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1)
“어서 와라…… 어머, 여자 친구?”
견하와 함께 들어오는 리안을 본 어머니는, 10대 아들을 둔 여성의 당연한 반응을 드러냈다.
집에는 견하의 부모님이 먼저 와 있었다. 지하철도 폐쇄되고 비까지 오니, 카페는 일찍 닫은 모양이었다.
“견하가, 여자 친구?”
아버지도 어쩐지 유쾌한 어조로 식탁에서 그렇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견하와 리안의 뒤로, 긴 포니테일을 올려 묶은 소녀, 최효윤이 얼굴을 내밀었다.
“……둘이네.”
어머니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그렇게 말하고는 굳어 버렸다.
아버지는 히죽 웃으며 양손 엄지를 치켜세웠다. 견하에겐 쓴웃음만 나오는 유쾌한 동작이었다.
그런 아버지 역시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굳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게, 효윤이 들고 있는 흉악한 크기의 박도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리안은 집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혹시 신문 있나요?”
아버지가 식탁에 놓인 신문을 내밀었다. 리안은 신문을 뒤적거려 한 사진을 찾아냈다.
“제가 지금 누군지 증명할 게 이 사진뿐이네요.”
신문에는 태사 미리안의 큼직한 사진이 실렸다. 그녀가 국정에 얼마나 힘을 기울이는지 보여 주는 선전용 사진이다.
마침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적절한 시점에, 라디오에서는 지하철 테러와 태사의 실종 사건을 요란하게 보도한다.
[……이에 태사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지하철 운행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미리안 태사 각하에 대한 수색과 테러리스트 체포 작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태사 각하나 거동 수상자를 목격할 시……]
“들으신 대로, 저 일 때문에 피신할 곳을 찾고 있어요. 협조 부탁드립니다.”
견하의 아버지가 멍한 표정을 지은 건 찰나에 불과했다. 그는 견하가 본 적 없는 무거운 표정으로 일어나, 절도 있는 경례를 올려붙였다.
“저도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몸입니다.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리안도 경례로 화답했다. 이야기는 빠르게 진전됐다.
어머니는 무척 허둥대며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테러가 지금 라디오에서 떠드는 인간의 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제거하고, 자신이 나라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죠.”
[……슬픔에 슬픔이 겹친 날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세계대전의 영웅을 잃고 온 국민이 애도하는 오늘, 그분의 조카에게 테러를 감행했습니다. 고려 제국은 이를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저 문하시중 허동주가 책임지고 배후를 밝혀내 국민 여러분 앞에 세우겠습니다.]
허동주의 목소리는, 힘 있고, 확신에 찬, 애통함을 분노로 승화시키는 목소리다. 지금 눈앞에 리안이 없었다면 견하 역시 분노를 품게 할 법한, 그런 목소리.
견하는 문득, 재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허동주는 재연이 가입한 단체, 천손민족협회의 수장이기도 하다. 재연은 그에 대해 말하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고려 제3제국에서 문하시중은 태사를 보좌하는 제2위 관직이다. 그런데 지금 권력 서열 1위와 2위가 대립한다.
다시 말해, 허동주를 존경하는 재연은, 태사 미리안의 반대편이라는 말이다.
안 좋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제 백부님, 선대 태사 각하의 죽음에 저 남자가 깊게 관여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작년에 건강이 크게 상하신 것도 허동주의 탓이고요.”
식탁에 마주 앉은 아버지는 진지한 얼굴로 리안의 말을 들었다.
“저는 태사부로 반드시 돌아가야 해요. 가서 허동주와 맞설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 특히 주견하 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버지는 한숨 비슷한 콧김을 길게 내쉬었다.
잠깐이지만, 리안은 이 가족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것이 어쩌면 잘못된 도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안의 불안과 달리, 견하의 아버지는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정치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네, 1905년이죠. 그러니까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저는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물일곱에 종전할 때까지 군인으로 살았습니다. 거기서 제 청춘을 바치면서, 하나 배운 게 있죠.”
아버지의 눈이 번뜩였다. 사람도 죽일 것 같은 눈빛이다.
그제야 견하는, 늘 자상하고 장난기 많은 아버지, 마흔여섯의 카페 사장이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여 본, 나이 든 전사임을 깨달았다.
“전우를 배신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
견하도 틈만 나면 여자의 몸에 대해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10대 소년이다. 언젠가 방에 여자애를 데려오면 좋겠다고 상상도 해 봤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너무 상상 밖이었다.
하얀 팔다리가 견하의 방을 오갔다. 그것도 두 쌍이나. 여기에 발가락이 가지런한 맨발이 따르고, 한 명은 민소매로 어깨를 드러내고 있다.
어지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이 두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저기……요……?”
라디오에서 듣거나 신문에서 보던 사람이 방에 들어온 것도 상상 밖의 일이다. 견하는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높였다.
“그…… 각하, 라고 부르면 될까요?”
팔짱을 낀 채 방을 오가던 걸음이 멈췄다. 제국의 태사, 미리안은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아까 날 끌어당기던 박력은 어디로 갔지?”
“아니, 그때는 몰랐으니까……요.”
세 살 연상이면서 중학생 같은 얼굴이라니. ……몸매는 그렇지 않았지만.
쿡, 하고 미리안은 웃었다.
“주견하 군이 부르고 싶은 대로 해. 나는 ‘누나’ 쪽이 좋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아무리 그래도 권력 서열 1위한테 누나는 좀 아니지 않나.
리안이 견하의 침대 위에 앉았다. 견하는 하얀 허벅지가 움직이는 걸 보지 않으려 눈을 돌렸다.
“다들 앉아 봐.”
