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4)
“이황은 성리학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도달했지.”
주희가 끝내 외면하고 봉인해버린 곳에, 라고 루우는 덧붙였다.
견하는 루우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진지한 어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황은 그 봉인된 문을 열고, 주희가 금기시한 곳까지 전부 탐구했지. ‘이’와 ‘기’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
하지만 그도 연구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는 없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는 ‘이’지.
제2제국의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백성을 가르치는 정치를 펼쳤어.”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르치고 이끌면 모두가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가들이 먼저 선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
반대로 이미 선한 사람은 의무적으로 정치가가 되어 백성을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성리학이 주장하는 정치다.
“근데 ‘이’를 마음껏 조작할 수 있다?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전혀 알 수 없는 무언가로도 변화할 수 있다면? 이건 제2제국 통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지.”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도 견하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정리해 보려고 한다.
고려 제2제국은 주희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인간의 온갖 감정과 욕구를 현상에 불과한 ‘기’로 보고, 선한 본성을 ‘이’로 본다.
“성리학은 ‘기-칠정’을 억제하고, ‘이-사단’을 드러낼 수 있도록 수양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칠정, 일곱 가지 정서.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인간의 마음을, 억누를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반대로 사단, 즉, 인간이 선한 본성을 지녔다는 ‘네 가지 단서’.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옳지 못함에 대한 부끄러움.
겸손함.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
이것들만이 인간이 길러야 할 ‘선한 본성’이다. 성리학은 그렇게 주장한다.
“수양을 쌓은 인간이 귀족이나 황제가 돼 국가를 통치하고, 백성들은 귀족이나 황제의 가르침을 받아 선한 인간으로 성장해야 한다. 성리학은 그런 거라고 배웠는데.”
“어려운 말로는 ‘교화’라고 하지.”
성리학은 교화를 통해 이상 사회에 근접해 나간다는 학문이다.
“문제는 ‘이단’의 존재야.”
루우는 양손을 펼쳤다.
양손 위에, 빛에 둘러싸인 긴 봉이 나타난다. 봉의 오른쪽 끝에는 육중한 언월도 날이 뻗어 나온다.
그때도 본, 루우의 무기, 이단으로서의 능력이다.
루우는 언월도를 세로로 세웠다. 자신의 키를 넘는 그 무기를 보며, 루우는 말을 이었다.
“‘이’ 자체에 간섭해서 여러 가지 기묘한 현상을 일으키는 이단들은 모든 성리학 국가의 통치를 뿌리부터 뒤흔들 존재였어.”
인간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아니, ‘인간’조차 아닌 무언가가 될 수 있다.
“이단은 인간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견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루우가 말한 것과 같은 뜻의 문장을 떠올리기 위해.
“‘인간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말도 가능해지겠지?”
“그래. 지금까지 ‘인간’이라 해 온 것은 대체 뭘까. ‘인간’이라는 범주는 그냥 모두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루우는 언월도를 가볍게 휘두른다. 마치 곡예라도 하듯, 양손을 움직여 언월도의 날이 자기 주위를 휘휘 돌게 만든다.
소녀의 몸 주위를 한 바퀴 돈 곡예가 멈추고, 언월도의 날은 견하의 얼굴을 향했다.
“꺼내 봐. 네 이단 능력.”
견하가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루우가 달려들었다.
견하는 양손바닥 위에 공간을 열고 작은 하얀 괴물들을 꺼냈다. 그것들이 채찍처럼 휘몰아쳐 루우의 공격을 간신히 저지하-
-지 못한다.
루우는 견하의 모든 반격을 가볍게 튕겨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루우의 눈이 작은 괴물들…… 마치 촉수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금빛으로 빛난다.
언월도의 봉 끄트머리를 잡고 크게 휘두른다.
그 동작은 마치 빗자루를 들고 칼싸움 흉내를 내는 어린아이 같았지만, 위력은 다르다.
하얀 괴물들이 하얀 조각이 되어 흩뿌려졌다.
곧, 빛이 되어 흩어진다.
그대로 루우의 발이 견하의 가슴팍을 밀듯이, 걷어찼다.
견하는 뒤로 죽 밀려나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극……!”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을 때,
허공으로 가볍게 도약한 루우가 보였다.
언월도를 견하의 정수리에 내리꽂을 듯이 하강한다.
견하는 머리를 감싸듯 양팔을 들어 올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콘크리트가 쩍 갈라지는 기괴한 소리.
바닥의 진동이 그대로 견하의 몸에 전해졌다.
견하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루우의 언월도는 견하의 가랑이 바로 앞, 바닥에 박혀 있었다.
루우가 언월도에서 손을 놓자, 언월도도 빛이 되어 흩어졌다.
견하 앞에 쪼그리고 앉은 루우는 견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제 알겠어? 이단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지.”
금빛인 줄 알았던 눈동자는 연한 갈색으로 돌아갔다. 루우는 담담함이 지나쳐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어조로 계속 말했다.
“이제 막 이단이 된 인간과, 태어나자마자 이단이었던 사람 사이에도 이만큼 차이가 나.
그렇다면 이단이 아닌 일반인과, 이단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날까? 아니 애초에 같은 인간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는 있을까?”
