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3)
루우는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 명은 태사의 측근이고 다른 한 명은 외교관의 딸. 테러나 납치 대상으로 딱이야.”
루우의 경우는 ‘그런 설정’이지만, 하고 생각하면서도 견하는 이해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럼 나는 뒤돌아서 갈아입을 테니까…… 읏?!”
견하는 급히 얼굴을 체육복으로 가렸다. 루우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졌기 때문이다.
“무슨 짓이야?”
“갈아입는 짓이지.”
“뒤돌아서 갈아입을 수도 있잖아?”
“아직 너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라 등을 보일 순 없어.”
“그런 문제가 아니라…… 부끄럽지 않냐는 거야.”
“부끄럽다? 내 몸의 어디가?”
루우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았다.
“이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단련해서 군살 하나 없지. 피부를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어. 부끄러울 구석은 없는데.”
루우는 견하의 빨개진 얼굴을 보고는 아하, 하며 웃음을 띠었다. 견하가 처음으로 보는 루우의 웃음이었다.
루우는 견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하얀 쇄골과 하늘색 브래지어 끈, 브래지어 안쪽으로 사라지는 가슴골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소설 속 여자애들처럼 수줍어할 줄 알았어? 하지만 주견하, 나는 전사로 자랐어. 필요하면 너랑 같이 샤워도 할 수 있지. 그러니까 내 부끄러움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여전히 공기에 얹는 듯했다.
루우는 물러섰다. 그녀 말대로 아름다운 몸매였다. 피부 아래 근육은 울퉁불퉁하기보다는 오히려 또 다른 예쁜 곡선을 그녀의 몸매에 더해 주었다. 탄력 있게 올라붙은 엉덩이 선을, 역시 하늘색 팬티가 감쌌다.
루우는 먼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견하가 갈아입는 걸 지켜봤다. 견하는 쓸데없는 신체 반응이 일어나지 않게 어금니에 힘을 주며 옷을 갈아입었다.
“나쁘지 않은 몸이네.”
남자로서 나쁘지 않은 몸이라는 건지, 전사로서 나쁘지 않은 몸이라는 건지 모호한 말을 남기고 루우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도움닫기 없이 발 구름 두 번.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루우는 넓은 체육관 한가운데에 가 섰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걸어오는 견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론부터 할까, 실전부터 할까.”
“……뭘?”
“널 쓸 만하게 만드는 거.”
견하가 앞으로 오자 루우는 말을 이었다.
“이단이 뭔지, 황제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겠지.”
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우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나랑 다니면서 전투 기술을 익혀 보라는 명령도 받았을 테고.”
견하는 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리안도 루우도 왜들 그렇게 머리가 좋은지.
“나한테도 나쁘진 않아. 데리고 다니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나으니까. 지난번처럼 무턱대고 뛰어들면 곤란해.”
견하는 쓰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어이없는 짓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단’의 힘을 손에 넣긴 했지만.
“날 한 대 쳐 봐.”
루우가 그렇게 말했지만, 견하는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해?”
“치면 관절기 같은 거 걸면서 ‘고통으로 가르침을 준다’느니 하는 거 아냐?”
“……아냐.”
“뜸이라도 들이지 말지…….”
견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루우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주먹을 내질렀다.
너무도 당연하게, 루우는 손바닥으로 견하의 팔을 툭 쳐서 자신의 뒤로 흘려보냈다.
“계속해 봐. 하면서 어떻게 날 때릴지 계속 궁리해.”
이왕 배우는 거, 안 먹혀도 제대로 해 봐야겠다. 견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진지하게 주먹을 휘두르고, 어설프게나마 발차기를 했다.
루우는 그걸 죄다 막아내거나 피했지만, 견하는 약이 오른다거나 지겨워지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고양감이 들었다.
그 고양감은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데에서도 왔지만,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데에서 온 것이기도 했다.
견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숙달을 향한 반복에서 보람을 얻는.
얼마나 팔다리를 휘저어 댔을까.
둥, 하는 울림과 함께, 몸이 꿈에서 깰 때처럼 균형을 잃고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이고 나자 등과 어깨에 둔한 통증이 일었다. 체육관의 하얀 콘크리트 천장이 보였다.
천장과 견하의 얼굴 사이에는 루우의 얼굴이 있었다.
목덜미 쪽에서 내려온 땀이 턱 끝에 맺혀 있다가, 견하의 뺨으로 떨어졌다. 루우는 소설 속 무술 고수처럼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견하는 루우를 보며 그림 속 인물이 생명을 부여받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제야 배 위에 걸터앉은 소녀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옛날, 지금의 낭키아스 울루스에는 ‘송(宋)’이라는 나라가 있었어.”
이론 수업인가. 견하는 루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왠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무슨 지식이든 빨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나라에는 ‘주희’라는 철학자가 살았지. 그는 세상의 온갖 현상과 원리를 탐구했고, 그걸 정리해서 ‘성리학’이라는 체계를 세웠어.”
너무 기초부터 시작하는 것 아닌가? 철학적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줄은 몰랐다.
