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 혁명(6)
“답변 고마워요.”
김천열에게 그렇게 말하고, 리안은 선포했다.
“허동주 측으로 돌아서는 자는, 그동안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기업가라고 해도 예외를 두지 않겠습니다. 계좌를 동결하고, 반역자로 수배하며, 재산을 몰수할 겁니다.
그럼 적어도 행동에 나서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더 생각해 보겠죠. 물론, 그중에 우리에게 판돈을 걸고, 다른 기업들이 몰락하는 틈을 타 몸집을 불릴 머리 좋은 기업인들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노동조건과 임금을 개선하는 대신 거둘 이익은, 여간 근시안적 사고를 하는 이가 아니고서야 기업을 운영하는 자라면 계산할 수 있겠죠.”
리안은 다시 안세규를 향해 말했다.
“문제는 그들이 판돈을 걸만한 승산을 우리가 보여 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태사께 세 번째 제안을 하고 싶군요. 바로 수용소에 갇힌, 혹은 변방으로 쫓겨난 장병들의 석방과 복권입니다.”
안세규는 단어 선택을 신중히 했다.
‘평양 회담’ 때의 반역 조작 사건. 여기서 그의 선배들이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 미리안 측의 자존심을 건들 우려가 있다.
반대로 미리안과 제국 정부 측이 용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 임시정부의 상처를 헤집는 꼴이 된다.
리안도 그 점을 고려했는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즉각 시행하기로 하죠. 다만…… 19년이라는 시간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그 시절 사람 중 몇 명이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을까. 추운 북방 삼림지대에서 19년 동안 유배에 가까운 군 복무를 견딘 자가 있을까?
이등병이 늙은 최고참 부사관이 되고도 남는 시간이다. 19년은.
“그래도 그들이 허동주에게 가진 반감은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와서 필요하니 이용하려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제국 정부가 변화했음을 보여야 합니다. 이게 제가 태사께 드리는 네 번째 제안입니다.
적어도 수도권에서라도 선거를 시행해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임시정부와 합작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겁니다. 물론 허동주를 제외한 모든 정파가 참여해야겠죠.
나아가…… 20년 넘게 빈 저 옥좌의 주인도 찾아야 하고요.”
오늘 가장 큰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오래 두어서 좋을 게 없는 술렁임이다. 리안은 그 술렁임을 자르듯, 단언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새로운 정부의 이름은 ‘제국최고회의’ 같은 게 어떨까 싶어요. 그 수장은 ‘의장’으로 하고요. 민주적인 인상을 주는 이름이지요?
개혁하는 김에 중세식 이름과 근대식 이름이 뒤섞인 이 체계도 어떻게 한번 바로잡아 보는 거죠.”
미리 생각해 두고 있었나, 하며 안세규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어쨌든 그는 동의를 표하려 했다.
그러나 리안은 안세규가 예상치 못한 무서운 기세로, 제국의 지도자가 결코 허울이 아님을 드러내 보였다.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는 리안의 얼굴, 그 눈에 드러나는 열망과 집념을 보며, 안세규는 탁자 아래로 내린 주먹을 꽉 쥐었다.
“제국최고회의의 ‘초대 의장’은 물론 저여야 합니다.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
회담은 꽤 길어졌다. 참석자들은 한 번 더 휴식했다.
그 틈에 배영훈 소령이 리안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듣고 있던 리안은 눈썹을 몇 번 찡그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잠깐 실례를.”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영훈과 함께 자운전을 나갔다. 효윤은 데리고 가지 않았다.
효윤은 의아해했지만, 일단 여기서 대기하며 무슨 일이 있을 경우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물론 자운전에 남은 참석자들의 반응을 살펴 두라는 명령도 함께.
리안은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쯤 오시는 건가, 하는 물음이 슬슬 나오기 시작할 때를 맞추기라도 하듯, 리안은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자운전 회담장,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
회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저녁.
미리안과 최효윤, 안세규와 루우는 함께 자운전 뒤쪽, 현통전까지 이어진 길을 걸었다.
그 밖의 수행원은 없는, 두 수장 간 대화를 위한 시간이었다.
“이왕 오신 김에 세린전에서 저녁이라도 들고 가지 않으실래요, 선배님?”
안세규는 양 눈썹을 올리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다분히 예의상 짓는 표정이었다.
“거기까지 신세를 질 순 없을 것 같군요. 그보다, 알고 계셨군요, 후배님.”
“제적당했다고는 해도 선배님은 과에서 전설적인 분이니까요.”
안세규는 조금 즐겁다는 듯, 예상치 못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소탈한 웃음이었다.
“이제 제 이름은 민주주의 계열 학생들의 입에만 몰래 오르내리는 줄 알았는데요…….”
“선배님은 선배님을 동경하는 학우에게든, 경멸하는 학우에게든, 어쨌든 이야깃거리는 많이 주시는 분이죠. 그런 게 ‘전설’이기도 하고요.”
군을 전역하자마자 동지들 몇을 데리고 반정부 활동을 개시. 이후 비밀경찰인 야별초의 눈을 피해 지하 세계로 몸을 감춘 남자.
