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2화 (2/541)

장례식(2)

누군가 청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검광이 빛났다. 탄환이 청년의 검에 부딪혀 불꽃이 튄다.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리안은 그 비현실적 속도에 말을 잃었다.

청년-이단은 도약했다. 보통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움직임이다.

그를 겨눈 총구가 제대로 따라잡지 못한다. 총알은 빗나가거나, 청년의 검에 간단하게 튕겨 나간다.

자기만 한 검을 어떻게 저렇게 가볍게 휘두르는지.

그렇게 넋 놓은 사이 청년은 열차 안으로 내려와, 장교 하나의 상체를 바스러뜨렸다.

그 단면의 뼈와 내장에 역겨움을 느낄 새도 없다.

청년은 곧이어 리안에게 사나운 눈길을 보냈다. 의미는 분명했다. 그는 리안의 목을 노린다.

청년이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총을 갈겼다. 청년은 자세를 흩트리며 총알을 피한다.

“각하!”

그 틈을 타 늙은 중장이 리안의 몸을 감쌌다. 청년은 총을 쏜 군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단숨에 리안의 목을 치려던 계획을 바꾼다. 일단 경호부터 처리하기로 한 듯하다.

곧바로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청년의 검은 잔혹하고 화려하다. 검이 지나며 그리는 곡선, 흩뿌리는 피, 효율적인 움직임이 어울려 열차 안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든다.

사람들의 사지가 단숨에 잘린다. 청년은 그들의 비명 첫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급소를 부숴 숨을 끊는다.

저 사람이 아군이었다면, 가슴 뛰는 장면이었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저 사람의 적이다.

주인공의 무용담을 장식하는, 잡졸에 불과하다.

“각하를 지켜……!”

“히아아악!”

“뒈져!”

조금 전에 탈출을 다짐하며 서로 기운을 북돋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진다.

허망하다. 우리의 의지는, 어쩌면 이렇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지.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중장이 꼿꼿한 자세로 권총을 겨눈다.

쏜다. 여지없이 튕겨 낸다.

그래도 계속 쏜다. 죽음이 다가와도 굴하지 않고, 군인의 마지막 긍지로 발을 바닥에 박아 놓고.

검이 단숨에 중장의 명치를 파고들어, 내장과 척추를 박살 낸다. 그러나 중장은 쓰러지지 않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청년의 얼굴을 향해 총구를 옮기고, 방아쇠를 당긴-

검이 그대로 중장의 정수리를 가르며 위로 솟았다.

중장의 갈라진 상체가, 좌우로 힘없이 늘어졌다. 조금 늦게 떨어지는 핏방울 아래, 마치 비를 맞아 늘어진 난초 같은 모양새다.

이제, 리안의 차례가 온다.

“…….”

믿을 만한 부하를 전부 잃은 태사는, 시체와 피 웅덩이를 둘러봤다.

죽은 이들은, 부디 고통의 순간이 짧았길.

청년은 거대검을 리안의 쇄골 언저리에 겨눴다.

키가 꽤 크고, 준수한 얼굴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반했을까? 피와 그을음투성이지만, 외모가 묻히지 않을 만큼 잘생겼다.

쉰 목소리로, 그는 입을 열었다.

“원망은 마라. 네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죽이지 않았어.”

리안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곧 죽을지라도, 적개심을 끝까지 불태운다.

청년은 팔에 힘을 줬다. 이 일격으로 태사 미리안의 머리와 목, 그리고 그 언저리까지 단숨에 파괴한다.

미리안이 죽기까지 1초도 남지 않은 그 순간, 청년은 리안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눈에 비친……

청년은 야수처럼 돌아섰다.

공중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거대검을 부러뜨릴 듯 강타하고 튕겨 나갔다. 무릎을 구부려 최대한 충격을 흡수했지만, 팔꿈치가 저렸다.

자세를 가다듬으며 ‘튕겨 나간 것’을 노려봤다.

박도(朴刀)를 든 소녀다. 그 칼도 소녀의 키만 했다.

