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1)
견하는 떨떠름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좀 섬뜩하네. 이단한테만 치명적이라니.”
“‘이’를 조종할 수 있는 인간에게 다시 ‘이’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뒤집어씌우면, 이번엔 그 인간을 구성하는 ‘이’ 자체가 붕괴해 버리는 건 아닌가, 나는 그렇게 가정하고 있어. 더 자세한 건 도산서원에 가 봐야 알겠지만.”
견하도 도산서원의 비밀이 궁금하긴 했다.
특히 계속 하얀 괴물이라 부르는 그걸, 퇴계 이황은 무엇이라 기록해 놓았을지가.
상큼한 향기와 김을 뿜어내는 샤워실 안에서, 루우가 옷을 다 걸치고 나왔다.
“빨리 씻는 게 좋겠어. 시간은 좀 남았지만, 다른 이단 남학생들이 들어와 버리면 곤란해.”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는 건 신경 쓰는 걸까? 하지만 아까 분명히……
“가까운 사이로 보이자며?”
루우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올려다본다.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과 퇴학당할 만한 음행을 들키는 건 달라.”
우리야 퇴학당할 일은 없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덧붙였다.
***
4교시가 끝나고, 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었다. 맛은 있었지만 견하는 머릿속이 다른 일로 가득 차서 식사를 온전히 즐기진 못했다.
고기의 익은 정도나 양념의 간을 따지기보다는, 남은 점심시간 동안 도서실에 가 보고 싶었다.
루우에게 실례한다고 말하고 먼저 일어난 견하는, 양치를 마치자마자 도서실을 찾았다.
“음…….”
찾긴 찾았는데, 도서‘실’이 아니라 도서‘관’이었다.
아예 따로 건물을 올렸을 줄은 몰랐다. 고등학교에 도서관 규모로 큰 시설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견하는 잘됐다고 여기기로 했다.
자료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나저나 제22고와는 확실히 다르구나 싶었다. 견하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인문, 역사 관련 도서가 있는 4층을 찾았다.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도서가 있는 3층은 다음에 들러 보기로 했다.
공부가 될 만한 적당한 책이 없나 책등을 살피며 서가 사이를 걷는데, 앞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어?”
“아.”
“안녕, 견하야. 음, 너도 책 보러 온 거야?”
도서관이라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게 잘 전달된다.
반장, 양수영이었다.
“응. 공부를 좀 해 볼까 해서.”
나도 ‘반장’이 아니라 ‘수영’이라고 이름을 불러야 하나? 견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영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서가를 올려다봤다.
수영은 뒷짐을 진 채 견하 쪽으로 걸어왔다. 갈색이 도는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강아지를 닮은 얼굴이다.
“같이 찾아볼래?”
책을 찾는 과정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견하의 지금 관심사를 담은 제목들이 금방 눈에 띄었으니까.
“어려워 보이는 제목이네……. 근데 이건 지금 진도랑은 상관없는데. 견하는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아?”
“이런 분야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단, 요즘 신경 쓰이는 문제가 이 책이랑 관련이 있거든.”
태사 미리안과 관련된 일이라고 말하려다, 잘난 척하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견하는 그렇게 둘러댔다.
“그렇구나.”
감탄, 호기심, 그리고 발랄함을 담아 수영은 싱긋 웃는다.
“‘반장’…… 아니, 수영이 너는 무슨 책 찾으러 왔어? 네 책도 같이 찾아보자.”
“나? 음, 나는 말이지, 그러니까…….”
“여기 있었네.”
불쑥, 루우가 견하의 왼쪽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수영은 아주 살짝 멀어졌다.
“『근대 입헌군주정의 성립-유럽의 두 제국』. 요즘 네 관심사랑 딱 맞네. 몽골식 입헌군주정은 안 찾아봐도 될까?”
책 제목을 살피고 그렇게 말을 맺은 루우는 나무라는 얼굴로 견하를 쳐다봤다.
아, 그랬지. 안전. 그리고 가까운 사이를 연기하자고.
수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저기, 음. 너희 둘 혹시……”
그때, 사이렌이 울렸다.
도서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피커와 창문으로 눈길을 보냈다. 사방에서 울렸다. 도서관 직원이 학생들을 내보냈다.
담임교사의 지시를 따로 기다리지 말고 즉시 하교하라는 말과 함께.
견하는 수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음에 같이 네 책도 찾아보자.”
“응…….”
견하는 루우에게 얼굴을 돌렸다. 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무슨 상황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침내, 내전의 막이 오르고 말았다.
***
견하는 차에 올랐다.
“주석이 학교 끝나면 황궁으로 가랬어.”
루우도 그렇게 말하며 함께 탔다.
군인들이 차를 정문으로 몰았다.
루우는 견하가 가방에 집어넣으려는 책 표지를 빤히 보다 말했다.
“그 책, 그냥 가져왔네.”
“그 상황에서 검사할 사람도 없고, 대출받겠다고 사서를 찾아가는 것도 융통성 없는 짓이니까.”
“생각보다 꽉 막힌 사람은 아니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최악의 수단이 아닌 이상 편리한 쪽으로 하는 게 좋지.”
“그럼 ‘그때’ 날 밀어낸 건, 그게 ‘필요한 일’이고 ‘가장 편리한 방법’이어서야?”