신출귀몰하여 절대 잡히지 않으면서 정부와 군 시설에 대한 테러 공작을 성공시킨 남자.
화려하고 날카로운 논설은 대학가에서 인기가 높아, 임시정부의 불법 신문을 널리 퍼트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른도 안 된 청년이 임시정부의 중역을 맡고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전설이 되었지만…… 설마 주석까지 꿰찼을 줄은 몰랐다.
리안은 안세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다. 틀림없이 노회한 투사들 사이에서 무수한 회유와 폭압을 반복하며 저 자리에 이르렀으리라.
혈통과 운 덕분에 여기까지 온 자신과는 달리.
안세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멀리 궁궐 처마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리안에게 물었다.
“민주주의자인 학생들과도 어느 정도 교류를 하시는가 봅니다?”
그 말에 리안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척하지 않으셔도 돼요. ‘개혁적인 성향의 차세대 지도자’에 대한 보고는 충분히 받아 보셨을 테죠?”
“그와 반대되는 보고도 많이 받았죠. ‘결국 자신의 권력이 최우선인 미승휴 2세’. ……어느 쪽이 가면입니까?”
“가면과 맨얼굴, 그런 걸 굳이 구분할 이유가 있나요? 둘 다 가면일 수 있고, 둘 다 맨얼굴일 수도 있죠. 이쯤 되면 가면과 맨얼굴의 구분은 무의미해요.”
결국 상황과 필요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이것이 저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가면을 쓴다. 그래야 구성원끼리 잘 맞물려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어떤 이는 이걸 두고 온 세상이 위선으로 가득 찼다 냉소하겠지. 하지만 위선이 인간 본연의 성질이라면, 이 위선자들의 세상은 진실로 가득 차 있다.
“이대로 우리 사이의 협력이 잘 이뤄져서, 고려 제3제국이 개혁으로 나간다면, 제가 학우들에게 보여 준 ‘개혁적 성향’도 진심이 되겠죠. 반대라면 기만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될 테고.”
“잘될 겁니다. 잘되어야만 하고요. 우리와 허동주 측의 협상 가능성은 오늘 이 일로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네 사람은 현통전 계단을 올랐다. 이 안에 있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화제를 사이에 두고 대화가 오갈 것이다.
집무실에 들어와 착석한 후, 안세규가 먼저, 주견하의 용태를 물었다.
“지금도 의식이 없습니까?”
“네. 그런데 듣기로…… 그 하얀 괴물에 공격당한 일반인은 이단이 된다던데, 맞나요?”
“들으신 대로입니다.”
“대체…… ‘그것’의 정체가 뭐기에? 아니, 그보다도 주석께서는 그런 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안세규는 탁자 위에 두 손을 모았다. 들려줄 정보와 감출 정보를 골라내는 것 같았다.
“태사께서도, 이단의 양성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쇠를 잡아 찢고, 한 번의 도약에 탑을 오르는 초능력자들. 그들은 군사적 유용성이 높은 평가를 받아 군의 자원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이 이단이라는 것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원리가 해명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혈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라는 가정 아래, 기존 이단의 친족들을 조사하는 방식으로 인재 발굴이 이뤄졌다.
“당연히, 군, 특히 허동주 파벌을 중심으로 이단의 탄생 원리를 해명하고, 더 나아가 이단을 인위적으로 양성해 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하얀 괴물은, ‘이단의 인위적 양성’을 연구한 결과물이라는 건가요?”
“최효윤 양이나 우리 루우 같은 자연적으로 탄생한 이단에 비하면 모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는 강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뒀다고 봐야겠죠.”
“주석께선 그런 걸 잘 아시는군요.”
“고려민국 임시정부는 철저하게 열세였습니다. 때문에 이단이라도 확보해서 그런 입장을 모면하려 했죠. 그렇게 힘을 쏟은 결과 알게 된 지식입니다.”
“그럼 고려민국 임시정부도 저 하얀 괴물을……?”
“아니요. 우리도 허동주 측과 싸우면서 얻은 지식입니다. 허동주보다는 연구 설비나 인재가 부족하다 보니 저 정도 수준에 이르진 못했죠.”
그런가. 허동주 파벌도 물밑에서 알려지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 온 건가.
“……하얀 괴물을 생산해 낼 순 없어도, 하얀 괴물이 일반인을 공격하면 이단이 될 수 있다는 지식은 얻었다는 거군요.”
안세규와 미리안은 침묵했다. 안세규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고, 리안의 눈은 가늘어졌다.
아마 견하가 겪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단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시도는 해 봤겠지.
그렇게 몇 명이나 만들어 냈을까? 어쩌면 허동주와의 싸움을 통해 더 많은 하얀 괴물과 조우하고, 이단을 만들어 내려는 목적이 있지 않을까?
정리해 보자.
허동주의 이단 생산 연구에 대해 안세규는 알지만 리안은 모른다. 이건 리안의 휘하에 무능한 자만 모였기 때문일까, 허동주의 비밀 유지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고 있었는데도 보고가 안 올라온 걸까?
‘어느 쪽이든, 내전 후 숙군(肅軍)은 피할 수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