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공략천재는 은퇴합니다. (2)
누가 그랬던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그 쓰임새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고.
진정한 친구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빛을 발한다고.
“나는 지금까지 많은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왔어. 처음에는 친구에게 스킬을 빌렸고, 다음에는 등을 기대었고, 언젠가부턴 웃음을 나누었고, 때로는 눈물을 닦아주었지.”
내 품에서 언제까지고 영롱하게 빛을 내던 꽃 한 송이를 풀어주었다.
“그중에서도 너는 내게 특별했다, 베르단디. 왜냐하면 너에게는 아무런 힘도, 빌려올 스킬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우리 대화도 나눌 수 없었잖아?”
그래서 베르단디는 소중했다.
“너와는 오직 순수하게 우정으로만 이어졌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결국 너의 도움을 받고야 마는구나.
“이건 내 마지막 플랜이야. 도와줄 수 있겠어, 친구?”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나는 알았다.
방금 베르단디의 웃음이 만발하게 피어났다는 것을.
[9층 교도관의 권능이 세계수의 꽃 베르단디에 닿았습니다.]
[베르단디의 성장 속도에 ‘한계’가 사라집니다.]
곧 아무것도 없던 들판의 곳곳에서 마천루와도 같은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무럭무럭 뻗어나가던 세계수가 하늘의 절반을 가리며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내었다.
[세계수 베르단디가 최종 진화 형태로 접어듭니다.]
[베르단디가 푸르가토리움의 아홉 층 전체를 감쌉니다.]
*
누가 그랬던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그 숫자에 연연해선 안 된다고.
오직 한 명의 친구와 식탁에 마주 앉는 것도 세계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며, 수만의 친구를 품어내는 것도 결국엔 한 식탁에 마주 앉는 일이라고.
“관객님. 제가 뭘 하면 되지요?”
“간단해. 지금부터 내가 외치는 말을 베르단디의 가지를 통해 울려 퍼지게 해줘.”
지평선이 휘어져 보일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베르단디의 꼭대기에서 레나스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연금술로 이 거대 수목과 동기화했습니다. 말씀을 전하십시오.”
나는 목청을 조금 가다듬은 다음 허공을 향해 외쳤다.
실제로는 푸르가토리움의 아홉 층 전체에 전달되는 공개 방송인 셈이다.
“친애하는 죄수 여러분.”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레나스의 연금술로 증폭되어 세계수의 가지마다 뻗어나갔다.
“여기는 푸르가토리움의 9층 ‘봉마의 울타리’다. 내 이름은 슈바인 스트링거다. 아마 이 목소리를 듣는 죄수들은 대부분 나를 마주친 적이 있을 거야.”
화룡도의 뚠과 비르카가 느닷없이 울려 퍼지는 교도관의 목소리에 놀라 자빠질 것이 눈에 훤했다.
올쿠레 어르신과 디멜은 조용히 주먹을 불끈 쥐겠지. 내가 최종층에 오르는 데 성공했으니까.
“나를 미워하는 녀석들도 있을 거야. 내가 너무 심하게 쥐어팼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할게. 그래도 끝까지 참고 들어줬으면 좋겠어. 내 이름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녀석들에게도 좋은 제안일 테니까.”
삼월초원에는 지금 몇 개의 달이 떠 있을까.
그 아래에서 천마신교의 신도들은 여전히 목검 한 자루에 의지해 무와 협을 갈고닦고 있겠지.
백묘탑의 형제와 자매들은 그곳보다 더 견고한 것이 진리라는 이름의 감옥이라는 걸 명심하며 마법에 매진할 테고.
“물론, 이건 다른 교도관들과 상의하에 벌이는 일은 아니야.”
대수림에서 내게 혼쭐이 난 밀림의 뱀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폭주하면 자신을 잃어버리는 반인반수들은 지금도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겠지.
“알고 있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내 숙원은 이 빌어먹을 감옥을 탈출하는 거였다. 그것을 막아서는 녀석들을 베어내고 쓰러트리면서 여기까지 왔어.”
숨을 쉴 필요가 없는 인형들이 숨 쉬는 도시.
