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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3화 (23/541)

개막(3)

한마디로 샅샅이 털어라, 라는 말이다.

정치경찰 기관을 장악하면 정보뿐만 아니라 여론 감시, 선전 및 선동까지 주무를 수 있다.

“공략 과정에서 야별초가 기능을 잃어도, 어차피 허동주도 그 기구를 쓰지 못하게 하는 셈이야.”

그러니 손해라고 말할 것까진 없다는 게 리안의 말이었다.

견하는 리안의 집무실을 나오면서 받은 서류를 꼼꼼히 읽었다. 견하를 배려했음인지 야별초의 기원과 역사까지 간략하게 적힌 서류였다.

야별초는 본래 제1제국 말, 무신 정권의 사병으로, 그들의 권력 유지 수단이었다.

몽골 지배기와 제2제국 시대를 거치며 이들은 평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가 됐다. 물론 무신 정권의 끄나풀일 당시, 정권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감시하던 기능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제3제국 성립 이후에는 미승휴가 유럽식 경찰 제도를 도입하면서 수도의 치안 유지는 일반 경찰에 넘기고, 정치경찰의 역할만 남았다.

야별초는 이 남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제2구 광개토로 3번지…….”

야별초 본부의 주소다. 지금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도 꺼릴 만큼 음산한 주소.

하지만 그거야 무기도 없고 국가에 어쨌든 복종하고 보는 일반인들 이야기다.

중화기까지 든 군인들 앞에선 그냥 진압 대상이다. 그리고 리안의 말처럼, 약한 이에게 강한 이들이 늘 그렇듯, 야별초는 더 강한 이 앞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순종적인 일반 관료가 된다.

견하와 루우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항복할 사람들은 모두 순순히 연행 중이었고, 그들이 들고 나온 자료들도 한창 군용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안에는 이제 끝까지 저항할 자들만 남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배영훈 소령이 설명했다.

“그럼 일일이 항복을 권할 것 없이 전원 사살하면 되겠네요.”

“예.”

“아, 하지만 태사 각하께선 자료의 손상을 우려하셨어요. 그 점은 좀……”

“알겠습니다. 화염방사기 등의 사용은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단으로서 먼저 돌입하기 위해 건물 입구 쪽으로 향하는 견하의 곁을 루우가 옆에서 따라 걸었다. 그녀는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일이 편해졌다고 기뻐하는 거야?”

“…….”

“아니면 이번에도 그냥 필요한 일을 하는 거야?”

“…….”

“얼굴만 봐선 알 수가 없네. 그나저나 너는 적응이 빨라. 보통 고등학생이 이런 상황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진 않거든.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닌가.”

견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천손민족협회의 이단 소년을 왜 그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죽였는지. 그렇게 하지 않고 저지 정도만 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왜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을까.

자신은 원래 그렇게 잔인한 성격일까?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엔 건물 입구까지의 거리가 짧았다. 견하는 의문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치워 두고 눈앞의 임무에 집중했다.

양 손바닥 위에 ‘다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괴물들을 소환했다.

일단 문을 날려 버렸다.

“요전처럼 하는 건 잔인하고 아니고 따지기 전에 너무 느려. 간단하게 급소만 노려.”

언월도를 꺼내고 앞으로 달려나가며 루우가 충고했다. 견하는 이단 선배의 충고를 숙지했다.

야별초의 남은 인원들은 엄폐물을 쌓아 놓고 저항했지만 별다른 방해는 하지 못했다.

괴물의 뱀 같은 몸으로 엄폐물을 밀어 버리거나, 아니면 고개를 내밀 때마다 꿰뚫어 버리면서 견하는 전진했다.

그 앞에서 루우는, 날카로운 이단의 감각으로 자신을 겨누는 총구를 인식한다.

그녀는 도약한다.

나풀거리는 셔츠 아래로 슬쩍 드러난 허리와, 짧은 반바지 아래 허벅지, 구부린 무릎이 멋진 곡선을 그린다.

그 곡선이 아주 잠시, 루우가 든 언월도와 연결된다. 내려치기 직전의 기세가 담긴다.

루우는 엄폐물과 그 뒤의 사람들을 통째로 베어 버렸다.

