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5)
반란군의 어떤 대대.
대대장을 비롯한 장교들은 서로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바라봤다.
곧 그들은 마주 본 얼굴에서 비슷한 표정을 확인했다.
“여긴 대체 어디인가?”
명령대로라면 그들은 동명특별시 인근의 한 역에서 하차했어야 했다.
허동주 휘하의 다른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서.
하지만 지금 그들이 내린 곳은 이름조차 낯선 종착역이다.
고려문(高麗文)으로 적힌 역 이름 밑에, 몽골문으로 따로 적힌 이름이 왠지 불길했다.
기관사에게는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다.
“난 시간표의 지시를 정확하게 따랐소. 바로 다른 운송 임무가 있으니 붙잡지 마쇼.”
그런 퉁명스러운 답만 들었다. 기관사는 전차대에서 몇 번 왕복하고 방향을 다시 잡더니 곧바로 출발해 버렸다.
역장을 찾아가니 그는 손가락으로 열차 시간표만 두드렸다.
확인 결과 그 시간표는 최신이라는 것만 빼곤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들이 탄 열차는 바로 이 시간에 여기 도착하게 돼 있었다.
떠나야 한다는 기관사의 말도 사실이었다.
어찌어찌 연대장에게 연락을 취해 보니,
[당신이 왜 거기 있어?]
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대대장은 억울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부하 장교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대대장과 부하 장교들이 함께 작전 계획을 확인했었으니까.
그 작전 계획은 수도의 급변 사태를 상정한 시나리오다.
시나리오에는 각 부대가 탑승할 열차의 일련번호와 탑승 시각, 도착 시각이 촘촘하게 수록되어 있다.
대대장 휘하 부대는 군의 충직한 부품으로서, 분명 작전 계획에 적힌 시간에, 정확한 열차에 탑승했다.
아무도 그 명령 체계에 의혹을 품지 않았다.
잠시 뒤 연대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대기랍니다. 연대 쪽에서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습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
“차라리 추궁이 내려오면 모를까 연대 쪽에서도 당황했다? 확인해보겠다? 이거 이상하지 않나?”
“확실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연대보다 좀 더 윗선에서 뭔가 잘못된 게 아닐지…….”
고민한다고 해서 일개 대대가 해결책을 낼 수 있을 리 없다. 대대장은 일단 부대원들에게 밥을 먹이기로 했다.
그러는 한편 척후를 내보낸다. 역 이름과 지형을 토대로 현 위치를 파악해보는 것이다.
확인은 금방 끝났다.
“마을에는 몽골인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척후는 그렇게 말했다.
고려의 영토 내에 사는 몽골인들. 그렇다면 여기는 몽골 제국과의 접경 지역이다.
즉 그들은 흥안령 산맥 한복판, 제국의 서북방에 있었다.
원래 그들은 동해 바닷가를 앞에 둔 지역에 주둔 중이었다. 등 뒤로는 개마고원을 접하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명령에 따라 동명특별시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랐지만, 서북쪽이라는 방향 외에 지리는 잘 몰랐다.
직접 행군을 했다면 지도를 확인하면서 갔을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규정된 대로 열차에 탑승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철도로 군대를 대규모로 재배치하는 건 19년 만에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니…….”
대대장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철도를 통한 이동 개념을 실전에 도입했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철도망을 대폭 확대하고, 철도성에 많은 힘을 실어준 것도 그런 군사적 활용을 위함이었다.
문제는 그런 계획이 19년 동안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 실제 상황에서 처음 서류의 문제점을 확인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동명시로 향해야 하는 철길이 어딘가에서 갈라져, 엉뚱한 곳에 떨어지리라는 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대대장은 이왕 이렇게 대기 명령을 받은 김에 인맥을 넓혀 두기로 했다. 그는 근처에 주둔하는 대대에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그쪽 대대장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저희도 새벽에 경계 병력만 남고 출동했습니다.]