우리가 난장판을 벌이는 바람에 절반이 파괴되었던 만철도시 또한 이제는 철골과 목재 위에 새로운 활력이 차오르고 있겠지.
그 작은 골목의 소극장에 새로운 공연이 올라갔을까.
“하지만 벽에 부딪혔다. 나는 인정하기로 했어. 아무리 잔꾀를 부리고 꼼수를 빚어내려 해도 이 감옥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걸.”
죽음을 겪지 않고서도 자기 뼈를 들여다봐야 했던 만골사막의 죄수들.
그 어떤 발자국도 지워버리는 모래 위에서 끝나지 않는 방황을 하고 있겠지.
“그래서 결심했다. 여러분이 갇혀 있는 이 감옥의 ‘울타리’를 관장하는 자로서 파격적인 공사를 한 번 해보기로.”
오만한 자들의 보금자리인 천공섬.
압제가 사라진 용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지배할 수 있는 노예들일까, 저들 위에 군림하는 군주일까.
“그 첫 단계에 여러분 모두의 도움이 필요해. 뭐, 엄청난 걸 해달라는 건 아니야. 이 목소리를 듣고 있는 죄수 전원에게 ‘친구신청’을 한다.”
숭배를 거스르는 자들을 심판해왔던 신격의 죄수들은 망각의 강물 위에서 구슬픈 악기를 튕기겠지. 그것이 어느 별에도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친구. 그리고 너희가 원할 때 늘 그곳에 있을 친구. 내가 모두의 친구가 되겠다.”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한 층 한 층.
그렇기에 뒤를 돌아볼 일이 없을 거라 믿었건만,
단 한 번 등을 돌려보니 감옥 전체가 내 품 안에 들어올 만큼 나는 성장했다.
“아, 물론 거절은 거절이야. 강제로 친구 먹을 거거든.”
*
[9층의 교도관이 친구를 소환할 수 있는 권능에 ‘한계’가 사라집니다.]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의 죄수 전원이 9층 봉마의 울타리로 소환됩니다.]
슈욱! 슈욱! 슈우우우욱!
별에 닿을 기세로 솟아오른 베르단디의 위에서 나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초록 일색이었던 들판 전체에 형형색색의 무리가 소환되었다.
곡괭이를 든 채 어리둥절해하는 화룡도의 죄수들. 그 옆에서 백묘탑의 자매들은 황급히 마법진을 펼쳐 자신을 보호하려 들었다. 낮잠을 자다 끌려온 반인반수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여기를 봐라! 나는 이곳에 있다!”
수십 마리의 용이 용감하게도 베르단디의 주변을 경계하듯 날았다.
하지만 내가 우뚝 서 있는 꼭대기를 공격할 간 큰 녀석은 없었다.
“여러분과 내가 친구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우정을 쌓아 나가야 하겠지? 그 첫 번째 선물로 여러분이 지금껏 꿈도 꿔보지 못한 미친 짓을 목격하는 기회를 주겠다.”
줄곧 내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존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교도관장이었다.
“멈추세요, 슈바인 스트링거.”
“왜? 내 친구신청에 너만 쏙 빼먹어서 토라진 거야?”
“지금 농담할 때입니까? 당신이 뭘 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너무 지나쳐요. 다른 교도관들이 결코 좌시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지. 몇몇 녀석은 이번엔 내가 또 어떤 괴상한 짓을 저지를지 기대하는 눈치던데. 그리고 난 이미 교도관들에게 한 번 선포한 적이 있어.”
교도관장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눈빛 속에 당혹스러움이 잔뜩 요동치고 있다.
“이 푸르가토리움은 망했다고.”
“그래서요?”
“이 감옥을 벗어날 수 없다면 내가 달리 뭘 시도할 것 같아?”
교도관장은 내 진의를 간파했다는 듯이 비수처럼 질문을 날렸다.
“감옥을 파괴하려는 건가요?”
나는 가볍게 비수를 튕겨내듯 도리질을 쳤다.
“아니. 그건 네가 아니면 불가능하잖아? 물론, 너는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감옥을 파괴할 생각은 없고.”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만행을…….”
“어디까지나 정당한 절차로 내게 주어진 권한을 이행할 뿐이다.”
