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1)
어제 리안은 배영훈의 보고를 받고 세린전으로, 견하가 누운 방으로 향했었다.
그녀가 받은 보고는 견하가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문을 열어 주겠다는 장교의 손길을 거부하고, 자신의 손으로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약간의 땀 냄새가 섞인 소년의 달콤한 냄새가 방안을 맴돌았다.
소년의 체온을 염려해서인지 조금 더울 정도의 열기가 뺨에 닿았다.
견하는 허리를 세우고, 크고 푹신한 베개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오래는 못 있어. 바로 다시 가 봐야 해.”
나는 왜 이런 이야기부터 꺼낸 걸까. 소년은 리안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란 것도 아닌데,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이.
리안의 생각을 모르는 견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와의 회담 중이라면서요.”
“그래. 네가 루우를 구하고 기절한 다음,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됐어.”
소년은 생각에 잠겼는지 입을 다물었다.
리안은 아주 약간의 초조함을 삼키며 소년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지금 회담장에는 효윤이와 각하, 둘 뿐이겠네요.”
“그래.”
리안은 견하의 눈을 들여다봤다. 의욕도 희망도 잃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소년의 눈 안에는, 이상하긴 해도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그게 리안에게 안도와 약간의 만족감을 줬다.
“저도 나가 볼게요.”
류성일의 총장실에서 느꼈던 든든함은, 마냥 착각만은 아니었다. 물론 저 의지는 복수심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곁에 두고 싶다.
죄책감인가, 연민인가.
견하와 효윤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마저도 리안 자신의 망상일 뿐이고, 실은 그저 꼭두각시의 소꿉놀이, 헛되고 헛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리안은 소년의 책임감과 의지, 그리고 자신의 느낌에 걸어 보고 싶었다.
“일단은 몸 추스르고 있어. 회담 끝나고 부를 테니 그때 현통전으로 와.”
***
다음 날, 4월 4일.
하루 넘게 의식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견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피곤하다거나, 몸속에 이물감이 느껴진다거나, 출혈이 있거나 기침을 하는 일도 없었다.
반대로 새로운 활력이 솟거나 놀라울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직 이단이 되었다는 실감이 없을 뿐이고, 몸은 이미 일반인을 초월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의식을 잃기 전과 달라진 게 있었다. 지금까지 없던 감각이었기에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감각이 ‘추가’됐다.
견하는 이 감각이 생긴 게 신기하긴 했지만 낯설진 않았다.
비유하자면, 지금까지 뻔히 봐 왔어도 인식은 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새삼스레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손바닥 위, 허공에 뚫을 수 있는 둥근 공간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견하는 분명히 그 둥근 일그러짐 너머가 이 세상과 맞닿은 어딘가라는 걸 느꼈고, 작은 괴물 역시 그 어딘가에서 자신과 맞닿은 피조물임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그걸 설명할 사전상의 ‘단어’가 없었기에 설명이 힘들 뿐, 견하는 그 공간과 괴물을 ‘알게 됐다’.
공간의 개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견하에게는 그 일이 지금껏 달린 줄도, 움직일 줄도 몰랐던, 하지만 원래부터 달려 있던 신체 기관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관은 생각보다 훨씬 잘 움직였다.
괴물 역시 그러해서, 통제가 안 된다든가 하진 않았다. 괴물은 생김새와 달리 순종적이고 온화했다.
다만 버림받은 고양이 같은 희미한 불안이 느껴졌는데, 견하는 그것이 낯선 공간으로 불려 나온 데서 오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이상이라고는 없는 견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리안은 별다른 조치 없이 등교를 명했다.
“딱히 견하 군 같은 사례가 우리 쪽에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견하 군이 별 이상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 토를 달진 않을 거야.”
견하는 그래도, 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의사들한테 한번 보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왜, 걱정돼? 건강검진이 필요하면 그렇게 해 줄 수는 있는데.”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게 뭔지’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해서요.”
“뭐, 우리가 따로 연구해 오던 건 아니라, 축적된 자료도 없고 당장은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봐. 견하 군이 잠들었을 때 왔다 간 의사들도 별다른 건 알아내지 못했거든. 그리고 지금은 전문가의 견해보다는 보안이 더 중요하고.”
견하는 이해했다. 누구도 함부로 믿을 수 없는 지금, 리안이 새로 갖춘 전력의 정보를 쉽게 드러낼 수는 없었다.
다소간의 의문과 혹시 모를 위험성을 뒤로하고, 견하는 리안의 명령에 따라 등교를 준비했다.
의식을 잃었던 동안에도 리안을 따라 옮겨지느라, 또 고려민국 임시정부와의 합작이다 뭐다 다들 바쁘다 보니, 견하의 제1고등학교 교복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제22고의 교복을 걸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양털 같은 머리카락은 아무리 매만져도 잘 정리되지 않았다. 너무 북슬북슬해지지 않도록 누르는 게 고작이었다.
