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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화 (3/541)

장례식(3)

“924년에 발해와 맺은 동맹에 따라, 태조 황제께선 몸소 군대를 이끌고 거란과 싸우기로 하셨다. 고려군은 최대한 빨리 북상했지만, 거란군이 좀 더 빨랐어. 926년 1월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이 함락됐지.”

30대 중반의 남자 국사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조금 들뜬 어조로 수업을 진행하는 걸 보니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태조께선 발해 각지에서 일어난 부흥군을 규합해 부여성을 탈환하셨다. 여기서 부여성의 탈환이 중요한데, 어디 보자…….”

선생은 칠판에 그럴싸한 동아시아 지도를 그리더니, 분홍색 분필로 점 두 개를 찍었다. 그러고선 흰 분필로 왼쪽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 안에 ‘거란’이라는 글씨가 적혀 들어갔다.

“지금이야 우리나라 한가운데지만, 당시에는 북쪽 변방이던 부여성은 전략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중요했다.

여기 왼쪽 점을 부여성이라고 하고 오른쪽 점을 상경성이라고 하자. 이렇게 거란까지 한 줄로 이으면 부여성이 딱 한가운데 오지? 태조 황제께선 바로 여길 점령하신 거다.

거란 본토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데다 돌아갈 길도 끊어진 거란군은 상경성을 포기하고 탈출을 시도하지. 그 결과 발해 전 지역을 무대로 고려군과 거란군의 전쟁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선생은 칠판지우개로 지도를 지우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금 발 딛고 있는 우리나라의 수도, ‘동명(東明)특별시’의 ‘동명’. 이게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으로부터 따온 건 다들 알지?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 동명성왕이 부여성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어. 즉 부여성을 탈환하면서 발해와 고려 모두의 성지(聖地)를 되찾은 거야.

이런 상징성 때문에 발해의 민심은 태조 황제께로 기울고, 태조 황제께서 발해와 고려를 통합하는 데 큰 힘이 되지.”

지도를 다 지운 선생은, 양손으로 교탁 모서리를 잡고 씩 웃었다.

“태조께서 상경성에 입성해 ‘황제’ 즉위를 천명한 바로 그날, 역사학자들은 ‘제1제국’이 성립되었다고 본다. 지금 우리나라, ‘고려 제국’의 정치체제를 ‘제3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야.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제2제국’은 무엇인가?”

그때, 재연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반 아이들도 재연의 내성적인 성격을 잘 알았기에,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곧 어쩌다 있는 작은 예외로 여겼다.

선생은 학생의 적극적인 자세에 기쁨을 담아 미소 지었다.

“그래. 재연 군이 대답해 볼까?”

“몽골 제국의 분열 후 재건된 제국체제를 말합니다.”

“그래, 잘……”

말해 주었다, 라고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재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제2제국은 구 몽골 황실의 일파와 고려 황실 간 연합을 통해 재건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제3제국은 제2제국의 법통을 계승했기에, 옛 몽골 제국 강역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산동의 지배를 강화하고,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와 유대를 강화하여 더욱 강력한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재연은 자리에 앉았다.

“어…… 그래. 잘했다. 다, 다들 박수.”

당황스럽긴 해도, 선생은 어쨌든 자기 과목에 열심인 학생을 장려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웬일이야. 적극적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다른 아이들도 소극적이던 친구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 여겼다.

거기까지였다면 견하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

“저기…… 견하야, 잠깐, 이것 좀 볼래?”

견하는 재연의 눈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뭔데?”

평소처럼 시집인가? 하고 생각했다.

재연은 수줍게 팸플릿 하나를 꺼냈다. 그 동작은 어제까지 재연이가 보인, 소녀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전체적으로 까만 색상의 팸플릿엔, 재연이 찬 완장과 똑같은 문양이 찍혔다.

붉은 원 안의 세 발 까마귀.

그 밑으로는 강렬한 필체로 구호들이 적혀 있었다.

-천손민족협회 소년부 모집!

-천손민족 5000년사 무료 강의

-완장을 포함한 세련된 제복 지급

-생활기록부에 반영되는 건전한 동아리 활동

-대아시아 패권 장악의 미래는 소년 제군에게 달렸다!

여러 구호 뒤편에, 어떤 남자가 그려져 있다.

신문에서 본 정치가 같았다. 키가 컸고, 턱수염과 날카로운 눈이 인상적이다. 그는 좌우로 견하 또래 남녀 학생을 두고 그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음. 이 사람은 누구야?”

“아, 허동주 문하시중 각하셔. 천손민족협회의 회장님이시기도 하지.”

그래, 어디서 봤다 했더니 그 정치가구나.

“그런데…… 이건 왜?”

“응. 다른 게 아니라, 주말에 소년부 모임이 있거든. 같이 가지 않을래?”

“글쎄…….”