내 말투가 갑자기 진지해지자 교도관장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는 다시 인간 모양의 확성기가 되어 있는 레나스에게 말했다.
“내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하지만 이 감옥을 벗어날 수가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어?”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권능을 불러일으켰다.
“이 감옥의 ‘울타리’. 그 한계를 우주 끝까지 넓히겠다.”
등 뒤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교도관장은 혼절하고 싶겠지만 존재의 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9층의 교도관이 푸르가토리움의 경계선을 무한으로 확장합니다.]
[이제 감옥의 죄수들은 전 우주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죄수 전원의 수갑과 족쇄가 해제됩니다.]
세계수의 중심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내.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친구들이여! 여러분이 원하는 곳으로 떠나라! 세상 전체가 감옥이라면 더 이상 누구도 여러분을 죄수라 부르지 않을 테니까.”
*
누가 그랬던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때로는 엄격할 필요가 있다고.
어긋난 길을 걷는 친구를 사려 깊은 말과 단호한 호통으로 다독여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라고.
“지,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요?”
“알아. 죄수들을 풀어줬잖아. 정확히는 감옥의 철장을 무한의 저편으로 보내버린 거지만 개념적으로는 해방이지.”
“권한을 따지진 않겠습니다. 왕좌를 되찾은 왕이여. 당신에겐 그럴 힘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우리가 동의한 것을 정면으로 해치는 패악질입니다. 저 죄수들은 모두가 죄를 저지른…….”
“교도관장.”
“네?”
나는 청발의 소녀와 코가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는 우리의 직함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어?”
“무슨 소리입니까.”
“교도관의 교도(矯導)가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잖아. 안 그래?”
“감옥의 죄수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나는 벼락처럼 녀석의 말을 끊었다.
“교화(敎化)시키는 거겠지.”
그것이 바로 교도관의 책무이자 본질이었다.
하지만 이 푸르가토리움의 교도관들은 감시와 통제, 억압만을 일삼을 뿐 좋은 곳으로 이끌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교도관이 아니라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로서 말하겠어. 인간 박상식의 영혼이 이 감옥에서 보고 배운 바를 주장하겠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교도관장의 앞에서 흔들었다.
“난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까마득한 형량? 그건 결코 죄수를 교화시킬 수 없어. 뒤틀린 신과 르팔타커스가 그걸 증명했잖아. 기나긴 격리 후 풀어주는 것은 결코 두 번째 기회가 아니야. 더 큰 재앙을 키울 뿐.”
“……대체 저들을 어쩔 생각입니까?”
“그걸 이제부터 설명해줄 거야.”
지상에서는 환호가 축포처럼 터지고 있었다.
등반죄수를 꿈꾸었다가 좌절한 죄수들도, 단 한 번도 위를 올려다볼 엄두도 내지 못한 죄수들도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거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서 터전을 잡든 그건 여러분의 자유야.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기를 바라. 바로 내가 여러분의 친구라는 것. 그리고 지금 너희를 이곳에 불러들인 것처럼 언제든 여러분 한 명 한 명을 내가 있는 곳으로 소환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환호가 잦아들었다.
“아, 물론 그 반대도 당연하겠지. 여러분이 이 우주 어느 곳으로 달아나든 나는 찾아낼 수 있어. 당연히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 너희의 옆에 순간이동할 수 있지. 이것이 뜻하는 바가 뭘까?”
나는 혀를 차며 쓰읏 하는 소리를 냈다.
“나쁜 짓하고 돌아다니는 놈이 있으면 내가 바로 출동한다. 자유를 만끽하되, 또다시 악행을 저지르면 그 즉시 척살할 거야. 잘 생각해. 너희가 감옥에 불려온 죄를 다음 생이 아닌 이번 생에서 청산할 기회를 주는 거니까.”
급기야 교도관장이 혼절했다.
물론 그런 척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깨우지는 않았다.
*
많은 죄수가 봉마의 울타리가 있던 경계선을 넘어서 자신들이 있던 세계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본래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문명으로 날아가 버린 죄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들판 위에 남아 있는 죄수들이 있었다.
“방자아아아앙!”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두더지 뚠 아티르나 7번 방의 친구들.