아까 견하의 목에 박도를 들이댔던 또 한 명의 소녀, 최효윤이 견하의 의자에 앉았다. 소녀들이 오가면서, 특히 효윤의 긴 포니테일이 견하 앞에서 흔들리면서, 좋은 향기가 났다.
그 향기 때문에 견하는 자신과 방에서 나는 냄새를 새삼 의식했다. 불쾌한 냄새가 나면 어쩌지?
“그런데 역시 남자애 방이라 그런지 남자 냄새가 나네.”
견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리안이 말했다. 그녀는 견하의 표정을 보고는 싱긋 웃더니 덧붙였다.
“남자 냄새는 불쾌한 냄새와 상큼한 냄새 두 종류가 있는데, 너는 상큼한 쪽이야. 그러니 안심해. 너 운동 열심히 하는구나?”
“조금은…….”
근육운동 정도는 하고 있다. 아니, 그보다 상큼하다니 조금 쑥스럽다. 안심도 되고.
“일단 앞으로 우리가, 특히 네가 하게 될 일을 이야기해 보자.”
견하는 바닥에 앉았다. 앉고 보니 공교롭게도 두 소녀의 무릎이 딱 눈에 들어오는 위치라 시선을 두기가 난감했다.
효윤이 앉은 쪽에서 엄청난 압박이 느껴졌다. 그녀는 견하가 뭔가 수상한 짓을 지지르진 않는지 감시하는 것 같다.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 좋겠는데…….’
효윤은 긴 포니테일을 팔로 쓸어 넘겼다. 감탄이 나온다. 팔다리는 가늘지만, 은근히 근육이 탄탄했다. 보통 여자애의 우아함과는 전혀 다른 우아함이 동작에 묻어 나왔다.
효윤이 보내는 압박감이야, 그녀가 리안의 경호를 맡았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부담은 참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엿듣는 듯하다.
‘아니, 지금 뭘 엿듣는 거야.’
‘가만 좀 있어 봐요, 안 들리니까.’
‘그런 건 견하가 알아서 하게 놔둬.’
‘아들 연애에 어쩌면 그렇게 태평할 수가 있어요.’
‘아니, 연애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한창때 애들이 한방에 있으면 무슨 일이 날지 모르는 거예요.’
대충 이런 대화가 밖에서 들려온다. 민망했다. 견하는 목덜미부터 귀 끝까지 화끈거려 고개를 숙였다.
리안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견하 군. 이 나라의 국호 ‘고려 제국’에서 ‘제국’은 무슨 뜻일까?”
“어, 그러니까…….”
임금 제(帝) 자를 쓴다. 아마도. 그러니까, 국사 시간에 배웠던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
“그래, 맞아.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황제’가 있어?”
없다.
지난 세계대전 때, 태평천국의 기습 폭격으로 평양이 잿더미가 되면서, 황제를 비롯한 황실 대부분이 탈출할 틈도 없이 전멸했다고 배웠다.
태평천국군은 그때 막 시범 운용되기 시작한 항공기로 대담한 작전을 세웠는데, 운 나쁘게 먹혀들었다고 한다.
황제가 없는, 제국.
“우스운 말이지. 하지만 나, 태사를 비롯한 이 나라 권력 핵심은 그런 우스운 토대 위에 균형을 잡고 서 있어.”
리안은 상체를 앞으로 살짝 굽히며 두 손을 모았다. 어떤 투명한 구조물을 잡아 올리는 듯한 손짓이었다.
“‘황제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런 막연한 약속 아래, 백부님은 태사직을 맡아 ‘섭정’으로 군림해 오신 거야.
편리한 방법이었지. 사람들은 황실을 존경하면서도 동정했고, 백부님은 그런 황실의 권위를 빌려 오기만 하면 됐으니까. 법적으로 태사는 명예직이지만, 누구도 법으로 황실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었어.”
리안은 오른손 손바닥을 위로 올리고, 검지를 견하 쪽으로 내밀었다.
“여기에 맹점이 있어.”
그녀는 싱긋 웃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허리와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발부터 허벅지를 거쳐 겨드랑이와 손끝까지 이어지는 하얗고 매끈한 선. 견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효윤의 눈길이 어째 비난하는 것 같다.
“백부님의 권력 기반에는 황실의 권위만 있는 건 아니었어. 평양 괴멸 후, 살아남은 사람들을 규합해 동쪽에서 저항군을 이끌었던 백부님의 이력도 중요했지.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 당당한 승전국으로 이끈 전쟁 영웅이라는 이력.
백부님의 권력은 그 활약에 대한 국민의 존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어.”
그런데 나를 봐, 하고 리안은 자기 가슴팍을 가리켰다.
“나에겐 백부님의 조카라는 것 외에는, 태사의 권위를 지킬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 그냥 대학교 2학년 계집애일 뿐이지.
나는 전쟁이 끝나기 1년 전, 1909년에 태어난 애송이야. 국정 경험도 고등학교 때부터 참관한 걸 제외하면 작년부터 백부님의 동지들, 이른바 ‘원로’들의 결정을 승인해 온 것 정도지.”
허수아비 그 자체야, 나는.
씁쓸하게 말한 리안은, 오른쪽 무릎을 끌어 올려 안았다.
“이렇게 나 자신이 ‘권위’가 없어. 그러니 내 지위의 ‘법적인 허점’을 방어할 방법도 제한적이야.”
‘황제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라는 애매한 시간 동안, ‘황제의 권력을 대리한다’는 애매한 원칙.
그 모호함은 선대 태사 미승휴에게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권력을 안겨 주었지만,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그 모호한 역할은, 권위만 있다면 누가 맡아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하시중 허동주는, 그만한 권위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