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6화 (6/541)

계기(3)

잠이 오지 않는다.

딱딱한 바닥에 누운 탓만은 아니다.

10대 소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배 위에 또래 소녀가 다리를 올렸다면 잠들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그 다리는 치마 아래로 내놓은 맨다리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잠이 안 온다면 차라리 두 눈 뜨고 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하지만 효윤은 깨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그녀의 다리를 빤히 바라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견하는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번엔 청각이 예민해졌다. 침대 위 리안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머릿속을 휘젓는다.

같은 방에, 여자애 둘이, 하나는 자신을 꼼짝 못 하게 하려는 건지 다리를 올려놓았고, 하나는 자신의 침대 위에서 잔다. 또렷한 정신으로 밤을 새우게 될 것 같다.

어머니 아버지는 왜 이런 걸 허락하신 걸까.

“……자?”

처음에는 그 소리를 말로 인지하지 못했다. 5초 정도 지나서야, 견하는 그것이 효윤의 물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눈을 떴다. 창밖에서 가스등 불빛이 들어오고, 그 빛을 받아 소녀의 다리가 빛났다.

견하는 눈을 돌려 효윤의 얼굴을 바라봤다.

신기한 느낌이다.

낮에 리안을 아파트 안으로 끌어올 때의 충동과 비슷했다. 밤이라는 시간과 은은한 빛이 더해져, 동화 속 요정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눈초리가 둥글구나……. 아까 칼을 들이댈 때는 몰랐는데, 굉장히 선한 인상이다.

“낮의 일은 미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기분 나빴을 거야.”

물론 목이 날아갈 뻔한 입장에선, 유쾌하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글쎄, 화가 났냐면 그렇진 않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절박함을 이해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두 사람의 미모에 마음이 끌려서인지는 모르지만.

둘 다일 수도 있고.

“많이 놀라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아. 그보단…….”

의문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왜 리안은 정치가들의 속사정까지 이야기하면서 협력을 구했을까? 어찌 보면 자신의 치부를, 오늘 처음 만난 견하에게 거리낌 없이 다 말한 셈이다. 그렇게 절박했을까? 그래도 하필이면 왜 나에게?

견하가 처음 느낀 감정은, 환멸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다가오는 자를 불태울 태양이라는 건 알았지만, 막연하게 태양 같은 찬란함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태양이긴커녕 음습한 지하실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치열함을 느꼈다.

성적, 출결, 진학, 장래, 이런 것들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살 것 같던 사람들이, 목숨 걸고 하루하루 싸워나가고 있었다. 한번 미끄러지면 다시는 살아서 오를 수 없는 외줄 타기를 하며.

견하는 그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

친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친구들. 주기적으로 주어지는 과제와 시험. 남과 다를 것 없이 흘러가는 나날.

힘들 것도 없지만, 큰 즐거움도 없이 흘러만 간다.

하지만 견하는 리안의 세계로 가면, 자신도 뭔가 열정을 갖고 살리라 생각했다. 피 튀기는 투쟁, 절박함, 처절함이 있는 곳에서 자신도 뛰고, 구르고, 싸우게 된다면.

그것은 10대 소년이 흔히 품는, 가슴 뛰는 모험에 대한 갈망과 환상이다.

견하는 처음으로 심장에 피가 도는 듯한 고양감을 느꼈다. 미지로 향하는 문을 두 미소녀가 활짝 열어젖혔다.

“왜 나지?”

견하의 물음에 효윤은 잠시 답이 없었다. 생각하는 동안 양쪽 엄지발가락을 비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행스럽게도 효윤의 생각은 금방 끝났다.

“각하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네가 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효윤은 견하와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보기에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다만…….”

“다만?”

“갑자기 끌려온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보다 각하를 우선하라고 하진 않을게.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줬으면 좋겠어.”

효윤은 이제 견하를 똑바로 마주 봤다. 푸르스름한 빛이 눈동자에 도는 것 같다.

