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2)
“‘조장’. 아는 사람이야?”
견하는 한재연의 얼굴과 소년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조장’……?
그럼 재연이 이 무리를 이끄는 사람인가? 그 정도 자리에 오를 정도로 재연은 천손민족협회 활동을 오래, 열심히 했던 걸까?
“그래. 다들 총 내려 줘.”
회원들은 재연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
“……신문에서 봤어. 결국 ‘그쪽’으로 갔구나.”
재연은 견하와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 말도 없이 학교에 안 나와서, 나는 네가 ‘전학’ 간 줄 알았어.”
재연이 말하는 ‘전학’은 일반적인 의미의 ‘전학’이 아니었다.
“……요 며칠, 상황이 계속 급하게 변했거든. 나도 지금 이렇게 된 게 얼떨떨해.”
“맞아. 상황 참 그렇지.”
쓰게 웃으며 재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동작 하나가 그들이 지금 이렇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 내전, 검은 셔츠와 붉은 완장,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모습까지 모든 것을 가리켰다.
견하는 거기에 마주 웃어 주지 못했다. 재연은 웃음을 거뒀다.
“재연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정화’야. 고려 사회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화? 저 사람들이 불순물이라는 거야? 내가 보기에 저 사람들은 그저……”
“그저 ‘한족’들이지.”
견하는 말을 잃었다.
“설마 민족이 다르다느니 뭐니 하는 이유로 저 사람들을 죽이려는 거야?”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일반적인 한족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정화’하려 들진 않아. 그런 사람들은 우리 고려 민족에 ‘동화’시켜야지.
우리가 없애려는 건, 고려 민족을 상대로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한족들뿐이야.”
재연은 오른손을 옆으로 슬쩍 내밀었다. 뒤에 서 있던 소년이 두꺼운 서류 뭉치를 건넸다.
서류를 뒤적이며 재연은 견하의 옆을 지나 묶여 있는 한족들에게로 다가갔다.
서류를 뒤적이던 손길이 멈췄다.
“아, 여기 있네. 장종희, 50세. 세계대전에 태평천국 측 사병으로 참전. ……이후 고려에서 각종 지저분한 전쟁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녔어. 너무 역겨워서 견하 너나 여자 친구한테 직접 말하긴 좀 그러네.
피해 여성 중에는 아직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도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런 사람들 수십만 명이, ‘일반 병사는 전쟁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들도 피해자다.’라는 논리로 법의 심판대에서 벗어났어.
하지만 나나 여기 형제들 생각은 달라. 결국 그런 범죄를 저지른 건 이들의 선택이지. 그 어떤 사정이 있었든 말이야. 그런 걸 눈감아 주면 세상은 좋게 바뀌지 않아.
관용 정신은 악이 끝없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비료거든.”
재연의 장광설에 견하는 다시 말을 잃었다. 재연은 ‘형제’로부터 권총을 건네받았다.
장종희라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그대로 쏴 버렸다.
총성이 골목 양쪽 벽을 타고 날카롭게 귀를 때렸다.
시체를 보며 견하는 말했다.
“너희한테는 누굴 처형할 권한이 없어.”
내 부모님을 죽일 권한도 없었지.
“사법기관이 제 기능을 할 때는 그렇지. 하지만 ‘국제 및 국내 정치 상황을 생각해 죄를 묻지 않기로 함.’이라는 말을 지껄이는 기관을 사법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을걸. 그냥 ‘일반 상식’ 선에서 말이야.”
“좋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 서류가 진실이라는 보장은 어디 있지?”
“이 문양 보여? 바로 제3제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한 거야. 조작된 문서라고 하고 싶어? 그럼 조작되었다는 증거를 가져와야겠지?”
견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여기서 흐느끼면서 삶을 구걸하는 이들이 정말로 그런 흉악한 범죄자들일까? 이들의 손에, 내 부모님 같은 무고한 피해자가 나왔다면? 그렇다면 내가 이들을 감싸 줄 이유는 어디 있지?
어디에도 없다.
솔직히 동정심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막연한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기서 법치가 어쩌고 하는 논리에 매달리는 건 어리석은 자나 한다. 개인적인 친분에 기대,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만둬 줄 순 없겠어?”
“없어. 견하야, ……네가 ‘이쪽’으로 와.”
파국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중위의 총구가 재연의 머리로 향했다.
재연의 왼쪽에 서 있던 소년이 ‘다른 공간’에서 채찍을 꺼냈다. 두께가 한 뼘은 돼 보인다.
“이단……!”
루우가 날카롭게 중얼거렸다.
이단의 채찍이 중위의 머리를 뭉개 놓을 찰나, 무언가가 그 채찍을 휘감아 멈췄다.
견하의 손바닥 위, 역시 ‘다른 공간’으로 뚫린 문을 통해 들어온 하얀 괴물이었다. 그것도 여러 줄기가, 채찍을 단단히 휘감았다.
한 마리의 여러 촉수인지, 아니면 새끼 괴물 여러 마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재연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당황한 나머지 동료 이단 소년이 견하에게 달려드는 걸 말리지 못했다.
채찍 소년은 순식간에 수십 군데를 꿰뚫렸다.
그 몸을, 하얀 괴물의 촉수가 휘감았다. 이쯤 되면 안쪽에서 터져 나오는 것과 밖에서 찌부러트리는 것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겪어 본 적도, 예상해 본 적도 없는 고통이 기괴한 비명을 쥐어짜 냈다.
피와 살점이 온 사방으로 튄다.
다들 말을 잃은 사이 하얀 괴물들이 시체를 먹기 시작했다.
아니, 먹는 게 맞긴 할까? 루우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견하의 몸속으로 흡수되듯, 증발하듯 사라진 하얀 괴물의 촉수들을 떠올렸다.
