면서 선대께서도 노기를 드러내시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은, ‘동군연합’까지 제안해왔다고 한다.

동군연합. 같은 군주를 공유하는 두 나라.

“즉, 고려와 몽골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되, 명목상 고려 황제를 몽골 카간이 겸임하게 한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웃기지도 않는 요구군요. 물론 동군연합이 연합으로만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합병을 위한 첫걸음임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유럽의 브리튼 왕국이나, 에스파냐 왕국이 그렇게 동군연합으로 탄생한 왕국들이다.

“예. 그래서 선대께서는 ‘한 번만 더 그런 요구를 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으셨죠.”

리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전에 알게 된 어떤 사실이 머릿속을 찌르듯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부, 미승휴가 몰래 황족들을 살해해왔었다는 의혹.

백부의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반응은, 순수하게 고려의 자주권을 생각해서 나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군주’의 존재를 어떻게든 거부하려는 것이었을까?

이미 돌아가신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리안은 그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 지금의 문제에 집중하자.

“그때는 몽골이 그런 엄포에 물러난 모양이군요.”

“두 나라 모두 세계대전의 상처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던 시절이니까요. 하지만…… 아예 포기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 몽골에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고려가 내전에 휩싸인 것이다.

내전이 일어났으니, 어떤 명분이든 붙여서 개입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렇기에 지금, 몽골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가 불안 요소로 떠올랐다.

리안은 안세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주석, 아니 안 장관 생각은 어떤가요? 몽골이 아예 서북부를 점령하거나 전면 침공 해 올 가능성은 없나요?”

서북부 접경지대에 주둔한 몽골군 장성들은 공을 세우고 싶어 할 것이다. 몽골 카간도 고려 황위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세규는 그런 그들의 야망을 이용하자고 했었다. 리안이 안세규를 향해 질문을 던진 건 그 때문이었다.

“내전 중에 서북부 국경 침범이나 소규모 교전은 있을 수 있겠지만, 국경 전반에 걸친 대규모 침공은 없을 거라 보셔도 좋습니다.”

“몽골은 반란군의 발을 묶어 두는 역할만 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고려민국 임시정부와 몽골 내 몇몇 유력 인사들 간 협정 내용은 그렇습니다.

그들로서는 감당 못 할 합병이나 점령 통치보다, 안정적이고 우호적인 정권의 수립을 더 바랍니다.”

“우호 정권인지 꼭두각시 정권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각료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발끈하는 민국 정부 측 인사를 안세규는 손짓으로 제지했다.

리안은 자기 측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안세규에게는 그 정도가 딱 적절한 견제책이었다.

대공황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안세규는 담담하게,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위험한 도박입니다. 우리를 지지하는 몽골 측 인사들도 내전이 길어지면 팽창주의자들을 누르기 어렵겠죠.”

온건파와 강경파의 경계는 실제로는 아주 애매하다.

정치가는 누구든 현실주의자가 되고 싶어 한다. 따라서 미리안과 허동주 모두 지쳐 쓰러지면, 아무리 고려에 우호적인 몽골 정치가라 해도 영토 확장의 유혹을 이기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 내전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합니다.”

안세규는 그렇게 말했다.

리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안세규나 민국 정부 인사들, 제국 정부 인사들을 모아두고 ‘임시제국최고회의’를 열고는 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새 정치체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냥 섞어 놓았을 뿐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어색한 공기는 아마 리안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겠지만.

리안의 의자는 뒤로 옥좌를 두고 앞으로 ‘의원’과 각료들을 둔, ‘상석’이었다.

마치 신하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위치에 있어, 그녀가 호락호락 권력을 내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실제로 리안은 ‘의장’과 태사를 겸직 중이다.

언젠가는 이 혼란스럽기만 한 융합을 제대로 된 의결 기구로 개편해야 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내전 중인 지금은 강한 권력이 필요했다. 그래야 한다는 신념도 있고.

리안은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며 소년의 감촉을 생각했다. 몸이 따뜻해진다.

그녀는 그 온기를 타고 ‘의원들’에게 질문했다.

“다른 전선은 어떻습니까.”

전쟁성 장관 강태훈이 그 질문을 받아 대답했다.

처음엔 억지로 맡은 전쟁성 장관 자리에 어색해했지만, 일단 되고 나니 열심이다.