힘없는 시녀라 생각해서 살려 뒀는데, 아무래도 소녀 역시 ‘이단’인 모양이다.

리안 역시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소녀 대령을 봤다. 백부님이 단순히 장식으로 붙여 준 게 아니었나? 아, 그 치밀한 노인네가 그럴 리 없지.

‘살무사 중사’도 치밀하게 경계했다면 좋았겠지만.

최효윤은 청년과 대치했다.

평소 보여 주던 귀여운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효윤은 살의를 뿜으며 자세를 잡았다.

청년은 그 살의를 맞받으며, 먼저 달려들지, 아니면 그녀의 공격을 받아 낼지 계산했다.

계산은 효윤이 먼저 끝냈다. 달려든다.

청년도 검을 세워 효윤의 박도를 받아친다.

“……무지막지하네.”

아까 팔이 저렸던 건 그저 위에서 내리쳐서만은 아닌 듯하다. 소녀의 힘 자체가 워낙 엄청났다.

청년은 두 손으로 검을 휘두르지만, 비슷한 크기의 칼을 소녀는 한 손으로 휘두른다.

리안의 눈에는 두 초능력자의, 인간을 뛰어넘은 격돌로만 보인다. 마치 빛과 공기의 공방같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지켜만 보진 않았다.

“생각해…….”

생각하자. 내가 할 일을.

짧은 순간, 리안은 파고들 틈을 찾았다.

“……무적은 아닐 거야.”

세계대전에서도 이단 전사자는 많이 나왔다.

죽일 수는 있다는 말이다.

“총알을 피하거나 튕겨 내긴 했지만…… 그대로 맞진 않았지.”

즉, 저들도 총에 타격은 입는다.

그렇다면.

순간 공방이 멎고, 효윤과 청년은 서로 노려보며 다시 대치했다.

아주 잠깐의 틈.

보통은 노릴 수 없는 찰나. 리안은 망설이지 않고 달려든다.

그것이 리안을 구했다.

“운이 좋았군.”

리안은 속삭이듯 말했다.

이단은, 평범한 사람에겐 자신이 무적이라고 착각하지 않을까. 그런 도박이었다.

“너희도 그냥 사람이야.”

청년은 컥컥대며, 눈 아래, 목을 꿰뚫은 칼날을 본다.

태사가 장성들에게 수여하는 환도(環刀).

리안은 칼을 비틀고 온 힘을 다해 왼쪽으로 그었다. 찢어진 목덜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그녀를 적셨다. 많은 양이지만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다.

이번에는 칼날을 돌려 오른쪽으로, 더욱 힘을 줘 휘둘렀다.

청년의 손이 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하지만 머리는 이미 떨어져 나가고 없다. 허파에서 목구멍으로, 비명 같은 소리를 올려보냈다.

청년의 몸뚱이는 비틀거리며 두 걸음을 옮기곤 쓰러졌다. 힘을 잃은 손끝에, 굴러온 머리가 닿았다.

미리안은 시체를 넘어 소녀 쪽으로 다가갔다. 소녀는 박도를 겨눈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딜 겨누고 있나. 치워.”

효윤은 박도를 내렸다. 몸이 떨렸다. 그녀는 같은 이단을 제외하면 무서울 게 없을 줄 알았다.

평범한 사람의 눈빛이, 걸음이, 집념이 이토록 무서운 줄은 몰랐다.

“원하는 걸 말해 봐, 대령.”

리안은 효윤보다 키가 작았다. 그런데도 효윤은 리안을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효윤의 멍한 얼굴을 보던 리안이 피식 웃었다.

“치하하려는 거야. 뭘 갖고 싶지. 포상? 훈장? 아니면 진급?”

효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리안은 고개를 돌려 중장의 시체를 바라봤다. 태사를 경호하다 죽었으니 원수가 될 수 있을까.

“난 진급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공석도 났고.”

총성과 비명이 점점 가까워졌다.

리안은 효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장서, 중장.”

***

같은 시각, 동명특별시 제22구.

등하굣길에 이용하는 지하철이 갑자기 폐쇄됐다.