정확히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에는 피와 살점이 그렇게 사라졌다.
루우가 본 견하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천손민족협회 회원들은 일제히 견하를 향해 총을 겨눴다.
“그만둬! 철수한다! 너희들은 이 사람을 상대 못 해!”
재연이 외쳤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조장!”
“너희들 무사 귀환이 우선이야. 가!”
망설이는 조원들에게 그렇게 다시 한번 소리치자, 그들은 골목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재연이 견하의 앞에 다가섰다.
“우리 조원들을 죽이겠다면 너와 내가 서로를 친구라 부를 일은 앞으로 없을 거야. 날 죽여도 마찬가지고.”
견하는 중위에게 눈짓했다. 중위가 끌려온 한족들을 골목 밖으로 내보냈다.
견하는 재연의 눈을 들여다봤다.
우정이 보였다. 하지만 견하가 생각하는 ‘우정’과 그의 ‘우정’ 사이엔 이름 말고는 같은 것이 없었다.
인간이 품는 다른 많은 감정이 그러하듯이.
“……가.”
견하가 말하자 재연은 끄덕였다. 그는 동료들을 따라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
견하를 학교에 보낸 리안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합동 참모 본부를 장악하고 합참의장과 각 군 참모총장들을 황궁으로 ‘정중히’ 소환했다.
그들의 신병 확보가, 군 전체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허동주의 손에 들어가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낫다.
견하가 리안의 부름을 받고 방에 도착했을 때, 리안은 시가전을 치르고 있는 각 구와 참모 본부 인사들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내전…… 시작했어.”
서류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짓던 리안은, 문득 고개를 들어 견하의 얼굴을 쳐다봤다.
“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그래도 어려 보이는 얼굴인데. 방황하는 마음이 그대로 눈동자에 비친다. 마음이 여린 후배를 보는 것 같았다.
견하는 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리안은 견하의 대답이 없어도 홀로 말을 계속했다.
“내가 포기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허동주의 전쟁 계획은 그냥 선전용으로만 끝날 수도 있었어. 그가 압제를 펼치면 뭐 어때? 그건 백부님도 지난 19년간 해 왔던 일이야. 달라질 건 없다고.”
리안은 결단의 순간 앞에서 망설이는 인간은 아니다. 갈림길에 서는 즉시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피와 살이 있는 것만큼이나 명백하게, 그녀에겐 윤리, 도덕, 혹은 양심이라 불리는 것이 있었다. 결단을 후회하고 결과를 두려워하는 지극히 보통의 인간이기도 했다.
리안은, 견하에게서 답을 듣고 싶었다. 류성일이 이야기한 숨겨진 역사에 자신이 흔들리고 있을 때, 암살자가 최후의 발악을 할 때, 하얀 괴물이 위협해 올 때, 그때마다 반드시 자신의 적절한 역할과 위치를 찾아내는 소년에게서.
자, 대답해 봐. 이번엔 이게 너의 역할이야. 너는 뭐라 대답해 줄 수 있지?
차라리 증오심이라도 부추겨 줘.
소년이 책상을 돌아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견하는 망설였다. 할 말은 이미 떠올랐지만, 거기에 더해 어떤 ‘위로’ 같은 것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전에 리안이 불러도 된다고 했던 호칭을 섞었다.
“……그랬으면 ‘누나’는 죽었어요.”
리안의 눈이 더 격하게 흔들렸다. 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요. 그리고 살아남았다면 계속 살아남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리안은 소년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단단했다.
견하는 가슴 위로 번져 나가는 이마의 따스함으로, 오늘 재연을 보면서 느꼈던 마음의 구멍을 채우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는 리안의 머리 위에 한참 동안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고마워.”
바닥으로 울리는 리안의 목소리였다.
“조금 기운이 났어.”
***
“두 사람은 지금부터 야별초 본부 공략에 참여해 줘.”
루우와 견하를 앞에 두고, 리안은 그렇게 명령했다.
정치경찰인 야별초가 끝내 혁명군에게도, 반란군에게도 지지를 선언하지 않고 침묵한 탓이다.
야별초는 중립을 지키다 승패가 갈릴 때쯤 승자 편에 붙으려는 심산이겠지만, 리안은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원칙을 밀어붙이기로 했다. 황궁을 공략할 때 그러했듯.
“야별초 본부를 공략한다면, 정치경찰 조직을 적으로 돌리시겠다?”
루우가 묻자 리안은 슬쩍 웃었다.
“그래. 원래 저런 정치경찰 부류라는 게 힘없는 사람들 상대로는 강하지만 정면에서 들어오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개처럼 엎드리지. 아마 공격을 시작하면 대부분은 항복할 거야.
항복하지 않고 도주하는 경우엔 가족을 인질로 삼는다. 투항할 기회를 줬는데도 끝까지 저항하면 인질을 처형하는 수밖에.”
가혹하고 부당한 조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가혹해지지 않는 자는 도덕적이라는 칭송보다는 머저리라는 비웃음을 듣기 마련이다.
어차피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이 기회에 숙청하고 새로 만드는 편이 낫다, 그런 계산도 깔려 있다.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나요?”
견하의 물음이었다.
리안은 견하의 눈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소년은 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담담한 얼굴이었다.
리안은 그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당연히 당근도 마련해 뒀지.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투항하는 자는 직위 유지는 물론이고 승진을 기대해도 좋을 거야.
두 사람에게 부탁할 일도 바로 그거야. 작전 지휘는 배영훈 소령이 맡을 건데, 둘은 저항이 심한 부분의 돌파를 도와주는 한편으로 쓸 만한 정보들을 긁어 와 줘.
외부로 공개하기 꺼림칙한 자료들은 야별초가 파기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최대한 막아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