눈매는 둥근 선을 그리며 아래로 향해 약간은 멍한 인상이다. 볼 언저리에서 시작된 턱선은 턱 끝을 향해 가파르게 내려갔다.
견하는 미소년이라느니, 잘생겼다느니, 혹은 하다못해 봐줄 만한 얼굴이니 하는 여자애들의 평을 잘 이해하진 못했다.
물론, 이런 인상에 호의를 갖는 애들이 있는 만큼, 살아가는데 쓸모 있는 얼굴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재연이는 잘 있을까…….’
한재연. 친구.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더 ‘미소년’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소년.
그는 견하가 천손민족협회에 참가하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그대로 사라지고 나서 이틀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아침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제 만날 일은 없겠지.’
각자 고등학생에 불과했지만, 이제 서로 다른 편에 속했다. 견하는 태사 미리안의 편에, 재연은 문하시중 허동주의 편에.
두 세력은 각자 준비가 끝나는 대로 내전에 돌입할 것이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그리고 견하 개인에게도…… 그의 가족을 파괴한 자들이 허동주의 끄나풀로 추정되는 이상, 천손민족협회의 재연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견하는 재연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렸다.
다시 교복 매무새를 고치는 데 집중했다. 제1고 학생들 사이에선 튀어 보이겠지만, 잠깐이겠지. 오늘 중으로 치수를 재고, 몸에 맞는 교복을 주문할 것이다.
지난 이틀, 정신을 잃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가……?’
아쉽다, 라.
왜 여기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까? 무엇이?
복수에 쏟았어야 할 이틀의 시간이? 아니면 수동적으로 누워만 있던 자신이?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견하는 자신의 삶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견하는 마음속 한구석 빈자리를 종종 발견하곤 했다.
별달리 아려 오는 일 없이, 문득 눈에 띄면 신경 쓰이는 그런 빈자리.
어쩌면 기본적인 생활의 조건이 충족된 인간이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면서 생기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은 거기에 여러 가지를 채워 넣는다. 원대한 이상, 인격의 도야, 학문적 성취, 부에 대한 갈망, 승리를 향한 투지.
견하에겐 리안을 만나기 전까지 그런 것이 없었다. 감정이 결여된 인간은 아니었다. 그 또한 보통 남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놀고, 농담하고, 웃고, 여자애들 치마 끝자락이나 목덜미를 흘끔거리고, 시험공부에 머리를 싸쥐고, 시험 결과에 좌절하거나 흥분하는, 그런 소년이었다.
다만 ‘삶의 열정’이라 할 만한 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을 뿐이다. 다른 아이들은 잠깐씩이라도 그 자리가 찼다가 비기를 반복했지만, 견하만은 줄곧 비어 있었다.
그랬던 게, 리안을 만나면서 바뀌었다.
견하는 리안의 삶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정치가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고, 그녀가 하는 말도 머리를 열심히 굴려야 간신히 알아들었지만, 그는 그게 멋지다고 여겼다.
학업이나 여자 친구보다, ‘권력’이라는 미지의 주제가 견하의 마음속 빈자리를 채웠다.
여기에.
부모님의.
죽음이.
덧칠해졌다.
“전쟁광들이 내 부모를 죽였어…….”
이제, 더는 시대에 휘둘리기만 하지 않겠다. 적어도 역사의 흐름에서 헤엄을 칠 수는 있어야 한다.
그렇게…… 무력한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면.
막연한 주제는 구체적 동기가 된다.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분쇄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렇기에 지난 이틀은, 견하에게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이틀 동안 리안과 효윤의 곁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일개 고등학생인 견하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더라도, 아예 없진 않았을 것이다.
다 끝난 일의 결과를 집에서 라디오로 듣는 게 아니라, 라디오가 다루는 소식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었다.
리안을 암살하려던 이단의 몸에 칼을 박아 넣을 때, 견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피나 살, 내장, 뼈, 혹은 생명의 박동이나 살인의 충격이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더 크게, 어떤 ‘역할’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밀려왔다.
그 성취감에 견하는 몸을 떨었다. 루우라는 그 여자애를 밀어내고 괴물 앞에 섰을 때도, 그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앞섰다.
‘너무 어린애 같은 생각일까? 아니면…….’
자신이 왜 그런 열정에 사로잡히는지는 모른다.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만 명백했다.
때문에 견하는 이유를 찾기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제1고는 도서실이 얼마나 크려나?’
리안의 밑에서 일하려면, 역사와 정치와 권력에 대한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면, 더 많은 지식이 필요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배운 지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견하는 자신이 정치 권력과 관련 없는 삶을 살 것으로 생각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착각이야.”
그 지식이 없기에 당한 것이다. 좀 더 똑똑했다면 그날 바로 가족과 함께 집을 나왔겠지.
리안을 무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은 의미 없다. 고려 제3제국의 현 상황에서, ‘무지’는 언젠가 반드시 재난으로 다가온다.
견하는 방과 후든 쉬는 시간이든, 틈나는 대로 학교의 도서실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