견하는 학교 밖 활동에 그닥 적극적이지 않았다. 견하는 집에서 쉬는 걸 더 좋아했고, 용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연의 제안에 마음이 선뜻 움직이진 않는다.

견하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미안. 이번 주말에는 부모님 일을 도와드려야 해. 약속 잡지 말고 비워 두라고 하셨거든.”

평소 같았으면 재연은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물러났을 아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딘가 달랐다.

“하지만 아직 월요일이잖아, 응?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바꾸면 안 될까? 우리 학교엔 많이 없지만 다른 학교에선 이미 많이 가입했어. 가면 청년부 선배들도 있고……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견하야…….”

“미안해. 이번 주는 어쩔 수가 없어. 다음 주에. 한번 시간 내 볼게.”

재연은 실망을 담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는 아까 국사 시간에 보여 준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평소의 그로 돌아갔다.

방과 후에 견하는 같이 분식집에 가자고 했지만,

“미안해. 천손민족협회 소년부 활동이 있어서…….”

흐릿한 미소를 지은 친구의 얼굴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 모습이 견하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부모님 일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핑계가 거짓말이라 더욱 괴로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견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정치가와 얽히는 건 꺼림칙했다.

허동주, 문하시중이라는 고위 관리의 얼굴을 봤을 때 곧바로 ‘전학’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까지 말려들, 한밤의 전학. 그리고……

재연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이기도 했다.

반짝이는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열정이나 흥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꺼림칙한 불안감이 견하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불안한데,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게 종일 견하의 마음을 피곤하게 했다.

***

다리도 피곤하다고 느껴질 무렵, 견하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노면 전차라도 타고 올 걸 그랬나.”

푸념하던 견하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평소와는 다른 요소가 풍경에 섞여 있다. 계단 앞, 아파트 입구에 한 소녀가 보인다.

중학교 3학년쯤 되었을까? 작고 하얀 얼굴. 긴 머리칼. 그 머리칼이 살짝 바람에 흔들렸다. 굉장히 길어서, 허리를 넘는다.

“아.”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견하는 소녀가 중학생보다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비로울 정도로 긴 속눈썹 아래, 일직선으로 쏘아 오는 눈빛 때문이다. 그런 미인은 처음 봤다고 말해도 좋을 아름다운 얼굴 이전에, 그 눈빛이 견하를 멈추게 했다.

하지만 소녀는 그저 무엇이 오는지 살펴본 것뿐, 무심히 고개를 돌려 비 내리는 공터를 응시했다. 그리고 팔을 들어 밖으로 뻗었다.

비를 맞으면 얼마나 젖을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견하는 소녀가 요즘 입기엔 좀 추운, 소매가 거의 없는 블라우스를 걸쳤음을 알아차렸다.

하얀 팔이 비에 젖었다.

견하는 눈을 돌리고 계단을 올랐다. 좀 더 그 얼굴이나 하얀 어깨, 그리고 겨드랑이 곡선을 눈에 담고 싶긴 했지만, 뭐든 지나치면 좋을 게 없으니.

그래도 무심코 다시 소녀를 흘끔거린 견하는,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팔을 내민 자세 그대로, 아예 밖으로 나가 있었으니까.

그다음 견하가 취한 행동도 역시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뭐 하는 거야, 쟤.”

견하는 그렇게 투덜대며 소녀 곁으로 달려갔다. 소녀의 손을 잡아 우산을 쥐여 주고, 교복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러다 감기 걸려.”

소녀는 멍하니 견하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퍼뜩 정신이 났다는 듯 눈에 힘을 줬다.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너, 너…… 무슨……?!”

“주는 건 아니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와. 누굴 기다리는지는 모르지만.”

“아니, 너 내가 누군지 몰……”

견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소녀를 다시 아파트 입구로 잡아끌었다. 소녀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견하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우산을 접자, 소녀의 얼굴빛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당황한 기색도 없어졌다.

견하는 겉옷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 손짓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짱만 끼고 있었다.

“야……”

“너, 여기 사는 학생이야?”

이번엔 소녀가 견하의 말을 끊었다. 중학생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그 목소리는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또래 여자애들의 앵앵거리는 목소리와는 달랐다.

“마침 잘됐네. 너희 집에 좀 들어갈 수 있을까? 비도 닦아 내고 몸도 녹이고 싶은데.”

자기가 밖에 나가서 맞아 놓고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아니, 그 전에 집에 들여놓기까지 하는 호의는 견하가 베풀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모르는 여자에겐 더더욱.

견하가 거절하려고 입술을 떼면서, 옷과 우산을 돌려받으려 손을 내민 순간.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어째서인지 금속의 질감이 느껴진다.

견하는 본능적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견하의 옆에는 어느새 또 한 사람의 소녀가 서 있었다.

비에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은 그 소녀는, 커다란 박도를 들고 견하의 목덜미를 겨눴다.

처음의 소녀는 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례는 할게. 물론 거절하면 못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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