견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루우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표현을 골랐다.
“너는 태사께 중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어. 그리고 그때 내가 널 밀어내는 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해.”
결국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어휘 몇 개만 달라져도 느낌이 바뀐다.
견하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생각하던 바가 사실임을 확인해서인지, 루우는 별말 없이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차는 학교 앞길을 지나 좀 더 큰길로 나갔다.
저 앞에 다른 군인들과 차량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앞에 탄 군인 두 사람은 바짝 긴장한 듯했다.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됐다면 오전까지의 전선은 이미 낡은 정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명특별시 상공에서 내려다본다면 혁명군과 반란군 사이의 전선은 삐죽빼죽 다각형을 그릴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지금쯤 혁명군이 반란군을 도시 외곽 쪽으로 밀어냈을 수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반란군이 찌르고 들어와 황궁으로 가는 길을 막아섰을 수도 있다.
“황궁에서 뭔가 소식이 있나요?”
견하의 물음에 앞 좌석에 탄 중위는 깍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반란군을 도시 외곽으로 몰아내는 작전을 실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선에 돌출부가 있으면 그 부분은 삼면으로 협공을 받는다. 심하면 전선의 다른 부분들과의 연결부를 공격받아 고립되기도 한다. 그러면 기존 전선도 그만큼 구멍이 뚫린다.
이 ‘돌출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전선을 고르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튀어나온 부분이 뒤로 물러나서 다른 부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주변 부분들이 앞으로 나가서 돌출부와 어깨를 맞대는 것이다.
리안은 물러서는 쪽보다는 밀어내는 쪽을 택하겠지. 리안의 성품상 물러설 리도 없지만, 그보다는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를 것이다.
지금 물러서면 황궁에 고립되어 서서히 말라 죽을 테니.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수도씩이나 되는 대도시에서의 시가전은 건물을 끼고 있기에 일반적인 전선과는 다르다. 기갑이나 화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고, 그럴 수 있다 해도 내전 후의 민심을 생각하면 건물의 파손을 감수하기도 어려웠다.
항공전은 말할 것도 없고, 건물에 저격수를 배치하려고 서로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진흙탕을 넘어 늪이 된다.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 자세한 상황을 확인하자.
그렇게 생각하던 견하의 눈에 ‘무언가’가 비쳤다.
“잠깐만 세워 주세요!”
차가 멈췄다.
‘무언가’가 눈에 띈 건 그것이 낯익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 발 까마귀가 수 놓인 붉은 완장. 검은 셔츠를 걸친 사람들이 차고 있어서 더 눈에 띄었다. 열댓 명은 돼 보인다.
그런데 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죄수처럼 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손민족협회 회원들은 그들을 데리고 골목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먼저 황궁에 가 계세요. 저는 저기 좀 살피고 올게요.”
“안 됩니다. 꼭 황궁으로 직접 모셔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견하는 가방 모서리를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저 천손민족협회는 분명 나쁜 일을 한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두 분이 돌아가신, 그날처럼.
이런 식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상황이 급했다.
“음, 저, 이제 대령 계급을 받은 거로 아는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받은 명령은 대원수께서 직접 내리신 겁니다. 안 됩니다.”
“……태사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첫 번째 방법이 안 먹힌다고 해서 얌전히 수그릴 견하가 아니다. 어쩔 수 없지, 하면서 두 번째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곧바로 차에서 내려 버렸다.
루우는 견하를 따라 내렸고, 중위도 조금 뒤에 따라왔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인지만 살피고 돌아갈게요. 이것도 태사께서 제게 내린 명령이거든요.”
중위는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셔야……”
말을 다 잇지 않고, 중위는 철컥 권총을 꺼내 견하의 어깨너머를 겨눴다.
골목 안 천손민족협회 회원들이 소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끌고 온 사람들을 건물 벽을 마주 보고 무릎 꿇게 했다.
마치 처형이라도 할 것처럼.
“넌 뭐냐?”
그들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 아니, 소년이 견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 보니 다들 견하와 루우 또래인 것 같다. 반면에 끌려온 사람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지금 뭐 하는 거지?”
붉은 완장을 찬 소년은 견하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견하의 뒤에 선 중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루우가 입은 제1고 교복을 보더니,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못 본 척하고 가지?”
대답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년의 심한 땀 냄새가 신경을 긁었기에, 견하는 그를 노려봤다.
견하의 노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년은 어깨에 멘 소총으로 손을 뻗었다.
“움직이지 마!”
중위가 소리치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소년은 동작을 멈추긴 했지만, 씩 웃었다.
그의 뒤에 있던 다른 회원들이 소총을 들어 견하와 루우, 중위를 겨눴다.
루우는 견하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보았다. 오늘 본 바로는, 견하는 내전까지 터진 상황에서 ‘어떻게 같은 사람을 죽이냐’며 멍청한 소리를 할 인간은 아니었다.
붉은 완장 십수 명, 모두 소총 무장. 이단의 능력을 발휘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자, 주견하, 보여라. 너의 이단이 어떤 형상을 취하고 있는지.
“견하야……?”
하지만 루우가 기대한 장면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인해 미뤄졌다.
골목 입구에, 무심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을 정도로 청초한 미소년이 서 있었다.
또 다른 소년 둘을 수행원처럼 대동한 채로.
“재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