안광이 번득였다. 그대로 그 안광을 끌며 루우는 이번엔 상체를 잔뜩 숙이고 튕겨 나갔다. 언월도 날 끝이 부딪치는 벽이나 바닥, 천장에 흉터가 남는다.

쏟아지는 총알을 손쉽게 피하거나, 언월도로 쳐 냈다. 쳐 낸 탄환이 간혹 적을 맞히기도 했다.

공격 범위가 넓고 화려한 동작이 많은데도, 불필요한 움직임처럼 보이지 않는다.

루우는 기예와 실용의 경계선 위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경계선이 없는 사람이다. 누군가 동작의 멋과 실용성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 묻는다면, 루우는 그 질문을 무시할 것이다.

루우에겐 성립 자체가 안 되는 질문이다.

견하는 그 뒤를 따르며 루우의 사각에 든 자, 루우의 언월도에 베여 걸레짝이 되고도 아직 숨이 붙은 자를 처리했다.

저항이 상당히 분쇄됐다. 루우는 기둥에 기대 한숨 돌렸다.

견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거, 내가 쓰는 ‘아이들’은 그때 그 덩치 큰 녀석과는 다른 모양이야.”

일반인을 상대로 쓰면, 자신에게 그러했듯 그냥 이단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이 작은 녀석들의 성질은 그때 그것과는 다른 듯하다.

아니면 자신의 의사에 따라 기능을 조절할 수 있든가.

“‘아이들’?”

루우는 견하의 표현에 의문을 던졌다. 견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렇게 불러.”

“…….”

루우가 아까 지적했던 대로 자신은 적응을 잘하는 모양이다. 사람 하나를 꿰뚫을 때마다 전해지는 살과 뼈, 생명의 질량에 움찔거리긴 했지만, 처음처럼 손이 떨리진 않았다.

뒤따라 오는 군인들이 각 방의 문을 열고 연막탄을 던진 뒤, 연기가 찬 방 안에 총격을 가해 제압했다. 견하와 루우가 전진하는 속도에 잘 맞춰서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것을 두고 일방적인 살육이라 하던가.

몇몇 방에서는 기밀문서들을 소각하던 모양이다. 방에 있던 야별초 요원들을 사살한 후 곧바로 진화 작업이 이어졌다. 군인들은 타다 남은 문서를 긁어모아 밖으로 보냈다.

“1층 제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부대를 둘로 나눠 각각 지하층 제압과 위층 제압을 시작하겠습니다.”

“저희는 그럼 위쪽으로 가 볼게요.”

2층, 3층, 4층에서도 비슷한 작업이 반복됐다. 견하는 왜 군대를 살육 기계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모든 작업은 표준화되어 있었다.

다만, 5층에서는 조금 다른 일이 일어났다.

“잠깐! 쏘지 마! 항복하겠다!”

복도 끝 방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견하는 따라온 장교에게 고개를 끄덕여 사격을 중지시켰다.

그는 루우와 함께 그쪽 방으로 향했다.

안에는 야별초의 간부로 보이는 사람이 손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항복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은 건가?”

견하의 물음에 남자는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었다.

“정말 그랬으면 벌써 사살당했겠지. 하지만 나는 태사께 용서를 비는 조건으로 유용한 정보를 바칠 수 있어. 그걸로 내 죄는 상쇄될 테고. 당신들도 그런 계산이 있어서 사격을 중지한 것 아닌가?”

견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방 한쪽에 쌓여 있는 문서들 쪽으로 걸어갔다.

서류 한 뭉치를 집어 올렸다.

“항복 지참금인가?”

“태사 각하의 처지에선 밖으로 흘러가면 곤란한 것도 있고, 전세를 뒤엎을 만큼 유용한 자료도 있지. 이만하면 거래할 가치가 있지 않나?”

견하는 문서를 뒤적였다.

……태사 미리안을 황제로 추대할 계획……

……문하시중 허동주, 미씨 일가 혈통 조작 모색……

루우도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소감을 덧붙였다.

“정말 태사에게 곤혹감을 안겨 줄 정보들이네.”

이건, 무엇일까.

허동주와 미승휴는 정말 대립하던 사이였을까.

아니면 대립하던 자들의 이해관계가 우연히 일치된 결과, 이런 일이 빚어진 것일까.

견하는 남자의 웃는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마를 기대던 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이상 그녀의 부담을 늘릴 순 없었다.

