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 혁명(7)
안세규는 임시정부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결과, 독자적으로 이단 지식을 손에 넣었다고 말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일 것이다.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겠지. 허동주 쪽에 심어 놓은 첩자? 일본이나 아즈텍?
리안은 루우의 얼굴을 흘끔, 바라봤다.
몽골인가. 혹은 키타이나 낭키아스 칸국에서 지원을 받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머릿속에 넣어 두자. 어쩌면 외국과의 내통 혐의를 씌울 수도 있는, 유용한 정보다.
“제가 루우에게 보고받은 주견하 군의 용태대로라면, 곧 깨어날 겁니다. 그래도 혹시 걱정되신다면 우리 측 의료진을 보내 드리죠.”
리안은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곧 깨어난다면 수고스럽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말씀하신 대로라면 인위적으로 이단을 만들어 낸, 우리 측의 소중한 자료니까요.”
“이해합니다.”
“그럼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 보죠.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지만.”
안세규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제국최고회의와 거기서 구성한 내각이 앞으로 제3제국을 통치한다. 앞서 자운전에서의 회담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끝났다.
빠르면 내일,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고려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제국 정부에 합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협력도 공고해지고, 본격적으로 허동주를 제거하는 내전에도 뛰어들 수 있겠지.
“입헌군주제의 가장 큰 장점은, 단 한 가지 전제에만 동의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는 정파끼리도 공존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군주’ 아래 모두가 평등한 신하라는 전제 말이에요. 귀측, 즉 민국 정부와 우리 제국 정부 사이라 해도 말이죠.”
다만, 이라며 리안은 말끝을 흐렸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녀가 알게 된, 허동주와 천손민족협회의 우스꽝스럽고도 섬뜩한 전쟁 계획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세규도 허동주를 단순한 군국주의자로 파악하고 있던 건지, 이 이야기에는 눈썹을 사납게 치켰다.
“그자는, 안타깝게도 노망이 좀 일찍 찾아온 모양이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침략 전쟁을 원하는 민중의 의지도 민주주의’인가요? 총선거를 시행할 시 허동주의 정파가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제국최고회의에 입성할 가능성이 높다면, 이 상황에서도 총선거를 치를 수 있을까요?”
리안의 물음은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동맹이 정권을 지켜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 정부가 끝없이 고민해야 하는 물음이기도 했다.
민중이 자살을 결의하면, 그 결의는 민주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는가?
“여기선, ‘천자봉대’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겠군요.”
“허동주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주살을 명하는 칙령이라도 받아 내자는 건가요?”
“고전적 수법이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하죠. 이런 게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은 ‘황제’가 있어야죠. 우리에겐 지금 황제가 없잖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희가 이미 찾아내서 보호 중이니까요.”
리안의 눈이 커졌다.
효윤은 오늘, 아니 리안을 경호하기 시작한 이래, 그녀가 그렇게 놀라움을 드러내는 건 처음 봤다.
그 표정은 곧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안세규가 포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의외군요. 민국 정부는 공화제를 지향하니 그런 쪽에 손을 써 두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공화제만 고집하면서, 임시정부만으로 정권을 장악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이죠. 우리도 타협 수단 하나쯤은 마련해 둬야 했고요.”
“그렇다면 어서 황제가 되실 분을 뵙고 싶은데요.”
“그건 어렵겠습니다.”
리안은 무슨 말이죠, 라고 되묻지 않았다. 대신 눈에 노기를 띠고 안세규를 노려봤다.
안세규는 다시 여유 있는 웃음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태사께선 설마, 태사의 백부님이 지난 19년 동안 정말로 황족 하나 못 찾아내서 옥좌가 공석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꼭 백부님이 일부러 안 찾아내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안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태조 황제만 해도 스물아홉 명에 이르는 아내가 있었고, 그만큼 많은 자식을 뒀다.
황위 계승권에서 지나치게 멀어진 왕씨들은 제외한다 해도, 천년 세월 동안 황위를 이을 황족 한 명 남기지 못할 정도로 수가 적진 않을 것이다.
“미승휴 전 태사일지, 허동주 문하시중일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만…….”
