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2화 (12/541)

친위 혁명(3)

웃음이 나왔다.

아침엔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는데, 오후엔 군을 이끌고 황궁 앞 대치라니, 정신없는 하루다.

리안은 곧 웃음을 거뒀다. 얼핏 보기에 당장은 유리했다. 하지만, 그게 리안이 잘해서 만든 상황은 아니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정세의 변화, 빠른 판단을 강요받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우연의 산물이다.

이 상황에 도취하면 정말로 모든 걸 잃는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등 뒤, 천막 안에서 떠드는 장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단을 망설이는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리안은 공주가 아니라 군주가 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바리케이드 앞에서 배영훈 대위와 반대편 군인이 이야기를 나눈다. 다가감에 따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두 사람은 실랑이 중이었다.

“태사 각하의 명령입니다. 즉각 길을 비키고 무장해제에 응하십시오.”

배영훈 대위를 상대하는 군인은 소령이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난 여기 사수하라는 문하시중 각하의 명을 받았어. 너, 직속 상관이 누구야?”

“태사 각하십니다. 이 이상 명령에 불복하면…… 사살하겠다.”

“뭐? 뭐 이딴……”

소령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정말로 권총을 들이대는 대위를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다.

평소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겠지. 하지만 내전도 전쟁임을 깨닫지 못한 자가 어리석은 것이다.

이등병이 적의 별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는, 고통 없이 죽여 주는 것뿐이다.

소령은 선택해야 했다. 무장해제 및 전역인지, 사살로 끝나는 삶인지.

그런 고민을 하는 중에, 태사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기품 있는 얼굴의 대원수가 그를 바라본다.

“비켜라, 소령. 대위의 지시를 따르는 게 불만이라면 대원수의 명령은 상관없겠지?”

소령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망설임과 갈등……의 낌새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건 리안이 예상한 종류의 망설임이 아니었다.

옆에 따라온 효윤 역시 소령이 길을 비킬까 말까로 고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총성이 울렸다.

급히 꺼낸 박도에 잠깐 불꽃만 튀기고, 탄환은 땅바닥에 박혀 버렸다.

권총을 빼 들었던 소령은, 눈앞의 박도가 천천히 내려가고, 그 너머로 태사의 얼굴이 드러나는 걸 보았다.

눈과 눈썹은 저럴 수 있나 싶게 치켜 올라갔다. 매끄럽고 가느다란 목에 힘줄이 일어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태사는 진노했다.

소령의 사고는 거기서 그쳤다. 대위의 총이 곧장 소령의 머리를 날려 버렸기에.

리안은 턱짓을 했다.

“일단 총 들고 있으면 전부 죽여. 방화 외 모든 파괴 행위를 허용한다.”

배영훈은 중위 하나를 불러 ‘사령부’로 보내고, 중대에 사격을 지시했다. 본격적인 황궁 돌입 작전의 시작이었다.

허동주 측 병사들은 같은 군복을 입은 자들이 정말로 쏘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허둥대다 피를 뿜으며 죽었다.

리안도 허동주를 보자마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뒀으니, 반대편도 리안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뒀을 수는 있다.

그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했다. 태사를 사살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겠지.

그렇지만, 리안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감히 내 얼굴에 총을 겨눠?

리안은 죄 없는 하급자들은 살려 준다는 선택지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전부 죽이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이제 없다.

사단들이 움직였다. 기관총이 아름다운 성벽의 표면에 흉터를 새겼다. 박격포가 금빛 기와를 뜯어먹었다.

충분히 제압했다고 판단될 때까지, ‘사령부’는 화력을 쏟아부었다.

병사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전진했다.

아군이 충분히 황궁 안으로 진입했다 생각됐을 때, 리안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엄천문을 통과하며, 리안은 한 시신을 내려다봤다.

돌벽에 핏자국을 길게 남긴 시신. 핏물 가득한 고기 같은 몰골이다. 얼굴은……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 리안의 또래 징집병이다.

리안은 눈을 돌리고 동정심을 지웠다.

대신 피비린내를 한껏 들이마시고, 처참한 비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예우였다.

지옥이 퍼져 나가는 황궁을 거닐며, 리안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어제 비가 내려서인지 오늘은 맑았다.

어딘가에서 누가 대검을 맞는지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안은 왼손을 들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까이 있던 중령 하나가 눈치껏 달려왔다.

“태사부 장악에 있어선 지하를 우선하도록. 그다음으로 관료들을 최대한 확보하고, 순순히 지시에 응한다면 살려서 데려와라.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

명령을 마친 리안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천문으로부터 수백 미터 앞에는 드높이 솟은 정전(正殿)인 자운전(紫雲殿)이 있다. 하지만 그 웅장한 모습은 지금 보이지 않는다.

엄천문과 자운전 사이에 태사부가 자리해 시야를 막기 때문이다.

선대 태사 미승휴는, 이러한 건물 배치는 어디까지나 섭정을 위한 임시 배치고, 황제가 돌아오면 철거할 것이라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 있다 해도 리안은 꽤 건방진 배치라고 생각했다.