“제자야!”
그리고 자신들의 경지를 오래전에 뛰어넘은 나를 반겨주는 천마와 마녀가 그러했다.
나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반가움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일단 해결해야 하는 숙제 풀기에 임하기로 했다.
“어, 엄마? 아빠?”
들판 위를 달려오는 류운학과 일레인을 향해 달려가려는 아스티나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슈바인.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앞뒤 생각 없이 뭔가를 저지르고 나중에 수습하는 스타일인 건 알지?”
“……뭐길래 그래.”
“그중에서도 이번 골칫거리는 정말로 어려운 거야.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아줬으면 해.”
두쿵.
순간, 아스티나를 중심으로 누군가 차원이라는 북을 망치로 때린 듯 진동이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천마와 마녀도 달려오는 것을 멈췄다.
“아스티나? 괜찮은 거냐!”
천마는 당황했으나 마녀는 조금 더 빨리 사태의 원인을 눈치챘다.
포대에 싸인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설마……?”
나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스승님. 제가 두 분과 아스티나를 구분 짓는 울타리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지금 마녀가 품에 안고 있는 여아는 자라나서 지금의 아스티나 류가 된다.
다른 시간선에서 내가 벌인 일로 인해 강제로 불려온 존재가 아스티나.
그렇기에 이 시간선에서 두 아스티나가 존재하는 것을 우주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아스티나. 내 말 잘 들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겠지?”
“알아. 나는 그라비타스 도미누스의 딸이니까. 내 영혼이 이 시간선의 육체로부터 튕겨 나간다는 거겠지. 이건 그 어떤 법칙으로도 거역할 수 없는 인과율이야.”
“응.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해보려 했는데…… 이것만큼은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어. 교도관장조차 인과율을 거역할 수는 없을 거야.”
세계가 자신을 지우려고 한다.
아마도 아스티나는 우주의 인과율에 살해당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이 될 것이다.
눈물 한 방울이 은발의 마검사로부터 툭하고 떨어졌다.
“괜찮아, 슈바인. 받아들이겠어. 내 육체가 소멸함으로써 엄마와 아빠가 무사할 수 있다면…….”
비장하게 유언을 읊던 아스티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말을 멈췄다.
아마도 내가 방싯방싯 웃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뭐하는 거야?”
“아스티나. 너는 내 소중한 친구야.”
“어?”
“친구를 얻기 위해서 거는 것이 약속이라면,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선 약속을 실천해야 해.”
나를 중심으로 모여든 모든 죄수가 붕괴를 일으키고 있는 아스티나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가까이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인형을 제외하고선.
“부르셨습니까, 관객님.”
나는 레나스에게 손을 뻗었다.
“우리는 친구의 맹약을 맺은 적이 없지, 레나스.”
“맞습니다. 저는 작동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니까요. 거기에 유감은 없습니다.”
“하지만 너를 만든 연금술사 그룬덴 사니릭투스를 나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가 나에게 남긴 최후의 부탁을 이제 들어주려 한다.”
성큼성큼 다가오던 레나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룰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제…… 숙원을요?”
“그래.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거든. 잠깐 배에 손을 올리는 것을 허락해 줘.”
그룬덴 사니릭투스의 숙원.
그리고 그의 손길에서 만들어진 인형 레나스의 존재 이유.
바로 영혼을 갖게 되는 것이다.
레나스의 동체를 어루만지자 오토마타의 코어인 마정석이 내 힘에 반응하며 광휘를 내뿜었다.
[9층의 교도관 ‘왕좌를 되찾은 왕’이 오토마타 레나스의 마정석에 접촉합니다. 인형이 습득한 무장연금술의 한계를 해제합니다.]
레나스의 키가 아주 조금 자라났다. 팔다리의 길이도 조금 늘어났다. 그 그림자가 아스티나의 그림자와 겹쳐지고 있었다.
[오토마타가 금속 동체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피와 살을 가진 육체로 진화합니다.]
[원하는 형태로 빚어지기 시작합니다.]
레나스의 머리카락이 은발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신과 정확히 똑닮은 존재가 눈앞에서 조립되는 것을 보며 아스티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스티나.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야.”
