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1)
최고 권력자의 장례식이 끝났다.
순국선열 묘역의 가장 깊은 곳, 항전열사릉 앞에 검은 우산들이 모였다.
우산 아래 얼굴들은 고려 제3제국 권력 핵심과 연결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연결이 끊기지 않게 모든 언동을 조심했다.
어떻게 해야 차세대 권력자의 눈에 들까. 너무 빨리 자리를 떠나면 충성을 의심받겠지. 애도만 계속할 수도 없다. 그러면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된다.
어느 쪽이든 몰락이 기다린다.
사람들의 눈길은 한 소녀에게 향했다. 막 스무 살이 된 소녀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태사(太師) 미리안.
그녀의 지위와 이름이다.
중학생 같은 투명한 얼굴. 그 얼굴에 자리 잡은 큰 눈. 굳게 다문 오종종한 입술. 작은 몸. 허리를 넘는 긴 머리칼.
긴 속눈썹이 뻗은 눈꺼풀을 조심스레 내리 닫으며, 미리안은 백부의 명복을 빌었다.
얼마나 진심이 담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효과적인 선전 영상을 남길 것이다. 카메라는 아직 돌아간다.
미리안 옆에는 중년 남자가 서 있다. 권력 서열 2위, 문하시중(門下侍中) 허동주라는 자다.
단정하게 다듬은 턱수염과 큰 키를 두고, 아첨꾼들은 제왕의 풍모라 찬탄한다. 날카로운 눈매는 세계대전의 ‘살무사 중사’가 헛된 별명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런 그도 오늘은 눈빛이 우울하다.
허동주는 큰 키를 굽혀 미리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슬픔에 잠긴 조카를 위로하는 숙부처럼.
물론 이 자리의 고위 관료와 유력 인사 중, 그 모습을 그렇게 해석할 자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다면, 저리는 오금에 힘을 줘야 하리라.
“오래 버티셨군.”
표정에는 슬픔을 가득 담고, 목소리에는 비웃음을 담았다. 미리안은 허동주의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애도 가득한 표정 그대로 맞받아쳤다.
“살무사가 도사리는데, 차마 눈을 감진 못하셨겠지.”
그녀도 말에 비웃음을 담았다.
“아니면 살무사의 독이 옛날만 못했나?”
동주는 허리를 펴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이야기인가. 내가 각하를 독살했다는 헛소문 정도는 걸러 들어야지. 태사 자리까지 올랐으면.”
리안은 동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백부의 관이 들어간 석실 입구에 시선을 던졌다.
“쓰러진 각하를 두고 그저 서서 뭣들 하셨을까. 주치의도 안 부르고. 1년 동안 이 자리에 있어 보니 알겠더군. 태사부는 그렇게 어설프게 돌아가는 곳이 아니야.”
동주는 안쓰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태사 각하의 뒤를, 네가 이어야 한다고 우긴 사람은 나다.”
“태사를 명예직으로 만들고 문하시중을 실권자로 올리는 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도 알지.”
“고려 민족에겐 대아시아 대륙 패권 확립이라는 과제가 있지. 그 민족적 과제의 수행에는 권력의 집중이 필요해. 모르진 않을 텐데.”
미리안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허동주가 차고 온 완장의 모양을 머릿속에 그려 낼 수 있다.
‘세 발 까마귀’가 수놓인 붉은 완장. ‘천손민족협회’라는, 전쟁광들의 모임.
“전쟁광들을 억누르는 게 국가적 과제지. 그리고 그게 당신이 이인자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고.”
“섭섭한 말씀이군. 선대 태사께서도 내심 동의하셨었네.”
“당신 수작에 놀아나지 않으시니 독살한 건 아니고?”
“무의미한 입씨름이군. 태사께선 요 1년을 시간 낭비만 하셨군요. 그 정성을 선대 태사 각하의 병수발에 쏟았다면, 그분이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요?”
그제야 미리안은 허동주를 올려다봤다.
마치 위로에 감사한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목소리엔 여전히 비웃음과 증오를 담았다.