안세규는 말을 조심스럽게, 조약돌 위에 조약돌을 올려놓듯 배열했다.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난 19년간 많은 수의 황족들이 은밀하게 살해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역시 누구의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사를 황위에 올리려는 계획이 얼마 전까지 진행 중이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누구의 소행인지 모른다.’라는 건, 짐작은 하되 미리안과의 마찰은 피하고 싶다는 뜻일 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확보한 이 황족을 보호하려면 지금은 바깥에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정식으로 신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방패도 필요하고요.”
리안은 굴욕감에 입술을 씹으려던 걸 간신히 자제했다. 또다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느꼈다.
백부가 꾸민 일들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나는 백부에 대해 제대로 알기는 한 걸까?
“황실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저를 옥좌에 올린다니, 그자들은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는지 궁금하군요.”
“……태사의 혈통을 왕씨로 조작할 수는 없으니, 그보다 더 먼 혈통을 내세울 계획이었던 듯합니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고씨’나 부여의 ‘해씨’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불완전한 타협 위에 선 무언가가 아니라, 제대로 된 권위와 권력을 만들고 싶었겠죠. 진정한 의미에서 ‘제3제국’이 완성되는 겁니다.”
제3제국의…… 완성, 이라.
리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부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허동주의 계획이 무엇이었든,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완성하면 되겠네요. 제3제국.”
안세규는 동의한다는 듯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손을 들어 왼쪽 뒤에 선 루우를 가리켰다.
“정식으로 임시정부 쪽 인사들이 합류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루우를…… 제1고등학교에 입학시켰으면 합니다.”
리안도 효윤도 시선에 의문을 담아 던지자, 안세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제국 정부와의 유대를 좀 더 강화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아무래도 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의 여론도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서요.”
“천손민족협회가 얼마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가, 같은 것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곧 편입할 수 있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
루우와 안세규는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식으로 성대한 배웅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떠나고 나서 리안과 효윤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다.
“효윤아, 이상하지 않니?”
“에…… 예, 옛?”
갑자기 이름을 부르며 질문이 들어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효윤은 자세를 바로 했다.
“나를, 황제로 만든다는 계획 말이야.”
“그, 그거야…… 안세규라는 사람의 말일 뿐이지 진짜라는 증거는 없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게…….”
리안은 눈 위에 손등을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효윤의 말대로, 자신들이 보호 중인 황족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던진 핑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 구체적이다.
만약 안세규의 말이 사실이라면, 허동주는 이걸 몰랐을까? 허동주가 만약 안다면 왜 이걸 자신을 비방하는 데 사용하질 않지?
순식간에 그녀를 역적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무기인데.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대체 어디인가. 모든 것을 첫 단계부터 의심하며 재검토해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들어와.”
들어온 사람을, 리안은 반가운 미소로 맞이했지만, 효윤은 앉은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주견하였으니까.
“저, 각하? 대체 견하가 어떻게……?”
“아까 현통전으로 오기 전에 이미 의식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어.”
몇 시간 전 효윤을 남겨 두고 자운전을 나섰던 건, 주견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건가.
“그럼, 임시정부 주석에게 하신 말씀은…….”
“당연히 거짓말이지.”
리안은 견하더러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소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앓고 나서 좀 더 멋있어진 것 같네. 몸은 어때? 괜찮아?”
“네…….”
쑥스러운 듯 대답하는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리안은 아까 안세규와 나눈 대화를 간추려서 들려주었다.
“루우가 제1고등학교로 오게 될 거야. 함께 붙어 다닐 수 있도록 해 봐.
임무는 세 가지다. 루우에게서 이단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가능하다면 전투 기술도 익혀. 임시정부가 숨기고 있는 황족의 정체나 소재지도 밝혀내려고 해 봐. 실존한다면 말이지만. 그리고 루우와 함께 천손민족협회의 동향도 확인해 보고.”
견하가 진지한 얼굴로 끄덕이자, 리안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단이 되었다면, 자신이 가진 초능력이 뭔지 파악은 했어? 지금 혹시 보여 줄 수 있나?”
견하는 왼손을,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들어 올렸다.
그 위에 아주 작은 공간이 원형으로 색종이를 오려 내듯 다른 어딘가를 향해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박도도 언월도도 아니었다.
하얀 괴물의 축소판이, 매끈한 표면에 군데군데 핏물을 묻히고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 입이 없었기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건만, 리안과 효윤은 마치 칠판 긁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은 견하의 얼굴을 바라보고 숨을 삼켰다. 그들은 평생 그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소년은 작은 괴물을 더없이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