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 혁명(2)
모두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앞부분이 지나가긴 했지만, 대충 내용은 파악할 수 있었다.
[……태사 각하께선 현재 테러리스트들의 추가 공격을 피해 경호를 강화한 비밀 시설에 계신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후 태사부에서 새로운 소식이 나오는 대로……]
허동주가 장악한 방송에서 저런 내용이 나온다면, 허동주는 아직은 ‘원만한’ 정권 교체 욕심을 버리지 않은 것 같다.
두 번의 암살 실패는 허동주의 의욕을 꺾었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고민하게 했든지, 어쨌든 그의 선택지를 상당히 줄여 낸 것이다.
리안은 눈을 감았다.
반반.
리안이 목숨을 부지하기엔 알맞은 숫자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허동주에게도 충분한 숫자다.
리안이 지닌 절반 중에서도 혹시 모를 배신을 생각하면, 허동주를 단숨에 꺾기엔 너무 적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제 내전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뜻이다.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류성일이 알려 준 역사대로라면, 제3제국은 내전의 불씨를 19년간 어영부영 덮어 둔 나라였으니까.
올 것이, 리안의 시대에 왔을 뿐이다.
그래도 최대한 피해 보려고 노력은 해야 한다. 끝내 피할 수 없어도, 이쪽이 확실히 유리해질 때까지는 피해야 한다.
스칠 듯 말 듯 절묘한 춤사위로 이 위태로운 길을 지나야 한다.
리안은 감았던 눈을 떴다.
“옥석을 가리려면 옥석을 굴려야겠지.”
일단 행동에 나서면 누구든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중에는 허동주 쪽에 붙기로 마음을 굳히는 이들도 있겠지.
하지만 어영부영 이편에 끌려오는 사람도 나온다. 당겨 버린 방아쇠는 번복할 수 없으니까.
“대령, 루우, 무기 꺼내.”
효윤은 즉시 박도를 꺼냈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루우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한 박자 늦게 언월도를 꺼냈다.
소녀들이 공간을 가르고 꺼낸 무시무시한 냉병기를 본 김천열의 눈이 커졌다.
“장군, 즉시 충성파 사단장들에게 연락 취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태사부, 황궁과 주변 도로를 장악한다. 방송 시설은 태사부에도 따로 마련된 게 있으니까, 허동주가 장악한 방송국까지 무리해서 빼앗을 필요는 없어.
그보다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면서 황궁을 중심으로 한 시가전을 준비한다. 신중함보다는 기동성을 요한다.”
김천열은 일어서서 경례를 올렸다. 그런 그를 보며 리안은 덧붙였다.
“다들 당신이 들고 온 소식만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건 알아. 그러니 세부 사항은 알아서들 분담하겠지. 장군은 나와 같이 간다.”
인질이 되었군. 김천열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태사가 한 개 사단은 장악한 셈이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나를 골라 보냈나…….
그는 돌아가면 한바탕 몽니를 부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효윤이 준비한 제복을 리안에게 내밀었다.
검은 정복의 어깨 위, 붉은색과 금색으로, 별 여섯의 대원수 견장이 반짝였다.
긴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누르며 리안은 모자를 썼다. 챙 아래, 그림자에 잠긴 눈이 번뜩였다.
“중대장!”
노성에 가까운 부름에 대위는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경례를 올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리안의 명령을 받았다.
“즉시 모든 장비를 챙기고 이동한다. 목표는 황궁. 그중에서도 태사부다. 중대에는 교전을 각오하라고 해. 너는 지금부터 네 직속상관이 아니라 내 명령만 받는다. 네 부대가 선봉이다.”
굳어 버린 대위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대신, 태사는 상황을 분명하게 요약했다.
“친위 혁명이다.”
그제야 대위는 발뒤꿈치를 딱 소리 나게 부딪치며 경례를 올리고 뛰쳐나갔다.
리안은 견하의 얼굴을 돌아봤다가, 다시 루우에게 눈길을 주었다.
“루우, 장소를 변경하지. 내일 황궁의 태사부 응접실이다. 그리고 너도 나와 같이 간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이라고 덧붙이려다 리안은 말을 삼켰다. 지금 태사가 실패를 생각해선 안 된다.
루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석 같은 사람이야.”
“칭찬인가?”
루우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답했다.
“사람을 막 부려먹는 사람.”
***
황궁은 고려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따랐지만, 언젠가 도시를 뒤덮을 마천루에 뒤지지 않게, 한껏 높이를 올렸다.
황궁의 정면에는 성곽 길이와 비슷한 폭의, 넓은 광장이 들어섰다. 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관청 건물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늘어섰다. 발해의 상경성에서 도시의 중심을 이루던 주작대로를 본뜬 것이다.
기와와 복층 구조를 조화시키려 한 결과, 관청들은 불탑을 널찍하게 늘린 모양이 됐다. 이 관청들 뒤로 현대적 건물들이 동서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섰다.
선대 태사 미승휴의 강력한 의지는, 원래 소도시였던 이곳을 완벽한 계획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전쟁터가 되면서 완전히 파괴된 탓에, 고대 광개토왕의 위대한 업적이 이루어졌던 요동성 일대는 거주지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눈 뜨고 보기 힘든 참상이었으나, 새로운 시작에 알맞은 모습이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전쟁을 이겨 내고 남은 고대 성벽과 유적을 보존해야 한다고 탄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새 수도 건설이라는 명분에 묻혀 버렸다.
