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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4화 (14/541)

친위 혁명(5)

아주 잠깐, 침묵이 어전을 맴돌았다.

곧이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자리에 있던 관료의 절반 이상이 그랬다.

리안도 ‘하’ 하며 짧게 웃었다.

“‘전 세계적인 경제 대붕괴’라……. 저도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아직 일어난 적은 없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하면 일어난다는 일이죠?”

비웃음에는 아랑곳없이, 안세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사께서 그 분야에도 조예가 깊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우리 쪽 학자들은 그렇게 내다봅니다.”

리안은 웃음기를 지웠다.

“사회주의 계열 학자들 말이죠. 늘 하던 이야기 아닌가요? 모순이 끓는점을 돌파하면 자본주의 경제는 무너지고 혁명의 때가 온다던가…….”

마치 오지 않는 구세주를 기다리며, 종말이 머지않았다고 떠드는 종교 같다.

하지만 리안은 그 말을 삼켰다. 그런 말을 했다고 알려지면,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가 국교인 몽골의 반발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외교적 마찰을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어떤 때라도 만들지 말아야겠지만.

“정말 오기는 할지 의심스러운 미래의 예언 때문에 우리와 협력하러 나서셨다, 라.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건 아시겠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대충 둘러댄 핑계로 들립니다.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군요.”

고려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기로 한 리안이 이렇게 꼬투리를 잡는 건 모순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독단과 카리스마의 경계는 얇다. 리안이 자신의 결정이라며 밀어붙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적어도 이런 일에서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전반적인 동의를 끌어내야 했다.

임시정부의 주석, 안세규는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여러분이 우리 측 학자들의 말을 믿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전망이 신빙성이 높다고 여기며, 그 이유로 협상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죠.”

안세규는 탁자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한 번 둘러봤다. 리안은 그 동작에서 느껴지는, 우두머리의 역량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사선을 헤치고 조직을 수습하며 살아남은 남자가 눈앞에 있다.

그 사선의 대부분은 미승휴와 허동주로 인한 것이었겠지만.

“아까, 웃지 않은 분들도 계셨는데, 아마 나라의 재정에 관한 일을 맡은 분들이실 겁니다. 전문가들이니 아시겠지요. 이른바 ‘사회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붕괴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고려의 경제지표가 결코 긍정적인 전망을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리안은 경제 관료들의 입술 끝이 굳는 걸 보았다. 경제 관료들의 표정을 본 다른 관료들과 장군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안세규의 지적은 옳았다. 어쨌든 경제에는 호황과 불황이 있다. 오랜 기간 호황을 누린 고려의 경제는 이제 침체를 앞뒀다.

내전은 이 불황을 어떤 식으로든 악화시킬 것이다. ‘전 세계적’이라는 수식어는 과장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전이 장기화하거나 극단적 파괴로 이어지면, 고려의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한다.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내전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

김천열이 입을 열었다.

“주석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제국 정부’도 이것저것 가릴 계제가 아니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안전 보장’을 책임지고 있는 군인으로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석을 지금 이 자리에서 체포하면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방식’을 선택할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만.”

리안은 미소가 떠오르는 걸 억눌렀다.

군인인 김천열의 처지에서 안세규를 ‘주석’이라 불러 줬다는 건, 일단 리안의 방침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그의 질문은 도발이라기보단 리안과 안세규를 거들어 주는 것에 가깝다.

미소는 안세규가 지었다.

“앞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고려민국 임시정부에는 여러 파벌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노리는 자들도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나 제가 여러분의 오랜 적이긴 하지만, 또 다른 적의 극단적 행동을 억누르는 역할도 맡았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안세규는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는, 자신을 체포하여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수장 자리가 비게 되면, 누가 사회주의 파벌의 혁명 시도를 억누를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몸짓이었다.

결국 안세규를 체포해 버리면 마땅한 대안이 없음에 모두가 동의했다.

지금의 제국 정부는 고삐 풀린 혁명가들을 통제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잠깐, 차라도 마시고 논의를 이어 나가죠.”

리안의 제안에 모두 자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제 양측의 협력은 기정사실이 됐다. 차와 담소가 오가면, 본격적인 협력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이다.

***

찻잔에서 입술을 떼며, 리안은 효윤을 불렀다.

“가서 루우와 이야기 좀 해 봐. 입이 무거워서 정보를 얻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친목을 다져 두는 편이 좋겠어.”

효윤은 끄덕이고 루우 쪽으로 다가갔다.

안세규도 뭔가 눈치챘는지, 루우를 불러 몇 마디 속삭이고는 효윤 쪽으로 그녀를 보냈다.

루우가 마주 걸어오자, 효윤은 숨을 조금 깊이 들이마셨다. 어제, 효윤은 루우가 접근하는 데도 꼼짝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압도됐던 기억은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명령은 수행해야 한다.

“나갈까?”

효윤의 말에 루우는 끄덕였다.

그들은 자운전 앞으로 수십 미터 이어진 두 줄의 계단 중, 오른쪽 계단 근처 난간 앞에 섰다.

눈앞에는 태사부의 폐허와 그 주변의 광장이 보였다. 그리고 수백 미터 더 떨어진 곳에, 엄천문이 있었다.