“내가…… 레나스와 합쳐지는 거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가진 육체를 그대로 복사해내는 거니까. 레나스의 의식은 부르면 언제든 너의 내면에서 응답할 거야.”
“새 몸이 내 영혼을 품게 되면…….”
“시간선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마음껏 가족을 품에 안을 수 있겠지.”
이것은 내가 펼치는 가장 뛰어난 속임수.
무려 우주의 인과율에 치는 한바탕 사기다.
폭발하는 빛과 함께 아스티나와 레나스가 서로 융합했다.
*
불 꺼진 강당에 교복을 입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래전 심마에 빠졌던 내가 바라봤던 풍경 그대로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 심마가 만들어낸 풍경이 아니라는 것과,
눈앞의 여동생 상희가 진짜 상희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오빠?”
객석의 가운데를 뚜벅뚜벅 걸어오는 나를 알아본 상희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물러서는 듯하더니,
이내 내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이거…… 꿈이야?”
나는 발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상희야. 여기는 네가 꾸는 꿈속이야.”
입술을 앙다문 모습.
내가 평생을 보아왔던 강인한 아이의 그것이었다.
자기가 울면 언제나 내가 한걸음에 달려왔기에, 그리고 자기보다 더욱 크게 울먹이는 오빠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무의식중에 굳어버린 습관.
“한동안 꿈에 안 나타나더니 왜 갑자기 나왔어. 왜!”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나 이제 많이 괜찮아. 오빠가 죽은 지 일 년이나 지났는 걸.”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아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교도관장이 내게 내준 메인퀘스트 #탈옥.
나는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하는 시공간으로 이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푸르가토리움에서 목숨 걸고 등반했던 시간 동안 상희는 오빠가 죽어버린 세계에서 고난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받아. 오빠가 우주의 끄트머리에서 모아온 꽃다발이야.”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달맞이꽃. 그리고 무려 세계수 베르단디의 꽃잎이 섞여서 만들어진 꽃다발이었다.
상희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들썩이는 어깨를 지켜보다가 나는 말없이 상희를 감 싸안아줬다.
“늦어서 미안해.”
“조금만 더 오래 있어 줘. 꿈에서 깨면 오빠는 없고 나만 남은 현실을 깨닫는 건 너무 괴롭단 말이야.”
“하하. 이제 내가 왜 꿈을 빌어서 네 앞에 나타났는지 밝힐 시간이네. 이게 모두 사랑하는 여동생의 심장마비를 방지하기 위한 스텝의 일환이란다.”
상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내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말이야. 죽은 줄만 알았던 내가 네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을 거거든.”
“……그게 말이 돼?”
“나 혼자도 아니야. 내 손바닥보다 작은 요정도 함께 왔어. 토니아가 많은 준비를 해줬기 때문에 일어나서 비명은 마음껏 질러도 돼. 한국의 층간소음이 워낙 개떡 같아서 이 오빠가 그토록 치밀한 준비를 했단 말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앞으로 시간은 충분하니까.”
내 품에 안긴 채 상희는 조곤조곤 속삭였다.
“정말로 깨면 오빠가 있는 거야?”
“응.”
“이 모든 게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고?”
“아니야. 지금은 볼을 꼬집어도 안 아프겠지만 깨어나면 직접 꼬집어 봐.”
“왜 오빠가 안 꼬집고?”
“하하. 이제 내가 뭔가를 꼬집으면 차원이 박살 날 정도로 강해져 버리는 바람에 말이지.”
“그런 농담 재미없어.”
그렇게 상희의 꿈속에서,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미뤄둔 대화를 나누었다.
이 순간이 꿈이라고 믿는 동생과,
언제나 이 순간을 꿈꿔온 오빠의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
서울의 야경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밤을 간지럽히는 자동차의 경적과 술에 취한 누군가의 울음소리.
산책 나온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소리가 한데 섞인 언제나 같은 도시의 야경 말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마천루의 꼭대기에 은발의 마검사가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점일 것이다.
“늦어서 미안해, 아스티나.”
“괜찮아. 사실 아래의 풍경을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거든.”
