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4)
잠이 오지 않는 새벽, 한재연은 곤혹스러워하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무 과했을까? 견하는 무슨 단체인지도 잘 모르던데…….’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견하는 천손민족협회 활동에 큰 흥미를 못 느꼈을 수 있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라고 다른 사람도 관심을 주리라 생각한 건, 큰 실례였다.
‘내일 사과해야겠다…….’
아무나 붙잡고 하는 가입 권유라면, 거절당해도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견하는 ‘아무나’가 아니다.
재연은 손에 쥔 완장을 만지작거렸다.
완장의 세 발 까마귀는 요즘 재연이 몰두하는 일을 상징했다.
재연은 그 일에 견하도 함께하길 바랐다. 그가 같은 완장을 차도록 자신이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 그가 자신의 힘이 됐던 것처럼.
오랫동안 군인이었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는 전역 후 한 중소기업의 고문이 됐다. 그는 퇴근 후에도 아들 재연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안방으로 들어갔다.
재연도 그 무뚝뚝함을 뒤로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요즘 부자간 소통은 그것뿐이었다.
재연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부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아들을 사랑했다.
어느 부모나 자식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품는다. 하지만, 재연의 아버지는 그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몰랐다. 그럴 때 실망을 감추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런 점이 군대나 직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부자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재연이 시에 몰두할 때, 아버지는 아들의 취미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실망감을 감추지도 않았다.
“……이런 것보다는 좀 더 사내다운 취미를 갖는 게 어떠냐.”
그 후로 재연은 아버지에게 그 어떤 유대감도 느끼지 못했다.
재연은 고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정신적 버팀목’을 발견했다. 소설책을 읽던 그 소년의 이름은 ‘주견하’라고 했다.
첫 대화는 의례적이었다. 서로 읽던 책이 무슨 책인지 물어보고, 간단히 답해 주던 대화.
하지만 재연은 그 대화를 특별하게 기억했다.
견하는 시보단 소설을 더 좋아했지만, 재연이 빌려준 시집은 반드시 꼼꼼하게 읽었다. 그리고 감상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연은 그 성실함이 좋았다. 재연도 견하의 책을 빌려 읽었다. 재연에겐 처음으로, ‘글에 대한 감상’을 나눌 친구가 생겼다.
견하는 아버지가 해 주지 못한 ‘정신적 유대’를 충족해 준 사람이었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와의 대화, 특히 자신의 세계에 너무 깊이 들어오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존중’하는 대화는 이제까지 없던 행복이었다.
재연은 견하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지식을 탐구했다. 역사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지나간 역사에서 행동의 이유를 찾고, 앞으로 올 역사를 제시하는 천손민족협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재연은 천손민족협회 활동에 빠져들었다.
물론 지식 욕구만이 동기는 아니었다. 한재연은 여전히 아버지를 의식했다. 천손민족협회가 지급하는 제복, 조직과 규칙은 군사 집단에 버금갔다. 재연은 여기서 아버지가 만족할 ‘사내다운’ 모습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허동주의 저서를 읽고 해석하는 이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다른 애들이 부모가 시켰거나, 멋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서 협회에 들어온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재연은 조직의 구성을 이해하고, 처음 맡은 소규모 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미소년에 침착한 성격이라 모두의 호감을 얻은 덕분이었다.
“견하도 왔으면 좋겠는데.”
견하의 해석이 듣고 싶다. 견하는 내 이론을 어떻게 평가해 줄까? 견하는 문하시중 허동주의 책을 어떻게 읽고, 어떤 해석을 할까? 공동 작업도 할 수 있을까?
함께 조를 이끌었으면 좋겠다. 조장 자리야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그래, 사과부터 하자.”
천천히 권해 보자. 아직 1학기 초고, 여름방학까지 잡더라도 시간은 많다.
재연은 고양이를 쓰다듬듯 완장을 쓸었다.
***
리안과 효윤, 견하는 다행스럽게도 별문제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1대학교 정문.
리안은 심호흡했다.
“가자.”
성문처럼 높게 솟은 문을 지났다.
경비원이 리안을 알아봤는지 일어나 경례를 했다. 리안은 오른손을 들어 답례했다.
이제 경비원은 누군가에게 우리에 대해 보고할 것이다. 그 누군가가 우리 편일까, 허동주일까.
걸음이 빨라진다.
“어디로 가시는 거죠?”
견하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리안은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효윤도 마찬가지였다.
견하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리안에 대한 원망도, 부모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살인자들에 대한 분노도.
리안은 짧게 답했다.
“총장실.”
본관 건물로 직행해, 계단을 올라 5층의 총장실로 향했다.
거대한 문 앞에 서, 리안은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홀처럼 확 트인 공간 가운데, 한 노인이 있다.
금테 안경을 쓴 노인의 얼굴은 흰 머리칼과 수염으로 덮였다. 몸은 몹시 말랐다. 하지만 기력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서 옛 동지의 조카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류성일 총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이라면 학교로 오시지 않을까 했지요.”
방 한 귀퉁이의 소파를 보니 담요가 놓여 있었다. 늙은 학자는 여기서 밤을 지새운 듯했다.
어떻게, 라는 얼굴로 리안이 바라보자 류성일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은퇴했어도, 제3제국의 체제를 고안한 몸입니다. 그 정도 통찰은 할 수 있지요. 자, 앉으세요.”