피와 불꽃이 남긴 흔적은 거의 씻겨 나갔고, 시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효윤은 그저 정해진 절차대로 시신을 처리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어느 편이었든, 하다못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기를.

의외로 루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견하는?”

걱정되긴 했나 보다. 효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루우를 곁눈질했다.

이렇게 보면 꽤 귀여운 아이였다.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얇은 턱선과 그 아래로 이어진 하얀 목덜미는 부러울 정도로 모양이 아름답고.

“아직 잠들어 있어.”

“……그렇게 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 이단들 앞에서 굳이 그렇게 자기 몸을 던질 필요는 없었지.

견하는 어떤 심정으로 나섰던 걸까. 그 순간 부모의 원수에 대한 증오가 폭발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책임감이 강한 것뿐일까.

“하지만 감사는 하고 있어.”

루우는 차분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효윤은 새삼 루우의 고려어 발음과 억양에 감탄했다. 몽골인이라고 들었는데, 어색함이 전혀 없다.

효윤은 ‘견하가 깨어나면 전해 줄게.’라고 말하려다, 이어지는 루우의 말에 삼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겐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위험했다고?”

효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위험? 그 상황이? 촉수를 자르고 몇 번 조각내니 없어져 버린 그 괴물이?

“응. 특히 ‘우리’ 같은 사람한테.”

“우리라니…… ‘이단’을 말하는 거야?”

루우는 효윤 쪽은 보지 않고 끄덕였다.

“주견하가 아니라 우리가 당했으면 의식을 잃는 수준에서 끝나진 않았을 거야.”

“우리가 당했으면 어떻게 되는데?”

“죽어. 아니면 그보다 못하게 되거나.”

담담한 말에 효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루우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견하는? 견하도 죽어? 어떻게 되는 건데?”

루우는 불쾌하다기보다, 효윤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죽지 않아. 그 애는 이단이 아니니까.”

하지만 효윤이 안도할 틈을 주지 않고, 루우는 무자비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곧 그렇게 되겠지만.”

효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무슨 소리야, 그건…….”

“말 그대로. 그 애도 이단이 될 거야.”

루우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뻔했지만, 효윤은 손을 떼어 냈다.

대신 자신의 팔꿈치를 잡았다.

효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루우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 자신이 이단인 걸 알고서 한 번도 궁금하게 여긴 적 없어?”

“뭘……?”

“어떻게 이단이 된 건지, 무엇이 이단이 되게 하는지.”

효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런 건 타고난다 생각했다.

“……너는, 그걸 아는 거야?”

루우는 효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우리 주석과 너희 태사가 독대한 자리에서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차분한 말투에다 무표정이었지만, 효윤은 왠지 모르게, 루우의 말 뒤에 냉소가 숨겨졌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효윤이 다소 우울한 기분이 되어 자운전 안으로 돌아왔을 땐, 안세규와 리안의 논의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리안은 흘끔, 효윤의 표정을 살폈지만, 따로 뭔가 묻지는 않았다. 대신 안세규의 말에 집중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가 협력 방안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들은, 우리가 요구할 조건들과 어느 정도 겹치는 면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첫째는 노동조합의 전면적 합법화입니다. 이를 통해 양지로 올라온 노동조합 조직을 여러모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무기를 주면 병사가 되고, 물자 생산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을 바랄 수 있겠죠. 또 그 조직망으로 허동주 측의 연락과 보급에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무기를 준다, 라……. 사회주의 계열의 사병이 될 위험성은 충분히 인식하고 하시는 말씀이겠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드리는 제안이, 노동조건의 개선입니다. 최저임금의 보장, 무분별한 해고의 금지, 하루 10시간 노동 제한, 아동 노동의 금지 같은 것 말이죠.”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외치는 방식대로 개혁이 이루어지면, 사회주의 정치조직은 발톱의 날카로움을 잃는다.

변화와 진보를 향한 열망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게 만들며, 이것이 곧 사회주의자들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되면? 노동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싸늘하게 등을 돌린다.

“개혁은 혁명의 가장 큰 적이라 했던가…….”

이미 신성 제국의 나폴레옹 2세와 샤를 8세가 19세기 개혁을 통해 성공을 거둔 정책이기도 했다. 선례 면에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그늘은 있기 마련이다. 관료 중 한 명이 그 점을 지적했다.

“각하, 주석이 제안하는 개혁은 기업가들의 지지를 잃게 할 우려가 있습니다. 단순히 지지를 잃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허동주 측으로 돌아서면…….”

“허동주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겠지.”

안세규는 말이 없었다. 이 부분은 리안이 생각해야 할 사안이었다.

“생각해 둔 안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 경우, 그래도 숙련공들은 우리 측에 남을 테니 공장은 돌릴 수 있겠죠.

문제는 어떻게 허동주 쪽으로 돌아설 기업가들을 최소화하느냐, 인데…….”

리안은 김천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김천열로선 괜히 눈에 들어서 또 내 차례인가, 싶은 기분이었겠지만.

“장군은, 그런 기업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시죠?”

“군인인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하나뿐입니다. 역적은 토벌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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