“진지한 부탁이야.”

효윤은 왜, 무슨 이유로 이렇게 리안에게 헌신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견하는 묻지 않았다. 분위기상 대답할 말은 하나뿐이다.

“알았어. 노력해 볼게.”

“그래, 그럼 안심이다.”

그녀는 이불 안으로 들어와 누웠다. 양손을 배 위에 올리고, 단정한 자세로.

“아, 아니, 야, 너, 이게 무슨……”

“오해하지 마. 내일 바쁠 거 생각하면 잠은 자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눕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견하의 얼굴을 봤다. 묶었던 머리카락을 푸니 다른 사람 같았다.

확 끼쳐 오는 향기.

이런 위치에서, 이런 각도로 여자애랑 마주 보리라 예상치 못한 견하는 당혹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면 아까 그 자세 그대로 재울 생각이었던 거야? 몹쓸 사람이네…….”

오늘 잠들긴 틀렸다.

***

리안은 잠들지 않았다. 평온한 숨소리를 내며, 전부 듣고 있었다.

등교.

태사부가 아니라, 오랜만에 강의실에 나가 살아 있음을 알린다.

굳이 그런 방침을 정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태사부로의 복귀는 당장은 어렵다.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일단은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허동주는 라디오 연설을 했다. 적어도 방송국은 장악했다는 뜻이다.

이 상황에서 태사부로 갔다간 연금되어 진짜 꼭두각시가 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한 뒤 서서히 잊힐 것이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지금 이게 잘하는 일인가? 오늘 허동주는 상황을 완전히 굳힌 건 아닐까? 나는 돌아가기가 무서워, 핑계를 대며 미루는 건 아닐까?

이대로 도망치면…… 어떨까.

효윤의 말대로 주견하라는 소년은 마음에 든다. 연하의 고등학생이지만, 미소년이고. 아까 우산을 씌워 주거나 잡아끌 때는 솔직히 두근거렸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도망칠 수 없다. 그런 희망 없는 도망을 제안하는 것도 염치없고.

마음을 다잡자. 그렇게 되뇌며 계획한 것을 떠올린다.

아군의 확보. 전용 열차에서 그녀를 경호하던 사람들은 효윤 빼고는 다 죽었다. 그러니 한 사람이라도 더, 아군이 필요하다.

견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다못해 잡일쯤은 맡길 수 있겠지.

그리고 견하는 인질로서의 가치도 있다. 여기 부부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지만, 허동주가 냄새를 맡으면 입막음할 수단이 필요했다. 아들이 리안의 손에 있다면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영웅으로 선전하기에 알맞은 아이이기도 하다. 태사를 구한, 정의로운 소년 영웅. 신문에서 떠들 신화의 주인공. 사람들의 호기심과 야망을 자극해, 그들을 태사 곁으로 끌어들일 모델.

나와 소년이 사진을 찍으면 그럴싸할 테지.

리안은 어깨 위로 이불을 당겼다.

나는 살아남을 거야.

반드시.

***

어렴풋이, 꿈속임을 자각한다.

리안은 자신이 얕은 잠에 빠졌다는 걸 알고, 더 깊은 잠에 빠지도록, 그냥 꿈을 지켜보기로 했다.

리안의 시야에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 떠오른다.

백부가 엑스라샤펠이나 런던을 모델로 지은 동명특별시. 상수도와 도시가스의 은혜가 닿는 가정. 자신의 집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의 평화는 내 책임이다.

이곳은 견하의 집이다. 리안은, 역시 어렴풋이 생각했다. 어째서일까. 이 가족의 화목한 모습이 꽤 깊은 인상을 남겨서일까. 자신은 평생 가져 본 적 없는 화목함이어서일까.

꿈은 갑작스레 깨졌다.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나 도자기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다.

“뭐야! 당신들 누구야!”

고함…… 견하 아버지의 것이다.

비명…… 견…… 여자의 것이다. 놀라서 지르는 비명이 아니라, 좀 더 끔찍한 이유로 지르는…….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효윤이었다.