“서북부에 주둔하던 반란군 병력은 동북부로 옮겨지도록 했습니다.”

동북부는 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세계대전에서 미승휴가 상경을 임시 수도로 삼고 항전한 이래, 미승휴의 중요 기반이었다.

“지금은 조카 되시는 각하의 기반이지요. 세계대전 전후로 상당 수준의 공업화가 이뤄진 지역이기도 하고.”

따라서 리안에겐 결코 잃어선 안 될 지역이다.

“그런 만큼 이 지역에는 각하께 전적으로 충성하는 부대들만 배치됐습니다. 그런 부대들 한복판으로 반란군을 옮겨 무장해제 조치를 받도록 했습니다.”

“무장해제를 거부한 부대는 없었나요?”

“물론 거부해서 교전에 들어간 부대도 있지만, 보급도 지원도 없으니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리안은 전국 지도로 눈을 돌렸다. 수도 동명특별시를 기준으로 북쪽에 펼쳐진 전선은 그렇게 정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반란군은 북쪽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남쪽에도 있다.

“삼한반도 쪽 전선은 어떻죠?”

삼한반도.

드넓은 북방 평원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개마고원을 지나면 좁아지는 반도다.

고려 제1제국의 발원지인 개경도, 고대 신라나 백제도 거기에 있었다.

“삼한반도에도 많은 부대가 있습니다만, 반란군과 우리 혁명군 부대가 뒤섞여서 전선 정리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반란군은 평양 인근으로 집결 중인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평양에 집결하는 게 사실이면 못해도 대동강, 혹은 청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들겠군요.”

“우리의 대처가 늦어진다면 압록강까지 북상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거기엔 시간이 걸릴 테니, 아직 여유는 있습니다.”

“여유가 있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순 없어요. 여기 수도 부근에도 반란군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들을 치우고 남쪽, 북쪽, 그리고 서쪽에도 제대로 전선을 만들려면 가용부대가 더 많이 필요해요.”

“네. 그래서…….”

강태훈은 말끝을 흐리며 안세규를 곁눈질했다. 안세규는 안경알 뒤에서 눈동자를 빛내며 대답했다.

“극북방위군 사령관 조유관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 극북에서 동명시 쪽으로 내려오는 중입니다.”

***

맹렬한 기세로 제국 한복판을 가로질러 수도로 향하는 부대가 있었다.

이른바 극북(極北)이란, 고려의 원래 영토보다도 북쪽, 혹한의 땅을 말한다.

여기서 북극의 빙하들을 건너면 신대륙의 아즈텍 연방이 있다. 물론 서쪽으로도 몽골령 극북과 국경을 마주한다.

극북방위군은 그 지역을 지키는 부대들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지역으로 ‘유배’된 부대들이다.

과거, 고려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했다는 죄를 짊어졌던.

“19년 만인가.”

그 사령관 조유관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긴 눈썹, 덥수룩한 수염. 가무잡잡한 피부.

그 안에서 눈빛만이 밝게 빛난다.

눈 안에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사령관 조유관 뿐만이 아니다.

휘하 병력 모두가, 선배나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증오를 불태우며, 언제든 열차에서 내려 전투에 나설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들이 요하와 송화강 사이, 평원을 가로질러 남하한다.

“태사라는 어린 계집이 용감한 짓을 했군.”

미리안은 도박을 했다.

허동주를 물리치겠다고 극북방위군을 불러들였지만, 그들은 당장 리안을 향해 총구를 겨눌 수도 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일단 수도에 도착하면 반란군을 물리쳐드리지.”

안에서는 태사의 군대가, 밖에서는 극북방위군이 공격하면 협공하는 형세가 된다. 일단 그렇게 물리치고 나면 미리안도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친구도 대담한 작전을 짰어.”

이미 여러 번 읽어서 구깃구깃해진 종이.

그것은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지금은 제국의 외무장관을 맡은 안세규가 보낸 전보였다.

“정말 동지들의 이상을 이뤄줄 희망이 있을지, 아니면 다 부숴버려야 할 타락한 종자들인지는, 수도에서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

조유관은 수염 안에서 이를 드러냈다.

이를 악문 것인지, 미소를 짓는 것인지는 조유관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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