조금 불안해진다. 우리 대대만 행정상의 착오로 여기 떨어진 건 아닌지.
대대장의 불안은 다른 대대가 같은 역에 도착하면서 안도로 바뀌었다.
“이거 우리 대대만 엉뚱한 데 떨어진 건 아닌가 했습니다.”
기수는 비슷한 다른 대대장과 악수하며,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상대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웃는다.
“나중에 참모본부에서 철도성과 손발이 안 맞는다는 둥 말이 나오겠군요.”
두 대대장은 담소를 나누며, 그들을 제 위치로 옮겨줄 열차가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계속해서 다른 대대들이 역 인근에 누적되기 시작했다.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닌데요.”
“한두 건이 아니라 계속 이런 식이면, 계획 전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건데.”
다시 불안감이 든다.
이곳으로 오는 부대들은 같은 사단 소속도 있었고, 아예 다른 사단의 대대도 있었다.
“제가 좀 나가서 교통정리 좀 해봐야겠습니다.”
최초로 이곳에 도착한 대대장은 자연스레 안내역 비슷한 위치가 됐다.
그는 다른 대대장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대대장들끼리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자, 각 부대 대대장님들께서는 여기 역 안에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들어오시고, 부대원들은 역 근처에서 대기를 명령해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대대장들은 나름의 군 경력과 식견을 자랑하듯 이 철도 운송 ‘계획’을 짠 인간들의 험담을 시작했다.
“아니 이런 대규모 이동 작전은 군사기밀인데, 철도성의 민간인들하고 의논해서 만든다는 게 말이 되냐고.”
“보안도 보안 문제인데, 결국 비전문가들 아닙니까? 자기네 철도 업무 기준에 맞춰서 군사작전 계획표에 간섭할 텐데, 응? 그 계획표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제 생각에도 이거 손발이 안 맞아가지고 이 난리가 난 것 같은데.
그 작전 계획에 각 역이나 열차, 노선에 식별번호들 붙여놨을 거 아닙니까.
근데 우리나라가 19년 동안 철도가 엄청 늘었어요. 그러면 그 기간 동안 철도성은 철도성대로 번호들 갱신해왔을 건데, 그게 전쟁성에 제대로 통보가 됐겠느냐는 말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혼선을 빚을까요?”
“원래 짜놓은 작전 계획들이 있을 텐데, 거기서 바뀌었다고 통보받은 부분들만 조금 손보는 식으로 하다 보면, 어딘가에서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 생기는 거죠.”
가장 최근의 전쟁은 이미 19년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아직 내전에 동원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진 못했다.
그랬기에 조금 느긋한 기분으로 이 의도치 않은 야유회에서 담소를 나눴다.
‘국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몽골군 부대에서 통신입니다!”
허겁지겁 들어온 부관의 얼굴을 보며, 대대장들은 의아함을 먼저 느꼈다.
“몽골군이라니?”
부관은 자기 상관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그게…… 저, 국경을…… 넘을 테니 적대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고…….”
대대장들은 생애 가장 큰 당혹감을 맛봤다.
“국경을 넘어? 걔들이 왜?”
“이미 이쪽으로 접근 중이랍니다. 그쪽에서 통보한 시간하고 거리를 따져보면 지금쯤 한창 넘어오고 있을 겁니다.”
국경을 넘어 접근 중인 몽골군 부대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고려 내 몽골인들을 내전에서 보호한다. 협조 바란다.]
보호를 빙자한 전면 침공인가? 누구에게 보고하지? 이제 누가 지휘하지? 몽골 측 요구를 거부하면? 교전 허가는?
끝없는 질문의 소용돌이가 대대장들의 발목을 묶었다.
그들은 몽골군이 완전히 국경을 넘어, 몽골인들이 사는 마을 주변을 장악하는 걸 지켜만 봐야 했다.
***
“19년의 긴 평화, 빡빡한 군율, 완벽하다고 믿어지는 계획표, 이 셋이 겹치면 군인도 관료로 만들 수 있죠.”
