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위 혁명(1)
리안은 ‘루우’라는 소녀의 얼굴을 보며, 잠깐 혼란을 느꼈다.
뭐지? 이 시점에? 먼저 접촉을 해 왔다? 의도는? 왜 이런 어린애가? 얕보는 건가, 아니면 외양과 달리 중요한 사람인가? 어떤 메시지를 가져왔지?
극히 짧은 순간에 생각을 정리하고, 리안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루우라는 소녀는 손을 맞잡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향해 눈을 돌렸다.
리안도 그런 루우를 탓하지 않았다.
루우의 뒤에 있던 괴한의 시체가 심하게 꿈틀대더니, 하얀 덩어리를 토해냈기 때문이다.
하얀 덩어리는 길고, 매끈했다. 괴한의 혈액이 표면에 묻어, 마치 갓 태어난 아이 같은 몰골이 된 ‘그것’은, 몸……이라고 불릴 만한 신체 부위를 꼿꼿하게 세웠다.
천장에 닿을 듯 거대했다.
그것은 자신을 노려보는 다섯 사람을 관찰하듯, 몸을 흔들었다. 얼굴이라고 불릴 만한 신체 기관이 없음에도, ‘그것’이 포효했음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꼈다.
리안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냥감이 된 약한 생물의 직감이었다.
저것은, 나를 먹이로 정했구나.
암살자에 이어 괴물이라니,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일이.
태사, 리안은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는 지휘관이다. 최전선의 충돌은 그녀의 군인들이 걱정할 일이지 그녀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녀 자신이 흔들리거나 뒷걸음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리안은 눈을 크게 떴다.
“안 돼…….”
소녀, 루우를 옆으로 밀어낸 소년의 등이 눈앞에 보였다. 왜 이 소년은, 견하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짓만 하는지. 아무 힘도 없으면서.
하얀 괴물은 순식간에 가시를 잔뜩 세운 성게 같은 모양이 됐다.
아무 힘도 없이 무방비한 소년의 몸을, 하얀 촉수 십여 가닥이 꿰뚫었다.
***
양털 구름 같은 소년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미리안은 자신이 참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차가운 손을 쥐고 안타깝게 내려다보는 이 마음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 마음을 최대한 이용하자 생각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다.
리안은 침대에 누운 소년과 그를 간호하는 ‘상심한 표정의’ 자신을 기자들이 마음껏 카메라에 담아 가게 했다. 그게 신문에 실려 리안이 원하는 기능을 해 주길 바랐다.
견하는 루우와 리안을 걱정해서였는지, 아니면 적을 향한 증오였는지, 혹은…… 자살 시도였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하얀 괴물 앞을 막아섰었다.
그 결과 그는 온몸이 꿰뚫리는 중상을 입었다.
아니, 입었어야 했는데……
구멍은커녕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저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숨도 고르게 쉰다.
효윤과 루우는 견하가 공격받자마자 다시 무기를 꺼내 들고 하얀 괴물을 난도질했다.
토막 난 그 괴물은 반쯤은 바닥으로 스며들듯, 반쯤은 공중으로 증발하듯 사라졌다. 견하의 몸에 박혀 있던 촉수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그건 뭐였지…….”
분명 견하의 몸을 관통했는데 상처 하나 남지 않은 것 하며, 견하가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한 것까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식사, 하셔야죠.”
샤워를 마친 소녀의 향기가 등 뒤에서 물씬 풍겨 왔다. 효윤이었다.
만약 리안이 그냥 좋은 집 아가씨였다면 입맛 없다고 물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리안은 그럴 처지가 아니다.
잔뜩 긴장한 몸은 영양분을 요구했다. 또다시 몸을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재빠른 사고를 할 수 있게 뇌도 준비시켜야 했다. 식사는 의무였다.
그녀의 별장이나 다름없는, 이름만 기숙사인 이 건물은 화려하긴 해도 갑자기 주인을 맞이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음식 재료도, 요리해 줄 사람도 없었기에 리안은 효윤이 가져온 전투식량을 먹었다.
건물 주변은 류성일이 옛 동지에게 연락해 차출한 중대가 경호했다. 비닐 팩에 든 전투식량은 그들에게서 얻은 것이다.
뜨거운 물을 넣고 불린 비빔밥. 여전히 건조됐을 때의 느낌이 남아 식감이 좋지 않다. 매운 소스도 고추장보다는 남아시아의 향신료에 가까운 향이 났다.
그래도 리안은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녀와 마주 보며 효윤과 루우도 밥을 먹었다.
아까 같은 일을 겪고, 옆에는 깨어나지 않는 소년을 둔 채, 의문의 소녀와 함께 하는 식사.
기묘한 광경이다.
“‘루우’라는 이름, 몽골계인가?”
반쯤은 어색함을 피하려고, 또 반쯤은 정보를 얻으려고 리안은 질문을 던졌다.
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눈이 거의 깜박이지 않고 똑바로 리안을 응시했다.
“그럼 성은 어떻게 되지?”
루우는 침묵했다. 이 이상 신상 정보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다.
리안은 슬며시 웃으며 이거 실례, 라 말했다. 그리고 질문을 바꿨다.
“그쪽에서 보낸 메시지는 뭐지?”
즉답이 돌아왔다.
“주석이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 해. 상황이 급변하니 손을 잡아야 한다고 전하랬어.”
“……좋아. 이쪽도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고, 바라는 바야. 그런데 회담에 적합한 시간과 장소를……”
“내일.”
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일?”
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우의 눈동자가 꽤 밝은 갈색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리안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도 허동주의 눈과 귀를 피할 필요가 있는데.”
“주석은, 그런 걸 따지기엔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어.”
