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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4화 (24/541)

개막(4)

광군사의 자택을 나오며, 리안은 전장이 되었던 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아직 미처 치우지 못한 전장의 흔적이, 어둑해져 가는 저물녘 햇살과 건물의 그늘 속에 그대로 남았다.

어떤 폭탄이라도 터진 걸까.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장과 사지가 보였다.

어떤 엄폐물은 사람의 잘린 목으로 장식됐다.

그 머리는 고통보다는 슬픔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영원히 굳어 있었다.

생사가 갈리는 전장의 긴장감과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이런 추악한 기념비를 만들었다.

또 다른 곳에는, 터져 나간 인간이 흘린 대량의 피가 벽과 바닥을 적신 흔적이 있었다. 시체를 치운 건지, 아니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폭발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걸 돌아보고, 리안은 남아 있을까 싶은 견하의 온기를 찾아 이마를 더듬었다.

***

황궁으로 돌아와도 쉴 틈은 없었다.

곧바로 개각에 착수해야 했으니까.

처음 전용열차에서 습격을 당했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정부 각 부처를 리안의 사람으로 채워야 했다.

“나에게 충성하는 정부가 만들어져야, 허동주와 제대로 싸울 수 있겠지.”

허동주의 행방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살아있다면 반드시 리안에게 대항하는 정부를 세울 것이다.

리안의 정부보다 훨씬 더 충성심이 높은 정부를.

“백부께 물려받은 그대로의 정부로는, 그런 정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리안에게 충성하기보다는, 그냥 해오던 대로 행동하려 들 가능성이 더 컸다.

그들은 어쩌면 미승휴에게는 심복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안에게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중간에 허동주 편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리안의 목을 죄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니까 믿을만한 사람으로 정부를 채우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믿을만한 행동을 하도록 상황을 만들든지 해야겠지.”

리안의 말을 들으며 효윤은 끄덕였다.

“강태훈 전쟁성 장관의 가족을 인질로 잡으신 것도 그 때문인 거군요.”

“그렇지. 인질이 있는 동안에는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강태훈의 반감만 사게 돼.

그러니 갑작스럽게 전쟁성 장관으로 발탁함으로써, 충성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걸 알려주는 거지.”

일종의 연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사의 위엄, 그 앞에 무릎 꿇음으로써 강태훈은 자신이 어떤 장엄한 역사의 현장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감정의 낙차가 강태훈을 리안 편에 묶어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방법으로……?”

“글쎄. 다른 사람들한테도 쓰기엔 무리가 있어. 강태훈이야 군인이니까 그런 방식의 충성맹세에 마음이 움직이겠지만, 다른 행정관료들도 그런 정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지.

그리고 강태훈은 광군을 쥐고 있는 남자인 만큼, 그렇게 공을 들여야 할 쓸모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진 않아.”

일일이 그런 식으로 충성맹세를 받아내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차라리 해임하고 새로 뽑는 게 낫겠지.”

해임은 이미 진행 중이다. 허동주가 문하시중의 이름으로 데려간 관료들은, 리안의 정부에서는 모조리 해임됐다.

“허동주를 자발적으로 따라갔는지, 아니면 허동주가 윽박지르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거기 갔으면 나한테는 ‘없는 사람’이야.”

내전이 리안의 승리로 끝난다면 그들을 기다릴 운명은 수감, 유배, 처형…… 정말로 자비를 베풀어야 자결 정도일 것이다.

물론 리안이 패배하면 리안 편에 선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운명이 기다리겠지.

“어쨌든 나는 그 사람들 빈 자리를 그냥 비워두기만 할 수는 없어. 정부는 온전히 제 기능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겠거니 하고 기다리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허동주를 따라간 자들뿐만 아니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자들 역시 해임의 대상이었다. 허동주가 됐든 리안이 됐든 별 차이가 없지 않냐는 식으로 시큰둥한 사람들도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빈 자리를 채울 ‘믿을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는 건데.”

‘믿을만한 사람’이 넘쳐난다면, 이 세상에 인재 문제로 고민할 정치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늘 그렇듯, 필요한 것은 늘 부족하다.

지금 리안에게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해봤자 효윤과 견하 정도.

“너희 두 사람이 스무 살만 넘었어도 좋았을 텐데.”

“아하하…….”

리안의 푸념을 들으며 효윤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리안의 말대로, 효윤과 견하가 좀 더 나이를 먹었었다면, 내각에서 어디 한 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10대였다. 리안의 대원수 계급과 격을 맞추기 위해 부여된 중장, 대령 계급만으로 다른 장관들과 나란히 서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류성일 총장은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신 거 아니에요? 법무성 장관으로 발탁할 예정이시잖아요.”

“하지만 딱 그 정도야. 그 외엔 거의 없어.”

백부의 옛 동지. 제3제국 체제의 고안자.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리안을 보호한 사람.

지금 상황에선 이 정도는 되어야 믿을만하다.

“남은 길은 고집을 좀 버리고 타협하는 것밖엔.”

타협. 즉 충성심 면에서 다소 불만스러워도, 그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기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인재 기용 기준은 ‘능력’이 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라를 생각한다면 충성심보다 능력을 우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글쎄. 당장 그 뛰어난 허동주가 리안에게 불복하면서 이 난리가 난 게 아닌가?

그리고 ‘적당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능력만큼은 쓸만한 인재’는 또 얼마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조건에 딱 맞는 인재가 리안이 원한다고 해서, 리안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재무성 장관에 여준설…… 정도 말고 나머지는 어렵나…….”

여전히 빈자리가 남는다. 이런 빈자리들은 류성일이 지적했던 대로, 고려민국 임시정부를 이용해서 채울 수밖에 없다.