류성일은 리안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자신은 옆에 앉았다. 효윤과 견하는 류성일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최효윤 양은 몇 번 본 적 있습니다만, 이쪽 남학생은……?”
리안이 대신 소개했다.
“주견하라고 해요.”
잠깐 주저한 뒤, 리안은 새벽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류성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말 유감일세. 마음 단단히 먹게.”
견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안은 일단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22고 학생인데, 제1고로 전학시키고 기숙사도 배정해 주셨으면 해요. ‘태사의 수행원에게 어울리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보다도…… 태사 각하의 ‘믿을 만한 아군’은 이 방에 있는 사람이 전부입니까?”
리안은 깨끗하게 인정했다.
“네.”
더 확보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려 봤자, 보기 싫은 현실에서 눈 돌리는 짓일 뿐이다. 여기서는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다음 행보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조언자도 ‘최악의 상황’에 맞는 ‘최선의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총장님 말씀대로, 제3제국 체제를 고안한 분이라면 타개책이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어요.”
“저는 선대께서 은퇴 선물로 주신 대학 총장 자리 하나 겨우 지키는 늙은이입니다. 좋은 타개책이 있다고 말씀드리긴 어렵겠습니다만…….”
리안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류성일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줘야 했다.
노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눈이 번뜩이며 견하를 향한다. 견하는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놀라운 눈빛이다.
“각하, 무기를 꺼내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물론.”
간격도 흔들림도 없는 즉답.
류성일은 품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역적들이 그렇게 빨리 추격해 온다면, 여기서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권총을 내려다보던 류성일은 효윤을 향해 말했다.
“습격에 대비하게.”
효윤이 끄덕이자 류성일은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고안한 제3제국 체제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이 체제는 과거에 묶여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이런 체제가 나올 수밖에 없었죠. 따라서 ‘타개책’도, 역사를 알아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
24년 전인 1905년 11월 17일 새벽. 그날, 태평천국의 폭격과 함께, 아시아에서도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평양 시민들은 잠자리에서, 황해를 건넌 비행선과 폭격기가 뿌리는 폭탄을 맞았다.
잠든 채 죽은 이는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호흡기가 녹아내리고 살이 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평양 외곽의 부대에 근무하던 대령 류성일은, 불타는 수도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부대원 전부 깨워! 민간인들을 구출한다!”
류성일이 부하들을 이끌고 수도로 진입할 때,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류성일은 그들을 트럭에 태우려고 접근했다. 그때, 하늘에서 다시 한번 불이 쏟아졌다.
“다들 엄폐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마어마한 열기가 등줄기를 덮친다.
불이 지나가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시민들은 녹아서 뒤엉킨 검은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제야 더 먼 곳에서 불타는 피부를 어쩌지 못하고 비명만 내지르는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비명이 무수히 겹치니 흐느낌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지옥이었다.
어떤 미친 화가가 그 광경을 봤다면 자기가 그린 지옥도는 찢어 버렸으리라.
류성일은 황궁 쪽으로 가려 했다.
“열기 때문에 더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불길 속에 갇히셨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제국의 군인인가!”
“폐하를 구하기 전에 부하들이 죽습니다!”
‘부하들’이라는 말에 류성일은 멈칫했다. 이미 황제는 죽고, 부하들의 희생만 강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더라면…….
황제는 폭격 직후 붕어했다고 전해지지만, 진실은 모른다. 그저 노병의 회한만이 24년이 지난 오늘도 되풀이될 뿐.
평양 폭격은 시험 단계였던 ‘항공기’의 첫 군사적 운용 사례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로서는 최악의 사례였다.
태평천국군은 원래 산동에서 출발, 육군이 대동강 하구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후 평양까지 전진, 포위할 계획이었다. 고구려를 침략할 때나 정묘한란(丁卯漢亂) 때 쓰인 고전적 전략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제안을 했다.
-이단의 초능력을 항공 기술에 접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기술 혁신이 이뤄졌다. 이단이 보조 조종사로 탑승, 초능력으로 비행을 보조하면서, 항공기의 항속거리가 크게 늘었다. 이렇게 개량된 공군을 바탕으로 작전이 다시 짜였다.
-평양을 직접 타격한다. 고려군의 지휘부 자체를 소멸시킨다.
작전이 성공하자 태평천국의 수도, 응천에선 축배를 들었다던가.
***
노인의 눈은 과거의 지옥을 헤맨다. 마치 그 자리를 찍은 기록 영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태평천국은 고려는 어차피 소멸할 나라, 협정을 맺을 정부는 필요 없다, 전부 쓸어 버려라, 라면서 고려를 완전히 없앨 셈이었습니다.”
평양 폭격은, 태평천국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을 낳았다. 그래서 태평천국의 예상 이상으로 고려인들은 단결, 저항했다.
억울하게 죽은 황실과 평양 시민들의 복수를 하자.
그런 구호로 뭉친 사람들은, 고려의 3대 저항 세력으로 거듭났다.
서부 국경의 육군 중사에 불과했으나, 패주하는 부대를 수습, 세력을 키워 군벌이 된 ‘살무사 중사’ 허동주.
발해의 옛 수도인 상경에서 관료 집단을 수습, 신병을 긁어모아 전선으로 보내고, 남은 산업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다른 저항 세력을 지원한 태사 미승휴.
“그리고…… 대동강 이남에는 개혁파 정치가들이 이끄는 세 번째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려민국 임시정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