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2)
-조용해질 때까지 그냥 쉬면 안 되겠니.
제1고, 나아가 제1대학, 그리고 관료의 길을 걷는 아들의 모습을 꿈꾸던 어머니.
만약 살아 계셨다면 그렇게 말씀하셨겠지.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을 해 줄 사람은 없다.
“괜찮을 거예요, 엄마. 제1고는 혁명군 장악 지역 안에 있고, 태사 각하가 등하교에 쓸 차량까지 제공해 주신다고 하니까요.”
이런 말을 들어 줄 사람도 없다.
견하는 쓰게 웃었다. 복수를 위해 꾸역꾸역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자신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정의감으로 움직이는 건지.
아, 정의감은 아닌가. 더 큰 피해를 막겠다며 리안의 ‘내전’에 협력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 역시 복수심인가 보다. 견하는 세린전의 방을 나섰다.
***
군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차에서 내릴 때도, 혼자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고 교무실을 찾아갈 때도, 제1고 학생들의 반응은 차분했다.
이목을 끌지도 모른다 생각했기에 견하는 다소 당황했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교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
의식을 잃기 전 딱 한 번 봤던 소녀, 루우가 먼저 와 있었다.
올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치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루우는 조용한 교무실에서 조용히 눈동자를 옮겨, 견하를 응시한다.
견하는 그녀 옆에 가 섰다. 루우는 제1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었다. 전에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 신선하기도 하고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준비성 철저하네. 이래서야 내가 게을러 보이겠는걸.’
새삼 ‘안녕, 잘 지냈어?’ 하고 인사하기도 늦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교무실에서 나는 작은 소음들만이 놓였다.
어색했다.
견하는 뭐라고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문득 두 사람 사이에 한 번도 제대로 대화가 오간 적이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마치 지금 들려오는 소음의 일부처럼, 소녀는 말을 툭 얹어 놓았다.
비꼬는 것도 아니고 걱정하는 것도 아닌, 그냥 견하의 상태가 그렇다는 걸 표현할 뿐인 말. 그 독특한 말투에는 귀 기울이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견하는 뭐라 답할지 고민했다.
“그러게. 죽는 줄 알았는데.”
루우는 견하를 보며 눈을 두 번 깜박이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어색한 단절이 잠깐 더 이어진 후에야 교사 한 사람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견하와 루우는 몇 가지 설명을 듣고 또 다른 교사의 뒤를 따라 교실로 향했다.
두 사람 다 같은 반에 배정된 것 같았다.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담임교사가 알아서 간략하게 해 버렸다.
“……테러리스트들에게서 태사 각하를 구할 때 입은 부상이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니까, 쉬는 시간에 너무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피곤하게 하진 말아라.”
견하는 공식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된 모양이다.
“여기 루우는 몽골 귀족 집안의 따님이다. 이번에 부모님이 외교 일로 고려에 오시면서 같이 유학 온 거니까,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친절히 대해 줘라.”
루우는 ‘그런 설정’을 내세운 모양이다.
학생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했다. 눈동자 속에 호기심은 있었지만, 말은 없었다. 제22고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당황하는 단계를 넘어, 견하의 눈에는 제1고의 특징이 잡히는 것 같았다.
미리 준비했는지 책상과 의자 한 쌍이 교실 뒤쪽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추가’된 학생들을 위한 자리라는 듯이. 견하와 루우는 그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곧바로 진행됐다.
어차피 교과서가 다를 거라고 생각해서 견하는 챙겨 오지 않았는데, 루우는 무슨 준비성인지, 오늘 수업에 맞는 교과서를 챙겨 왔다.
견하가 ‘같이 볼 수 있을까.’라고 묻기도 전에, 루우가 먼저 책을 내밀었다.
“고마……”
워, 라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을 만큼, 루우가 상체를 견하 쪽으로 기울였다.
허벅지 위에서 치마가 살짝 움직였고, 머리카락에서는 루우만의 향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향기가 퍼져 왔다.
큰 눈망울이 견하의 당황한 얼굴을 훑는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야 해.”
아까처럼 주변의 작은 소음에 얹는 듯한 어조였다. 주위를 보니 아이들이 그런 두 사람을 흘끔거린다.
“앞으로 같이 행동하려면 그런 ‘겉 포장’이 필요하니까.”
***
1교시가 끝나자 찾아와 인사를 나눈 반장과 아이들에게선 특별히 텃세가 느껴지진 않았다.
형식적인 친절함이었지만, 견하에겐 그편이 차분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그랬다. 형식적 친절함…… 가식이 아니라, 여기에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권장되는 분위기였다.
오늘 두 번째 수업을 마치자, 견하는 왜 이 학교의 분위기가 이토록 조심스럽고 조용한지 알 것 같았다.
제1고등학교는 정계의 축소판, 혹은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견하가 밤새 ‘전학’ 간 학생의 빈자리에서 느꼈던 불안감이, 여기서는 훨씬 더 구체적으로 공중을 떠돌았다.
학생 중에는 귀족 가문 출신도 있고, 기업가나 장성, 고위 관료의 자녀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건 학생들과 학교의 분위기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이 학교 학생들은 권력의 핵심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게 좀 더 명확한 설명을 해 준다.