리안은 숟가락을 놓고,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말은 맞는 말이다. 허동주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움직일지, 불안 요소가 가득했다.
내일도 늦은 것일 수 있다.
시간은 저쪽에서 정했으니 장소는 이쪽이 정한다. 리안은 말했다.
“그래. 내일. 장소는 여기. 그런데 어떻게 그 ‘주석’이라는 사람과 연락을 취하지?”
이번 질문에도 루우는 침묵했다. 리안은 짧게 웃었다.
“연락을 취할 수단은 있지만 그걸 이쪽에 알려 줄 의무는 없다는 거군. 알았어. 밥이나 마저 먹지.”
한동안 방 안에는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리안의 전투식량 비닐 팩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건물 밖에서 누군가 경례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의 기숙사를 경호하는 중대장의 목소리였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가볍게 문을 두드린다. 리안은 입가를 닦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각하, 중대장입니다.”
“들어오게, 대위.”
이제 갓 서른이 된 남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경례를 올렸다. 리안이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웠기에 구호는 재빨리 삼켰다.
방 안에 중대장보다 연상은 없었지만, 상급자는 둘이나 있다. 그만큼 대위의 경례도 절도가 있었다.
게다가 그 상급자 중 하나는 별을 여섯 개나 주렁주렁 단 대원수다. 출세와 전역의 가느다란 경계 위에서 대위의 승모근은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효율을 중시한다. 그렇게까지 긴장할 건 없어.”
“옛. ……그, 류성일 총장과 저희 사단장이 뵙기를 청합니다.”
리안은 끄덕였다. 다시 경례하고 물러나는 대위에게 마주 경례해 주다가, 리안은 그를 불러 세웠다.
“아, 대위.”
“대위 배영훈.”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대위도 이미 정치 싸움에 올라탄 거야. 돌아갈 길은 없어.”
회사원 같은 이름의 대위는 얼굴에 피를 올려보내지 못했다. 굳은 표정을 간신히 군인다운 엄숙함으로 포장했다.
리안은 쐐기를 박았다.
“문하시중 허동주가 와서 문병이니 알현이니 지껄이면 즉시 사살하도록. 그자가 여기까지 오진 않겠지만. 다시 말하는데, 체포가 아니라 사살이다.”
“옛!”
“가 봐.”
혹시라도 중대장이 배신할 가능성은 이걸로 다소 줄었다.
기껏해야 소령 진급의 동아줄을 잡으려 분투하는 게 정치의 전부인 인간에게, 저 아득한 위쪽의 권력 다툼은 계산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마 이제 어떻게 미리안의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고뇌하겠지.
류성일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단장이 들어오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리안은 다른 생각에 잠겼다.
사단장이라……. 적어도 동명시 인근의 사단장들 추세 정도는 이 사람을 통해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자도 이쪽의 생각을 읽어 갈 목적으로 찾아왔겠지.
류성일이 들어왔고, 뒤이어 그의 옛 동지라는 사단장도 들어왔다. 경례가 오갔다. 리안은 사단장에게 의자를 권했다.
류성일이 김천열을 리안에게 소개한다. 김철열은 사자의 갈기 같은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남자다.
“제가 선대를 모시던 시절 동지였던 김천열 소장입니다. 고맙게도 선뜻 경호 요청에 응해 주었습니다.”
리안은 김천열을 치하했다. 선뜻 응했는지 류성일이 애걸복걸한 끝에 응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천열은 적어도 견하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을 정도의 진중함은 갖춘 인물이었다.
“장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동명시 주변 부대들 가운데 ‘충성파’는 얼마나 되지?”
김천열은 단단해 보이는 턱에 더욱 힘을 줬다.
“사안이 시급한 만큼 다소 격식에 어긋나는 표현이 있어도 용서해 주십시오. 반반입니다.”
“반이라.”
생각했던 것보다는 낫다. 안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정적인 전망을 어느 정도 씻어 내기엔 충분한 수치였다.
김천열이라는 인간이 생긴 것과 다르게 아첨꾼이거나 첩자가 아니라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충성파는 대략 어떤 사람들이고, 반역파는 어떤 자들이지?”
“나이 차는 얼마 나지 않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충성파 쪽의 평균연령이 더 높습니다. 충성파는 상당수가 지난 세계대전 전 귀족 가문 출신들이고, 따라서 허동주의 출신 성분에 불만이 많습니다. 벼락출세한 부사관 출신 원수에게 충성할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반역파는?”
“대전 이후 출세한 자들입니다. 허동주 밑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해 보려는 욕심이 가득합니다. 전반적으로 호전적인 인사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건 좋지 않았다. 호전적인 자들이 반드시 유능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전술적 역량에 자신 있는 자들일 터.
그에 반해 귀족의 권위를 앞세운 이들은 현상 유지만을 바라는, 그냥 나이만 먹은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편견으로, 호전적인 자들은 경솔하기 짝이 없고 귀족 집안 출신들이 신중한 전술을 펼칠 수도 있다.
문제는 실제로 붙어 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거지.
리안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각 사단장은 자기 부대를 얼마나 장악했지? 병사들 분위기는 어떻고?”
김천열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람되지만 반역파에 비하면 확실하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제 부대에 한정해서 말씀드리자면, 젊은 축일수록 내심 허동주에게 공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아직은 한창 망설이고들 있지 않나?”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일단 태사께 충성을 맹세한 데다, 아직 허동주가 뭔가 행동을 보인 건 아니니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김천열의 말에 류성일이 한숨 쉬듯 소감을 덧붙였다.
“뒤섞인 옥석이라. 가려낼 여유는 없겠지.”
여유가 없다면 행동에 나서야 한다. 행동에 나서기 전에는 정보가 필요하다. 리안은 효윤을 보며 말했다.
“대령, 라디오 틀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