안세규의 지적은 옳았다. 예상 이상으로 그의 함정은 잘 작동했다.
“철도 노조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적어도 임시제국최고회의의 통치를 받는 지역에서는 모든 종류의 노조 활동을 인정하겠습니다.”
거래의 내용이 그러했기에 내린 조처였지만, 리안은 그들의 조직력과 활약에 감탄하기도 했다.
아무리 합동 참모 본부나 전쟁성이 리안의 수중에 들어왔다 해도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다.
군인들이 만든 철두철미한 계획표를 가짜로 바꿔치기하고 속이며, 노선 자체를 비틀어 부대들이 엉뚱한 곳으로 가도록 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분명 아주 오랫동안 준비했을 것이다.
“원래는 민주주의 혁명 때 쓰려고 한 작전인데, 마술의 비밀이 탄로 났으니 두 번 다신 쓸 수 없겠군요.”
리안은 안세규의 농담에 웃어 줬다. 그 정도 관용은 보일 수 있었다.
구 민국 정부가 지도하고, 철도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혼란은 대대 단위에서만 겪진 않았다. 연대 혹은 여단, 사단과 군단 단위에서도 일어났다.
반란군 한정으로.
서북부의 몽골 국경 지대는 완전히 마비됐다. 몽골군과의 교전 보고는 아직이지만, 벌어진다 해도 리안에게 손해는 아니다.
“그래도 국경 대치 상황 정도로만 끝나면 좋겠는데 말이죠…….”
혹시라도 외세를 개입시켜 정권을 유지했다는 평을 받으면 곤란하다.
게다가 몽골군이 고려의 영토를 점령한다면 내전 후에는 몰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전면전으로 발전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해야겠지만, ‘서북부’의 사정은 그렇게 말하고 말기엔 굉장히 복잡하다.
“역사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으니까요.”
제1제국 말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역사 쪽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대체 몽골인들이 거기 왜 사는 거랍니까?”
김천열 중장의 질문이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동료들을 대표해 물은 것이었다.
“해당 지역의 역사 및 정치적 배경을 미리 알아둬야, 나중에 그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펼칠 때 실수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안세규는 김천열의 말에 끄덕였다.
그는 대 몽골 외교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외무성 장관이 된 만큼, 이런 질문에 성의껏 응해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원래 흥안령 산맥은 고려와 몽골의 국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 제1제국이 몽골 제국에 굴복한 이후에, 국경에 변화가 있었죠.”
몽골은 흥안령 산맥 동쪽의 땅, 즉 지금 고려 제3제국의 ‘서북부’를 뜯어냈다. 그리고 그 땅을 칭기스카간의 동생들에게 나눠 줬다.
“칭기스카간은 중앙아시아나 페르시아 쪽 영토는 아들들에게 나눠줍니다. 그걸 ‘서방 왕가’라고 하고, 동생들이 받은 영토는 ‘동방 왕가’라고 하죠.
이 동방 왕가를 따라 많은 몽골인이 흥안령 산맥을 넘어 들어왔는데, 지금 고려에 사는 몽골인들은 그 후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지역이 그대로 몽골 영토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지금은 고려의 영토입니까? 우리가 되찾았다면 몽골인들 다 내쫓지 않았던 겁니까?”
“그건 몽골 제국이 몰락해가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몽골 제국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한족의 반란이 일어나 황하 이남의 영토를 모두 상실한 것이다.
“그때 몽골 카간의 신하로 있던 고려왕은, 자신이 쿠빌라이 카간의 딸에게서 내려오는 혈통을 이어받았다며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이때 동방 왕가는 칭기스 직계인 카간 가문을 배신하고 고려에 협력했다.
그렇게 동방 왕가가 지배하던 서북부가 고려 제2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시엔 몽골도 명나라에게서 수도 칸발리크를 지켜 내느라 바빠, 고려까지 신경 쓰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토와…… 종주국 지위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죠. 그게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