안으로 열리는 문을 밖으로 꺾어 연다. 문틀이 깨져나갔다. 문도 반쯤 박살 났다. 그 소리는 비명 이상으로 심장을 떨리게 했다.

견하가 그다음으로 일어나 달려갔다. 효윤은 발로 차다시피 견하를 방 안으로 도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거실 쪽으로 돌아서, 그림자처럼 덮쳐 오는 괴한을 벤다.

어둡다. 괴한의 형상도, 그 피도 검다. 뜨뜻한 비린내가 그림자와 피를 구분 지어 준다.

침입자들이 몇 사람인지 당장 구분되지 않는다. 그저 직감으로 살의를 품고 덤비는 자를 베어 낸다.

습격자들이 되도록 소리를 안 내려 했는지, 아니면 어둠 속에서의 오발을 막으려는 것인지, 총탄은 날아오지 않는다.

“안방을!”

뒤에서 리안이 다급하게 외친다. 그 말을 듣고서야 효윤도 견하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처음 고함과 비명도, 분명 안방 쪽에서 들렸지.

조급해진다. 안방부터 살폈어야 했는데. 리안의 경호에만 신경이 쏠린 나머지, 그 부부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제발, 부부가 아직 놈들에게 저항하고 있기를.

마지막으로 가로막는 놈을 하나 베고,

끊어질 듯한 희망을 붙잡고, 안방 문을 부수며 들어갔다.

“…….”

예상대로. 습격자들은 안방에도 있었다.

예상과 희망의 격차를 싸늘하게 느끼며, 효윤은 멈췄다.

잔혹한 광경 때문은 아니다. 다만 부디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 기어코 일어났음에, 그 지독한 쓴맛에 망연자실했을 뿐.

그 바람에 견하가 다가오는 걸 막지 못했다.

소년의 눈과 입이 벌어진다.

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지만, 충격은 만져질 듯 전해졌다.

저 이불은 분명 검은색이 아니었겠지. 이불을 검게 물들인 것도 먹물은 아닐 테고.

벽과 천장에 튄 검은 자국은, 격렬한 난도질의 흔적이다.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됐음이 흔적에서 드러난다. 잔인한 방법은…… 곧 고통스러운 죽음을 의미한다.

그 비명은, 단말마였을까.

견하를 위로해 주거나 방 밖으로 내보내기 전에, 그의 목숨부터 지켜야 했다. 효윤은 앞으로 박차고 나가 괴한 두 명을 베었다.

난도질당한 견하 부모님의 시체 위에, 난도질당한 시체들이 쓰러진다.

견하에게 그게 어떻게 비칠지.

공포, 고통, 절망으로 일그러진 부부의 표정을 확인하고, 그 모습을 가리듯 등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리안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효윤이 말했다.

“여길 떠나야 해요. 당장.”

***

떠나면서 확인한 시간은 새벽 5시를 넘겼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4월 2일이다.

몸에 묻은 피는 많이 묻은 곳만 대충 씻어 내고 황급히 견하의 집을 나왔다. 시신들은 그냥 내버려 둔 채로.

부모의 참혹한 시신을 버리고 온 소년의 심정은, 짐작하기도 두렵다.

견하는 말이 없다. 끌어당기는 대로 달리거나 걷는다. 인형처럼.

“…….”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 하겠다. 리안은 입술을 씹었다. 내 탓이다. 내가 그 집에 머무르지 않았다면, 견하의 삶은 파괴되지 않았을 텐데.

그러는 한편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추적당했지? 습격자들이 뛰어나다면 그 수단을 추측해야 한다. 자신이 멍청한 짓을 해서 추적당한다면 그 멍청한 짓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생각은 금세 막힌다. 리안은 암살의 전문가가 아니니까.

막히는 생각을 억지로 뚫을 듯 반복하며, 리안은 걸음을 옮겼다. 효윤도 필사적인 표정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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