인간이 어떤 공통점으로 묶을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을 교화한다는 성리학 통치는 전제부터 무너진다.
성리학자인 황제와 귀족들이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백성을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그 결론에 도달했을 때 퇴계 이황은 자신의 연구를 ‘봉인’해 버렸어.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방금 그 공격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견하는 그렇게 겁을 먹었었다. 그는 헐떡이는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되물었다.
“봉인했다고? 그럼 네가 아는 건……”
“봉인이 곧 폐기를 의미하는 건 아니야. 이황은 천하의 질서에 책임이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끝까지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이황은 연구 성과를 ‘비기(秘記)’로 남겼다.
그의 연구를 이어 갈 시설도 지었다.
“그는 끝내 이단이 되진 못했지만, 그렇게 후대를 위한 자료를 남겼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루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아니, ‘되지 못한’ 게 아니라 ‘되지 않은’ 거라고 해야 정확하겠네.”
“일부러 되지 않은…… 거라는 말이야?”
견하는 그때 그 ‘하얀 괴물’과 접촉하고 이단이 되었다. 그렇다면 퇴계 이황은?
루우는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라고 말했다.
“이황 역시 그 괴물과 마주했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로 이단이 되지 않았어. 그걸 불러내고 그것이 어떤 이치에 따르는지를 관찰, 기록, 연구했을 뿐이야.”
루우가 견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견하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세상에는 ‘성리학을 공부하고 제자를 기르는 곳’이라 알려졌지만, 그 깊숙한 어딘가에는 비밀을 감춘 곳. 바로 ‘도산서원’에 그의 비기와 연구 결과물이 숨겨져 있었어.
허동주는 거길 장악하고 자기 소유의 연구소로 만들어 버렸지.”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샤워는 따로 하게 됐다.
견하는 아까 본 루우의 살결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남자 탈의실 한편에 있는 샤워실 문 앞에 앉았다.
루우가 지금 그 샤워실을 쓰고 있다.
차분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견하는 앞으로 체육 수업이 있는 날엔 여벌 속옷을 따로 챙겨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땀 범벅이다.
루우는…… 속옷을 한 벌 더 준비해 온 모양이다. 물론 일부러 보려고 해서 본 건 아니고, 그냥 루우가 별생각 없이 그 속옷을 꺼냈기에 알게 됐다.
“나한테 안 보이게 조심해서 꺼내면 안 되는 거야?”
견하는 아까처럼 항의해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뭘 조심하라는 거지? 주견하 네가 속옷 도둑질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여기엔 우리 두 사람뿐이고, 그러니 도난당할 염려는 없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우리는 그 남자, 여자, 성별도 다르고……”
“네가 이걸 보고 무슨 망상을 하든 그건 네 마음이야. 내가 무슨 성리학자도 아니고 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어떻게 간섭하겠어.”
너무나도 확고한 논리에 견하는 말을 잃었다.
루우는 그렇게 들고 간 속옷을 물이 튀지 않는 곳에 걸어 두고, 샤워가 끝나면 거기서 갈아입고 나오겠지.
아니, 샤워실 안 광경을 상상하는 건 그만두자.
루우가 속옷 차림으로 나오는 모습까지 상상하게 될 것 같았다. 견하는 쫓기듯이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하얀 괴물은 정체가 대체 뭐야?”
루우는 대답이 없었다.
물소리 때문에 못 들었나 싶어 다시 질문을 던지려고 할 때, 그제야 루우의 대답이 돌아왔다.
“의식을 잃었을 때, 뭔가 꿈 같은 거 꾸지 않았어?”
……꿨다. 붉은 바닥과 붉은 하늘 사이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꿈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꿈이었다. 꿈이라기엔 기묘할 정도로 의식이 또렷해서,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꿈속에서 의식이 깬 듯한 느낌이었다.
혹은 그게 꿈이 아니라…… 어딘가 정말로 존재하는 다른 곳인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꿈’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깨고 나서의 일이 아니던……가?
아니, 루우는 어떻게 견하가 뭔가 꿈을 꿨다는 걸 알고 있을까?
견하는 그 점을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루우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버렸기 때문에 궁금함은 삼키고, 그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그게 어떤 존재인지는 나도 몰라. 다만, 예를 들어 고려 황실에 섞였다는 ‘용(龍)의 혈통’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어.
고려 황실은 자신들이 만난 하얀 괴물을 용이라 기록했을 수도 있지.”
혹은 그들이 만난 하얀 괴물이 용의 형상을 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푸른 늑대’와 ‘하얀 암사슴’. 몽골 제국의 황실에 흐른다는 그 피는 하얀 괴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걸 수도 있어.”
견하는 그럴싸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예시를?
의문을 남겨둔 채, 견하는 일단 루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두 황실의 위업을 생각해 보면, 이단이 한두 사람쯤 있었다 해도 이상하진 않겠네.”
“지금 확실한 건 그 하얀 괴물과 접촉하면 이단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어떤 원리로 인간이 ‘이’를 조작할 수 있게 해 주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앞으로는, 혹시라도 그 녀석과 마주치면 공격당하지 마. 이제 너도 이단이 된 이상, 그러면 높은 확률로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