-백부님, 그렇다면 중서문하성은 왜 궁 밖으로 쫓아내셨나요?

태사부 건물을 올려다봤다. 이따금 총성이 들려왔다. 여기에도 군인들이 쓰러져 있다. 어쩌면 리안의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청년의 시신. 팔다리를 엉망으로 비튼 채 널브러졌다. 눈을 뜬 채 죽었다.

리안은 눈을 감겨 주지 않았다.

효윤이 물었다.

“지하라고 하시면…… 지하철 비밀 노선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래. 만약 저 안에 허동주가 있다면 거기로 도망치기 전에 잡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생각이 옮겨 갔다.

이를테면 폭약을 가득 실은 열차를 지하에서 터뜨리는 방식으로 공격해 온다든가…….

그런 공격으로 태사부 건물이 얼마나 피해를 볼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지.

“태사부가 제압되면 지하철부터 폐쇄해야겠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사부의 안쪽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폭발음이 귀를 때렸다. 기둥들이 쩍쩍 갈라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굉음과 함께 건물이 주저앉았다.

“뭣…….”

놀랄 일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건물 잔해가 들썩였다. 불안해할 틈도 주지 않고 흙과 돌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며, 불길이 치솟았다.

“……그래, 어쩐지 너무 순조롭다 했지.”

상대는 허동주. 산과 들을 헤매며 태평천국군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 귀재였던 인간이다.

리안의 기습에 한두 방 먹을 순 있어도, 계속해서 두들겨 맞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제 시작인가…….”

허동주는 빠져나갔다. 아쉬워할 시간은 없었다. 다음 단계를 생각해야 했다.

***

루우는 리안의 메시지를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전하러 떠났다.

황궁, 세린전(洗鱗殿)의 한 방에 견하를 눕혀 두고, 효윤은 그 곁을 지켰다. 리안은 조금 전에 옆방에서 겨우 잠들었다.

효윤에게도 피곤한 하루였기에, 꾸벅꾸벅, 잠이 온다.

“잠깐은 자도…… 괜찮겠지.”

***

희미한 빛이 의식을 잠에서 건져 올렸다. 눈을 떴다.

아침일까…….

두 손에 닿는 단단한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단번에 잠에서 깨어났다. 견하의 가슴팍이었다.

안겨 있나?

눈을 들자 소년의 목울대와 턱이 보였다. 이마에 숨결이 닿고 있었다. 한번 숨결을 의식하니까 이젠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게 된다.

온몸이 빨갛게 익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일어나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자, 발뒤꿈치에 소년의 발뒤꿈치가 닿았다. 종아리도 닿았다. 피부가 서늘해서 기분 좋았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속눈썹 끝에 맺힌 햇빛에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정신이 점점 또렷해지고 당혹감이 퍼져 간다. 비명을 지르거나 하진 않았지만, 얼굴을 계속 볼 수가 없었다.

간신히 진정됐다는 생각이 들자, 흘끔 올려다봤다. 왠지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도 잠을 자는 소년의 얼굴이, 그 미소에 가벼운 우울감을 깃들게 했다.

“어서 일어나서 뭐라도 한마디 해 줬으면 좋겠는데…….”

자기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다가, 퍼뜩 놀라 도로 거뒀다. 부끄러움 이전에, 감히 만질 수가 없었다.

소년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일어난다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 바로 안방으로 가서 너희 부모님을 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소년의 감긴 눈. 눈가에 맺힌 눈물이 가엾다. 가슴이 아프다.

소녀는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소년의 머리칼을 한 번 쓸었다.

효윤은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분명 걸터앉기만 했는데…….”

깨어나니 왜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었는지, 설마 내가 끌어당긴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마. 저 애 쪽에서 끌어당겼겠지. 무의식중에 의지할 온기가 필요했다거나 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나는 왜 끌어당기는 동안 아무것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중장.”

놀란 고양이처럼 허리가 뻣뻣하게 섰다. 돌아보자 방금 짧은 수면을 마친 태사 미리안이 보였다.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견하가 누운 침대 가까이 걸어왔다. 블라우스 아래로, 발가락 끝까지 시원하게 뻗은 하얀 다리가 부드럽게 교차했다.

그녀가 그렇게 서 있으면, 견하가 혹시라도 깨어났을 때 연둣빛 팬티를 보게 되겠지. 효윤은 그 부분은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중장이라니…… 아직도 어색하네요.”

리안은 황궁이 완전히 장악되자마자 효윤을 비롯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계급을 높여줬다.

지휘하는 부대도 하나 없고, 정식으로 사관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순전히 리안과 격을 맞추기 위한 명예 계급…… 역시 ‘장군’이라는 거창한 울림은 부담스러웠다.

중장이 아니라 ‘중위’였어도 ‘감히’ 그녀에게 상급자 행세를 하려 들 장군은 없을 텐데.

“공석이 났으니 누군가는 채워야지. 그리고 너만 진급한 것도 아니고.”

리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대령이 돼야 할 사람이 잠만 자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