고대 도시는 유물 몇 점을 박물관에 남겨 둔 채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백부의 유산 위를, 리안의 부대가 질주했다.
김천열과 함께 탄 차의 덜컹거림이, 마치 그 유산의 결을 만지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김천열이 배신하고 도망칠 낌새면 죽여라. 효윤에게는 미리 그런 명령을 내렸다.
문제는 루우라는 변수다. 리안의 부하도 아닌 그녀에게 황궁 돌입에 앞장서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대신 리안은 이렇게 부탁했다.
“견하 군이 인질이 되지 않도록 지켜 줄 순 없을까.”
루우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가,
“딱히 빚을 진 건 아니지만.”
이라고 중얼거리며 리안의 부탁을 수락했다.
효윤은 리안의 경호와 김천열의 감시에 전념해야 하는 만큼, 교전이 벌어진다 해도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중대장 배영훈이 황궁 돌입을 잘해 주거나, 아예 교전 없이 황궁을 장악해야 했다.
차가 멈췄다. 리안은 차에서 내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드높은 황궁의 정문, 엄천문(嚴天門)이 눈앞에 있다.
엄천문 앞에는 간이 초소와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저곳의 책임자는 허동주에게 얼마만큼 충성할까.
트럭들이 병사들을 뱉어냈다. 그 광경을 보는 바리케이드 너머 군인들은 불안해 보였다.
리안은 좌우를 죽 둘러봤다.
전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명령한 사단 병력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 너머의 병력과 대치하는 진지를 구축했다.
대부분은 그냥 보병이지만, 기관총이나 박격포 정도의 무장은 갖추었고, 신형 전차도 몇 대 보인다.
태사의 도착을 알아챈 사단장 몇몇이 다가와 경례를 올렸다. 리안이 경례를 받아 주자 사단장들은 김천열과 대화를 나눴다.
“욕봤구만.”
“형님 술 한잔 꼭 사십쇼.”
“그래야지. ……어차피 이 일 끝나면 축배든 애도주든 들어야겠지만.”
김천열은 쓰게 웃었다.
패배하면 더러운 꼴, 험한 꼴 보기 전에 자결주를 들어야 할 터였다. 승리하면 모두 함께 진급과 출세, 부귀와 영화를 노래하며 축배를 들어야겠지.
그리고 줄을 잘못 섰을 뿐인, 딱히 악감정은 없는 선배, 후배, 동기들의 최후를 애도해야 할 것이다. 태사가 그런 걸 용납해 준다면.
김천열은 선후배 사단장들과 함께 임시로 창설한, 이른바 ‘사령부’로 들어갔다. 태사가 자신의 행동을 ‘친위 혁명’으로 규정했으니, 곧 ‘혁명 사령부’ 같은 이름이 붙겠지.
기존의 ‘황성방위군 사령부’는 이미 기능을 잃었다.
자신이 태사 미리안을 만나러 간 사이, 동지들도 결국 태사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하지만 이는 좋게 포장해야 ‘충심’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타성’이다.
지난 대전으로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귀족의 후예다. 즉 혈통이 자격을 증명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허동주에 대한 반감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저 습관처럼, 미승휴의 조카 미리안을 고른 것이다.
“거, 슬슬 돌입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입을 열자 또 다른 누군가가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섣불리 돌입하다가 고위급 인사라도 죽으면 골치 아파져. 저기 보이는 중서문하성 청사를 뒤져 봤는데 장관 한 명 안 나왔어.”
“그렇다는 건…….”
“각자 집에 숨었거나, 허동주가 붙잡고 태사부에서 농성 중이거나 그렇겠지.”
“그래도 대치가 오래될수록 상황이 나빠질 걸세.”
“병력은 전부 시내로 진입한 거요?”
“사단별로 사정이 다릅니다. 다 진입해서 도로와 관공서 장악에 나선 사단도 있지만, 허동주 쪽 사단이 움직여서 진입을 가로막은 곳도 있습니다.”
“보급이 걱정이구만.”
“교전은 없었나?”
“일단은 대치만 하고 있다네.”
“당장은 비축 물자로 어떻게든 하겠지만…….”
“다행히 동명역은 일단 장악했네. 허동주 쪽에서 철로를 끊어 버리면 아무 소용 없지만.”
바삐 정보가 오가는 중에, 김천열은 홀로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단장 중 하나가 그런 김천열의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건넸다.
“김 장군도 한 말씀 해보시게.”
“……이거, 누가 내전의 방아쇠를 당길 겁니까.”
모두가 꺼내기 두려워하던 이야기다.
다들 ‘최후의 여지’는 남겨 놓고 싶어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협박당해서 가담했다’, 같은 변명을 늘어놓을 기회는 포기하기 어려웠다.
방아쇠를 당긴 자는 이른바 ‘적극 가담자’가 되어, 살아남을 약간의 가능성마저 봉쇄당한다.
김천열은 소위 ‘사내의 기개’를 믿는 부류는 아니다. 하지만, 망설이는 모양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만약’을 생각하는가? 자기들 나이의 반도 안 되는 계집애는 모든 걸 걸었는데?
그때, 모두의 고민을 날려 줄 고마운 소리가 들렸다. 한 발의 총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