“날 제거하려면 오늘 말고는 기회가 없을 겁니다, 문하시중. 나는 당신네 사람들을 수용소에 보낼 테니까요.”
***
1929년 4월 1일, 고려 제3제국 초대 태사 미승휴의 국장이 끝났다.
미리안과 측근들은, 도열한 군인들을 두고 돌아섰다.
그들은 지하철역에서 일반인들은 모르는 통제구역으로 들어갔다.
일반 국민이 이용하는 노선 아래, 권력 핵심만 이용하는 비밀 노선이 있다.
새 수도 동명특별시(東明特別市)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건설됐다.
선대 태사 미승휴는 그 건설 과정에서 지하철에 방공호의 역할도 겸할 비밀 노선을 지으라 명령했다.
자칭 ‘자유세계’라는 나라들은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하지만 고려 제3제국의 태사는 ‘자유세계’의 국가원수가 아니다. 선대 태사 미승휴는 막강한 권력을 쌓았고, 그 권력만큼 암살과 정변의 위협에 시달렸다.
리안도 자유세계가 언론의 입을 빌려, 고려의 이런 행태를 비웃는 건 안다. 하지만 그녀는 백부가 옳다고 여겼다.
승휴는 비밀 노선도 지었지만, 세계에서 가장 세심하게 발달한 철도망도 지었다. 이 철도망이 산업 기반이 되어, 고려를 세계 5위의 경제 강국으로 올려놓았다.
세계대전이 끝난 지 19년 만에 이룩한 기적이다.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리안은 태사의 전용 열차에 올랐다. 다른 관료들은 고위층용 열차에 타고 따로 출발했다.
열차의 겉은 갑옷을 두른 듯했다. 장갑 표면에 도자기 같은 무늬를 새겨, 권력자의 이동 수단다운 위엄을 보인다. 장갑 안에는 각종 무장을 갖췄으며, 증기기관 대신 전기를 동력으로 쓰는 신기술도 도입됐다.
리안의 개인실에는 시중을 드는 소녀 한 명만 함께 들어갔다.
그 소녀는 대령 계급을 달았지만 진짜 군인은 아니다. 격을 맞추기 위해 승휴가 붙여 준 계급이다.
단, 긴급 연락과 근위대 지휘를 맡은 옆방의 장군은 진짜 중장이다. 퇴역을 앞두긴 했지만.
웃음이 나왔다. 리안이 알기로 저 아이, 최효윤의 나이는 이제 열일곱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자애한테 대령이라니.
대원수 계급장을 단 스무 살 여대생이 할 이야기는 아닌가.
“커피 좀 가져다주겠어?”
누그러진 표정과 어조로 리안은 부탁했다. 차 준비실로 향하는 최효윤을 보면서 리안은 부드러운 의자에 파묻히듯 앉았다.
피곤했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대신 잡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허동주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니, 이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나는 허동주를 어디까지 파악했으며, 또 허동주는 나를 어디까지 파악했을까.
어쩌면 3년 남짓 곁에서 일한 저 소녀 대령도 허동주에게 포섭됐을지 몰라.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지금쯤 커피에 독을 타고 있을지도. 하지만 허동주가 하필 오늘 그런 수단을 쓸까?
독살 같은 수단을 쓰지 않는다면, 정면 승부의 가능성이 크다. 태사부에 돌아가면 일단 동원 가능한 부대를 검토해 봐야겠군.
“아, 고마워.”
효윤이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리안은 다리를 꼬았다. 구두는 아파서 벗었다.
자,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겨 볼까. 리안은 검은 스타킹 속 발가락을 쭉 폈다.
그때, 소녀 대령이 ‘앗’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뭐…….”
뭐지, 하고 묻기도 전에 리안은 상황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반 넘게 남은 커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몸이 앞으로 쏠리자, 순간 ‘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열차가 급정차한 탓에 관성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괘, 괜찮으세요, 각하?”
“……옷에 묻은 건 아니니 바닥만 닦아 내면 돼. 하지만 그 전에 무슨 일인지 알아봐 줘.”