“외무성 장관에 안세규.”

리안은 고려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그 사람을 외무장관에 임명하신다니……?”

“너도 봤잖아. 루우가 그 사람을 경호하는 거.”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사람이 아무리 없다 해도, 굳이 몽골인인 루우를 데려다 주석의 경호로 쓸 필요까지는 없다.

즉, 몽골인인 루우가 안세규 주석의 경호를 맡는 데에는, 그럴만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고려민국 임시정부는 분명히 몽골과 협력관계에 있어. 루우는 그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아이지.”

내전이 벌어진 지금, 고려 제3제국은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외국이 허동주를 지지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리안이 정통 정부임을 내세운다고 해도, 허동주가 외국 정부와 손을 잡는다면, 그 외국 정부들은 허동주를 지원하며 ‘필요’에 맞춰 ‘정통’을 바꾸려 들 것이다.

따라서 외교 문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더 중요하다.

특히 서쪽, 흥안령 산맥의 줄기를 따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몽골과의 외교가.

“몽골이 허동주와 손을 잡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몽골 외교의 적임자가 필요해. 내 생각엔 안세규가 그 적임자야.”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이른바 민국 정부와 제국 정부를 통합해, 새로운 정부를 만들기로 한 이상, 일정 지분은 나눠 줄 수밖에 없다. 외무성 장관 자리는 그중 일부다.

리안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다.

“다시 나가볼까. 장관 임명뿐만 아니라 ‘임시제국최고회의’를 구성하는 일도 마쳐야 하니까.”

***

류성일은 리안에게서 법무성 장관의 임명장을 받고, 악수한 다음, 물러서서 생각에 잠겼다.

‘결국 이렇게 돌아왔나.’

지금 자신에게 임명장을 준 소녀, 미리안. 그녀의 백부와는 많은 의견 충돌을 빚었었다.

그가 생각하는 제국이 나아갈 방향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의견 차이는 도저히 좁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 벌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류성일은 정계를 떠났다. 미승휴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다만 최측근이었던 남자가 완전히 야인이 되어버리면 미승휴의 위신에도 손상이 가기에, ‘은퇴’하는 류성일을 위해 자리를 하나 마련해줬다.

그렇게 제1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가, 다시 이렇게 돌아왔다. 갈등을 빚고 떠난 남자의 조카를 돕기 위해.

오늘 아침에 다듬은 하얀 수염은, 자신이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이 나이를 먹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 건, 무슨 기이한 인연일까.

그것도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라, 나라가 두 쪽이 나서 싸워대는 내전의 시기에.

자신이 법무성 장관이 된 오늘의 이 일은 오욕으로 끝날까, 아니면 새로운 영예를 더하게 될까.

……알 수 없다. 그저, 너무 늙어버린 게 아니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류성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

그 옆에서, 안세규 역시 생각에 잠겼다.

외무성 장관.

늘 지하, 뒷골목의 어둠, 그늘 속을 전전하던 불법 단체의 수장이, 정식으로 정부의 각료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들어왔다.’

물론 고려민국 임시정부 내에는 이것을 항복이라 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안세규는 그런 낡은 생각을 거부했다.

‘저항만 해서 얻을 수 있는 정권은 없다.’

일단은 정권 내부로 파고들어야 한다. 거기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많은 민국 정부 파 사람들을 들여놓는다.

그렇게 야금야금, 권력의 핵심을 장악해나가는 것이다.

‘임시제국최고회의는 그 시작이 되겠지.’

총선거가 치러져 정식으로 의원을 뽑기 전, 임시로 제국최고회의를 구성한 것이다. 그 의장은 태사인 미리안이 겸하고 있다.

정식으로 구성될 제국최고회의는 입법부의 역할을 하겠지만, 임시제국최고회의는 아니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분리한다는 ‘자유세계’의 개념을 도입하기 전에, 그 두 권력이 뒤섞여 있는 과도기적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임시제국최고회의의 의원들은 다양하다.

오늘의 개각 과정에서 물러난 정권 원로들, 안세규와 류성일을 포함한 내각, 민국 정부의 여러 위원, 혁명군 사령부의 장군들도 참여한다.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를 위해, 일단은 권력을 집중시킨 형태다.

안세규는 계속 다른 이들에게 임명장을 전하는 미리안을 곁눈질했다.

‘태사의 자리는 저 여자가 계속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의장만큼은 언젠가……’

자신이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사부와 제국최고회의, 즉 행정부와 입법부가 서로 견제하는, 그런 체제를 완성할 것이다.

‘허동주를 제거하는 것이 첫 과제다. 여기서 민국 정부 계열의 입지를 강화하고, 제국 정부와의 권력 쟁탈을 준비한다.’

안세규는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개각부터 임시제국최고회의의 출범까지, 쉴 틈이 없는 하루였다. 몸보다도 마음이 쉬고 싶었다.

그래서 리안은 견하를 집무실로 불렀다.

마침 소년은 야별초 본부 공략 작전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낮에 봤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소년의 눈빛이 무척 우울해 보였다.

그 눈을 보자 다잡았던 마음이 다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수고 많았어.”

“태사께서도, 고생하셨어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처럼 누나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견하에게 다가가는 동안, 소년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몰랐는데, 아름다운 입술이었다.

“입술…… 예쁘네.”

리안은 견하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연심인가, 아니면 극도로 몰린 정신이 일으키는 착란인가.

따뜻하지만 메말라 버린 입술이 닿았다, 그렇게 느낀 순간 까끌까끌한 혀끝이 다른 혀끝을 긁었다.

양어깨를 감싸는 소년의 손길을 느끼며 리안은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길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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