“이 철학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이(理)’, 그것이 구체적 현상으로 드러난 ‘기(氣)’로 나누어 파악했지. ‘이기론(理氣論)’이라고 하는 거야. 이건 원래, 국가를 경영하는 데 쓰일 통치 철학이었어.”
루우의 숨결이 뜨거웠다.
“하지만 이론을 완성한 주희의 눈에, 그동안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들어왔어. ‘이’와 접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조작까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거야.”
루우는 몸을 일으켰다. 견하도 일어나 앉았다. 루우는 동계 체육복의 소매를 걷으며 말을 이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논하지 않는다.’ 유가(儒家)를 모태로, 극단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하며 완성된 성리학은 괴이한 것, 힘쓰는 일에 관한 것, 어지러운 것, 신에 관한 것에 대한 논의는 배척했어.
그런데 여기에 모조리 해당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주희와 그 후계자들은 당황했겠지.”
견하를 바라보는 루우의 눈이 빛났다. 잠깐이지만, 견하는 그 눈이 금빛으로 반짝였다고 생각했다.
“통치 철학이어야 할 성리학, 그 성리학에서 금기시하는 사람들은, 얄궂게도 성리학의 이기론을 가장 구체화한 존재.”
비밀을 공유할 친구를 찾아낸 소녀 같은 눈빛이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 이기론으로 설명되면서 이기론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이단(異端)’이라 부르는 거야.”
***
그 후로 몇 번이나 바닥에 메치기 당했을까.
등의 둔한 통증을 느끼며, 견하는 여기 매트라도 깔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생 한 명의 건의가 받아들여질까? 아, 가능할 거다. 견하는 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혹시 더 있을지도 모를 다른 이단 학생들을 배려하는 건 견하의 몫이다. 그 애들은 여기 쓰면서 불편한 건 없었는지, 매트를 설치하는 게 싫지는 않은지 알아봐야겠다.
어깨를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킨 견하는 앉은 채로 루우에게 물었다.
“근데 이거, 무슨 무술 같은 거야?”
가벼운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던 루우는 견하를 내려다보며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뒷골목 막무가내 주먹질이야.”
“…….”
“당장 써먹어야 하는데 기초부터 가르칠 시간은 없거든. 몸으로 배워 두면 당장은 어떻게든 때울 수 있지. 그리고 이것도 하다 보면 늘어. 안 좋은 습관 같은 건 내가 잡아 주면 되고.”
견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기술에 대해 견하는 아는 바가 없다. 루우는 전문가니까 그녀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격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나니 기분도 좋았고.
그러고 보니 이단이 되면서 몸이 좀 튼튼해진 걸까? 콘크리트에 부딪히면 이보다는 더 아파야 할 것 같은데.
견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단에 대해 더 묻기로 했다. 그나마 그가 이해할 수 있고, 흥미도 당기는 영역이었다. 리안의 명령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단의 발견이 그렇게 오래전 일이라면, 왜 이제야 겨우…… 이단 양성 연구가 본격화된 거야?”
리안이 전해 준 안세규의 말에 따르면, 이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은 고려 내에서도 허동주 정도만 갖고 있다.
루우는 견하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마주 보며 견하는 말했다.
“말해도 무방하다 싶은 정보만 말해도 돼. 무리해서 캐낼 생각은 없으니까.”
캐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견하는 일단 루우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루우의 망설임은 짧았다.
“이단 연구의 본격화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야. 이단을 체계적으로 양성해 보겠다는 건 세계대전 이전에도 몇 번 시도됐던 일이야. 고려에서든,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든.”
“그럼 성과를 거둔 게 최근의 일이라는 거야?”
“내가 알기로는.”
“연구에 전환점이 있었던 건가?”
루우는 끄덕였다.
세계대전 전부터라면 각국이 적어도 수십 년간 이단의 양성을 연구해 왔다는 말이다. 허동주의 세력이 성과를 거둔 게 최근이라면,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대부분의 나라가 연구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지만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 단서조차 잡지 못했으니 계속 헛물만 켠 거지.”
예를 들어 로마 제국에선, 크리스트교에서 단서를 찾다 안 되니까 이교라고 금기시해 왔던 고대 종교까지 뒤적거렸다고 한다.
브리튼이나 칼마르에서도 각각 옛 드루이드교나 북유럽 신화 세계를 탐구했다.
신성 제국의 보나파르트 황실은 바티칸의 비밀 서고뿐만 아니라, 엑스라샤펠에 남은 샤를마뉴의 고궁까지 뒤엎어 가며 자료를 탐색했다.
에티오피아 제국은 로마 제국과 협력하여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남긴 유산들을 발굴했다.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가 국교인 몽골 역시 비슷한 일을 했다.
그 외에도 국고에 여유가 있고 군사력에 대한 야망도 있는 웬만한 나라들은 다 이런 일들을 벌였을 것이다.
“그래도 고려는, 특히 허동주는 운이 좋았지. 주희 이후로 이단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정리한 사람이, 바로 고려에 있었거든.”
“그게…… 누구지?”
“퇴계 이황(退溪 李滉). 제2제국 중기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