소녀 대령 최효윤은 옆방과 연락하는 전화기를 들고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보고했다.
“그게…… 상황 파악 중이랍니다.”
열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리안도 소녀 대령도 얼굴만 마주 봤다.
소녀 대령은 바닥의 커피를 닦아 냈다.
일을 마친 소녀 대령이 불안한 얼굴로 옆에 섰다. 리안은 탁자 위로 두 다리를 올렸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스타킹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노려봤다. 답답해서 벗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앉아만 있을 순 없지. 따라와.”
미리안은 옆방으로 들어갔다. 늙은 중장과 장교들이 경례했다.
연줄을 잡을 줄 몰라 꼭두각시의 호위로 좌천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만큼 우직했다.
리안은 장교들을 죽 둘러봤다.
“상황은?”
격려 대신 딱딱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씁쓸하다.
“습격입니다. 선로가 끊겼습니다. 소속 불명의 병력이 돌입을 시도해, 교전 중입니다.”
리안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여러 번 있을 거야.
중장의 심각한 보고와 달리 열차 안은 조용했다.
그 기이한 느낌이 리안에게 차분함을 돌려주었다. 어쨌든 방탄은 잘되는 열차다.
“적 규모는?”
“어두워서 시야가 한정적이지만, 확실히 우리보다는 많습니다.”
“가까운 부대와 연락은 했나? 경찰이든 군이든. 그리고 태사부 쪽은?”
“……송구스럽습니다만, 먹통입니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겠지. 태사 미리안을 잡으려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생각조차 말거나.
왜냐하면 지금 리안의 머릿속에는 교수대에 매달아 버릴 인간들 목록이 작성되고 있으니까. 이 암살 시도가 누구의 수작이든 상관없이.
“아쉽군. 후계 구도 어쩌고 하는 늙은이들 목소리를 꼭 듣고 싶었는데.”
가벼운 농담에 비교적 젊은 축들이 싱긋 웃었다. 분위기를 조금 끌어 올렸다.
“제군. 제군은 왜 진급의 사다리에서 밀려나 꼭두각시 계집애의 뒤치다꺼리나 하는지 아나? 왜 경력의 마지막이 대학교 2학년생의 경호여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 없나?”
다들 입을 다물었지만 표정은 이미 잘 안다고 말한다. 그들도 눈과 귀가 있다. 상층부가 미리안을 치워 두고, 차세대 권력 구조를 만들려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 핵심부에 문하시중, ‘살무사 중사’ 허동주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아첨도 할 줄 모르는 자신들은 윗선에 밉보여 이렇게 ‘폐기’되었다는 것도.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태사와 함께 죽음 앞에 놓였다.
“지원을 바랄 수 없다. 정면으로 돌파한다. 가서, 내가 권력을 쥐고 휘두를 수 있음을 입증한다.
나는 이런 굴욕을 참아 넘기는 사람이 아니다. 제군은 참아 넘기는 사람인가?”
남자들은 전투화 뒤꿈치를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고작 스무 살 여자의 연설에 감동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다만, 상관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침착을 유지한다는 점에 만족했을 따름이다. 대부분 실전 경험이 있는 남자들이니까.
미리안은 미소를 끌어올렸다.
태사부로 돌아가면 사람들을 포섭한다. 그리고 권력을 쥘 것이다. 자신이 꼭두각시가 아니라 고려 제3제국의 대원수임을 보일 것이다.
살아남자.
그때 온몸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열차 지붕이 ‘뜯겨 나갔다’.
기이한 광경이다.
뜯겨 나간 지붕 모서리에, 자기 몸만큼 거대한 검을 든 청년이 서 있다.
그는 열차 안의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붉은 안광이 터널의 어둠 속에서 빛났다.
격렬한 총성과 군인들의 비명이 미리안의 귀를 두드렸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이단(異端)…….”
리안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단. 세계대전의 악몽. 초능력자. 탄환의 벽을 뚫고, 냉병기로 화기를 도륙 내는, 상식 밖의 무엇.
리안은 중얼거렸다.
“허동주…… 이런 걸 기르고 있었나.”
삽화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