그 바람에 소년, 주견하는 다른 귀갓길을 찾아야 했다.

피곤한 날이다.

“거기 학생, 여기 돌아다니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

경찰은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선생님처럼 말했다. 부드럽게 말할 때 발걸음을 돌리는 게 좋겠지.

돌아서며 흘끗 본 지하철역 입구엔, 견하보다 서너 살쯤 연상으로 보이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 났나…….”

견하는 푸념 반, 궁금증 반으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집까진 좀 멀었지만, 걸어가지 못할 거리도 아니다.

양털 구름 같은 머리카락. 중키를 조금 넘는 키. 나름 미소년이라 불릴 만한 얼굴의 소년, 견하는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휴가나 외출을 나온 군인들은 봤지만…….”

이렇게 시내에 총을 든 군인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없다.

불길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예전에 몇 번 이런 일이 있을 때, 반에서, 꼭 견하의 반이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누군가가 ‘전학’을 갔다.

부친의 전근, 이사…… 여러 가지 이유가 선생님을 통해 전해졌지만, 견하는 믿지 않았다.

정말로 집안 사정 때문에 이사하는 아이들은 친구들과 며칠 전부터 작별 인사를 나눈다.

하지만 ‘지난 밤새 이사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선생님의 시선은 불안하고, 목소리는 딱딱하다. 아이들의 질문은 묵살된다. 그제야 아이들도 느낀다.

그 친구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걸.

그건 이사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게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진실을 알려 하지 않는 게 이로울 것이다.

“내일 또…… 누군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아주 친한 친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껄끄러운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견하의 일상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딱 좋은 정도의 평화, 라 할 수 있다.

견하는 일상에 만족했다. 견하가 읽는 책이나 숙제에 대해 말을 거는 여자애들은 귀여웠고, 어깨동무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사내애들은 유쾌했다. 이런 평화가 깨지는 건 싫다.

다만…….

견하는 우산 밖으로 손을 뻗었다. 작년보다 날씨가 따뜻해 눈 대신 비가 내린다.

바지 밑단과 운동화가 젖을 걸 생각하면 좀 추워도 눈이 내리는 게 나았겠지만, 불평한다고 날씨를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다.

견하는 동명특별시 제23구의 아파트로,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제22구에 있는 제22고등학교, 줄여서 ‘제22고’라 하는 학교. 거기서 집까지는, 생각을 다시 이어가기에 충분히 멀었다.

내리는 비를 구실로 잠시 멈췄던 건, 한 친구에 대해 생각하길 망설였기 때문이다.

거의 여자애 같은 청초한 미모에, 작은 체구, 희미한 인상의 소년.

견하가 같이 있으면 어째서인지 반 여자애들이 작게 꺅꺅 소리를 내며 발을 구르는 것 같지만…… 아니 그건 됐고, 어쨌든 반 친구 중 가장 가깝다 할 수 있는 아이다.

그런데 그가 오늘은 좀…… 어딘가 이상했다.

한재연이라는 이름의 미소년. 그와는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라,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2학년 1학기, 4월에 접어든 오늘 그렇게 달라진 모습을 볼 줄은 몰랐다.

아니, 달라진 게 아니라 그냥 몰랐던 면을 보게 되었을 뿐일까?

-견하도 책 읽는 거 좋아하는구나.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재연은 자기가 읽던 책을 내밀곤 했다.

-여기 실린 시……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들어.

그렇게 시를 읽는 걸 좋아하던 애였는데.

평소엔 조용하던 문학 소년이, 오늘은 붉은 완장을 찼다. 검은색 ‘세 발 까마귀’가 수놓인 붉은 완장을.

정식 교복으로 지정되지 않은 물건인데, 그 어떤 선생도 지적하지 않았다.

붉은 완장이 무언가 기력을 불어넣어 준 것일까? 마냥 여려 보이던 재연은 오늘은 어깨를 한껏 폈다.

그래도 거기까진,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는 변화였다.

하지만…… 국사 시간이 되자 이상한 느낌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