미승휴와 허동주를 제외하고, 권력의 핵심을 공전하는 모든 인간은, 근대 기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모든 감시를 받았다.
물질적으로는 서민들보다 풍요로울지 몰라도, 그들은 늘 숙청의 위협에 시달렸다.
상급자든, 동료든, 하급자든, 모든 사람의 눈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사소한 꼬투리나 원한도 사지 않도록 조심스레 행동해야 했다.
그들의 자녀도 마찬가지였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평소 행실과 가정 분위기를 재는 척도였다.
서민들의 학교에서 종종 일어나는 주먹다짐, 파벌 다툼 같은 것은 곧바로 부모를 질책할 구실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위세에 기대 다른 아이에게 모욕이라도 가하는 날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 누군가 아버지를 ‘밀고’하고, 가족 모두가 한밤중에 ‘어딘가’로 이사 가겠지.
아이들의 조심성과 바른 예절은, 그 가정의 교육도 한 요인이지만, 가정을 지키려는 아이들의 필사적인 노력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못된 장난’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들이 먼저 신학교나 ‘그냥 부자 학교’로 보내 버렸다.
제3제국 권력 중심부, 엘리트 관료 양성기관 ‘제1고등학교’의 문턱은 그렇게 높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다 ‘제1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취업 보장’이라 불리고,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1대학교로 진학하는 과정은 ‘등용문’이라 불렸다.
반장을 비롯한 반 아이들의 친절한 대응도 그렇게 보니 이해가 갔다. 물론 반쯤은 ‘진짜 호의’일 수도 있겠지만, 나머지 반 정도는 ‘견하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이유일 터이다.
견하의 가정이야 이들보다 훨씬 초라한 중산층이지만, 견하 개인의 ‘뒷배’는 다른 누구도 아닌 ‘태사 미리안’이니까.
“저기…… 얘들아. 다음 시간 체육 말인데…….”
견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장, 양수영이라는 여자애였다.
어깨를 살짝 넘는 갈색이 도는 검은 생머리, 친절하고 따스한 미소. 아주 옅게 화장한 얼굴엔 보기 좋은 분홍빛 생기가 돌았다.
“…….”
루우는 이번에도 말없이 가방에서 체육복을 꺼냈다. 견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수영에게 물었다.
“난 아직 체육복을 못 샀는데. 이번 시간은 그냥 견학하면 되는 거야?”
“음, 견하 네 체육복은 여기 있어. 담임선생님이 학적부 보고 사이즈 맞는 체육복을 구해 오신 것 같아. 체육복은 교복처럼 꼭 맞춤으로 할 필요는 없으니까.”
새 옷 냄새가 나는 체육복을 받아 들고 견하는 고마워, 라고 말했다. 수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 너희 둘을 데리고 가야 해. 그…… 너희는 이단이잖아? 이단인 학생들은 다른 애들하고 같이 체육 수업을 받지 않거든. 따로 마련된 이단 전용 체육관이 있어. 거기서 서로 알아서 수련 같은 거라도 하면 돼.”
견하와 루우는 수영을 앞세우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문득, 그러면 체육 과목 평가는 어떻게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가 의외로 쉽게 답을 찾았다.
이단들은 군사적 용도로 쓰인다는 진로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
복도와 계단을 몇 번 번갈아 지나고, 세 사람은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수영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루우와 견하가 뒤를 따랐다.
“여기가 이단 학생들 전용 체육관이야.”
수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이 체육관이지 그냥 사방이 창문도 없는 콘크리트 벽이었으니까. 그래도 하얗게 페인트칠은 해서 구색을 갖췄다.
“아무래도 이단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체력 단련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건가. 이단 체육 교사도 없고. 하긴, 군인과 실전 무기를 고등학교에 배치할 순 없었겠지. 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음, 둘이 알아서 수업하다가 종 치면 교실로 돌아오면 돼. 난 이만 가 볼게. 아, 탈의실은 저쪽이야.”
그렇게 말하고 수영은 나갔다.
들어온 문의 맞은편 벽에 조그마한 문 두 개가 있었다. 각 문에 붙어 있는 표지로 보아 각각 남녀 탈의실인 모양이었다.
견하는 들고 온 체육복을 보며 루우에게 말했다.
“갈아입고 올게.”
갈아입는 건 그렇다 쳐도, 루우와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루우에게서 뭔가 쓸 만한 정보를 캐낼 수는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탈의실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다.
루우는 닫히려는 문을 잡고 견하의 뒤를 따라 남자 탈의실로 들어왔다.
“……여긴 남자 탈의실인데?”
“둘이 따로 있는 것보단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해.”
“그게 무슨……?”
“아까, 교실의 빈자리들 봤어?”
처음 교실에 들어설 때는 경황이 없어 신경 쓰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찬찬히 살펴보니 교실에 듬성듬성 빈자리가 꽤 많았다. 결석한 학생들의 자리였다.
“어떤 애들 자리일 것 같아?”
“글쎄…….”
“‘내전’을 앞두고 허동주 편에 선 사람들이, 오늘 학교에 자기 자녀들을 안 보냈을 수도 있어.”
루우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당황해서 멈칫거리던 사고가 좀 돌아가는 것 같았다. 견하는 루우의 말을 받았다.
“아니면 천손민족협회의 적극 가담자일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