이 남자는 틀림없이, 이걸 대가로 목숨뿐만 아니라 지위의 유지, 혹은 승진, 아니면 더 큰 무언가를 끝없이 요구해 올 게 틀림없다.

자신이 태사의 약점이라도 잡은 듯 반쯤 협박을 섞어 가며.

딱 거기까지 생각하고 견하는 남자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루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이만…… 철수하자.”

***

‘광군(光軍)’은 제1제국의 백성 총동원 체제였다. 이는 고려가 40만 혹은 50만 대군을 동원하며 거란과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미승휴는 세계대전 이후 개편한 예비군 제도에 이 ‘광군’의 이름을 붙였다.

근대에 부활한 광군은 이제 수백만 예비군을 동원할 수 있다.

그런 광군의 동원령 권한을 쥔 자가 광군사(光軍司)다. 지금 광군사 강태훈의 집은 여태껏 없던 수모를 겪고 있었다.

군홧발이 바닥을 더럽혔다. 가구는 흉하게 긁히거나 넘어졌다. 가족사진이나 그림을 넣어 둔 액자, 도자기 따위도 깨져 버렸다. 커튼 너머로 군용 차량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강태운은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로 거실 한가운데 서서 자기 집에 가해지는 행패를 바라봤다.

거실 한구석에는 강태훈보다 까마득하게 낮은 계급의 군인들이 아내와 어린 딸을 감시하는 중이다. 두 사람은 떨고 있다.

자신이 ‘어떻게’ 되고 나면 온갖 수모를 겪을 아내와 딸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갑자기 군인들이 양쪽으로 갈라서며 경례를 올렸다. 그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왔다.

긴 생머리에 장성의 제모를 눌러 쓴 그 여자는 고려의 최고 권력자였다.

리안이 허동주에 맞서 ‘수적인 우위’를 확보하려면 적어도 광군을 꼭 장악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광군 장악 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태사 미리안은 중학생 같은 동안 위에 싱긋 웃음을 띠었다.

“장군, 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로 저의 집까지 이렇게 찾아오신 겁니까. 저에게도 지위와 연공이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지위와 연공은 오늘 박탈될지도 몰라. 이걸 읽어 보겠어?”

그녀는 서류를 내밀었다. 강태훈은 그 위에 인쇄된 내용을 읽으며 손을 떨었다. 두려움과 분노가 그의 손을 떨게 했다.

“‘광군을 동원해 반란군에 가담’이라니…… 제가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이건 생각할 가치도 없는 모함입니다, 태사!”

“그래? 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이런 소문이 돈다는 건 장군이 제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지. 제국은 위협 요인은 뿌리부터 제거한다. 장군도 잘 알 텐데?”

“태사…… 전……”

미리안은 듣지 않고 등을 돌려 벽으로 걸어갔다.

벽에는 칼이 걸려 있었다. 그 난리를 겪는 와중에도 떨어지지 않은 칼은 강태훈이 광군사로 임명될 때 받은 것이다. 미승휴로부터.

미리안은 발돋움을 해 그 칼을 잡아 내렸다. 강태훈은 그 곁에 선, 박도를 든 경호원 소녀를 보았다. 탈출은 어렵겠군.

미리안은 강태훈에게 걸어왔다. 그대로 칼을 내밀며,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장군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여기서 이 칼로 자결하거나, 아니면 나와 함께 정말로 광군을 동원하거나.”

강태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못 들었나? 친위 혁명에 가담하라고. 거기 적힌 내용의 절반을 사실로 만들자는 거지. 괜찮은 생각 아닌가?”

강태훈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뭐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혹시 떠보는 건가?

“자결로 인생의 막을 내리느냐, 아니면 제국의 핵심에 더욱 다가서느냐, 중대한 결정이라는 건 알지만 빨리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는 아내와 딸이 인질로 붙잡힌 상태다.

강태훈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칼을 받았다. 그녀의 백부에게 했던 것처럼.

“광군사 강태훈. 제국과 각하의 수호를 위해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건 좀 바꾸도록 하지.”

강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턱이 떨린다. 미리안은 소녀의 얼굴을 걷어치우고 국가원수의 눈길로 그를 내려다본다.

“장군은 이 시간부로 전쟁성 장관을 겸한다. 동원령을 내려. 반역자를 짓밟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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