흑기사의 갑옷은 더는 없었다. 그것은 아마 아스티나가 새로 얻었다는 대학 기숙사의 옷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더는 갑옷이 필요 없을 만큼 아스티나가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나 남았어?”
“22분 정도. 그런데 토니아가 안 보이네?”
“상희랑 있어. 동생과 정이 듬뿍 들어버려서. 지구에 돌아온 지 육 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야 요정이 환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였어.”
“괜찮아. 어차피 토니아의 회복술이 필요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흠흠. 그렇다면 제르비어스나 캉이가 못 온 것도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
원래 아스티나가 호출하면, 정확히는 아스티나의 의식 속에 잠재된 레나스가 부르는 것이지만.
만사를 제치고 달려온다는 것이 정해진 약속이었다.
하지만 제르비어스는 요즘 들어 꾀를 많이 부렸다.
조금 전 귓속말로 녀석과 나눈 대화를 복기해봤다.
‘이 헛뿔 달린 자식아. 이번에도 안 오면 아스티나가 화낼 거라고!’
‘용사야. 정 급하면 순간이동으로 소환하면 되잖냐. 어차피 이제 횟수 제한도 사라져서 하루에 수천 번도 부를 수 있는걸.’
‘그럴 거면 미리 와 있으면 되잖아!’
‘용자물 페스티벌이 이 나라에서 안 열리는 걸 어쩌라고! 네 놈이 날 소환하는 거야 순간이지만 다시 바다를 건너 제트카이저 박물관에 가려면 얼마나 개고생해야 하는데.’
‘어휴. 말을 말자. 어차피 캉이가 있으면 되니까.’
‘아. 미안한데 이번엔 캉이도 못 갈 거다.’
‘아니, 왜! 분명히 지금 투어도 쉬고 있는 상황 아니야? 세상에 무슨 아이돌이 휴식 시즌에도 그렇게 바쁘냐고!’
‘사실은 안 바쁘지. 그런데 일부러 안 갈 거다.’
‘어째서?’
‘흐흐흐. 용사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모르겠는데.’
‘당연히 너랑 아스티나 둘만 있는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지, 짜샤.’
‘……죽여버린다. 현해탄을 날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크하하하. 이번엔 꼭 붙잡아보라고. 숙맥 같은 용사 놈아.’
내가 혼자서 한숨을 쉬고 있자 아스티나가 내 이마에 불쑥 손을 올렸다.
“박상식. 어디 아파?”
“우아아앗! 아니거든? 그나저나 이제 그 이름으로 날 부르는 게 익숙한 모양이다?”
“적응해야지.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 레나스티나 같은 웃기지도 않은 이름으로 부르지 마. 레나스가 불쾌해하고 있어.”
나는 화들짝 놀랐다.
“레나스가 감정을 갖기 시작한 거야?”
“응. 아주 조금씩이나마. 아마도 연금술로 인체를 연성하는 데 성공하면서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간 모양이야.”
육체를 아스티나에게 내어준 대신에 감정을 익혀나가는 오토마타의 의식이라니.
“등가교환인가.”
“맞아. 그런데 왜 웃어?”
“아, 내가 어릴 때 이 지구에서 엄청 유행했던 만화책이 떠올라서.”
“그거 나도 읽어봤어.”
“에엑? 정말?”
“응. ‘연금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니까 레나스가 궁금해해서 읽어본 적 있거든. 저번엔 제르비어스가 출장 나갔을 때 그 만화의 피규어도 사다 준 적 있어.”
출장이라니.
폭렬마왕 오타쿠에겐 너무 거창한 단어다.
“그 자식. 제발 뿔좀 숨기고 다니라니까.”
“뭐, 어때. 사람들이 전부 코스프레 마니아로 생각하는걸. 제르비어스는 은근 SNS 인플루언서야. 2호선의 마왕 코스프레 덕후로 유명해.”
어느덧 지구의 용어들에 잔뜩 익숙해진 아스티나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스티나는 현재 한국 최고의 공대에서 수학하는 공학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가 지겹진 않아?”
“응. 괜찮아. 꿈을 향해 한발씩 다가가는 거로 생각하면 설레기까지 하는걸.”
아스티나가 서울의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아스티나의 새로운 꿈은 우주비행사가 되어 달을 밟는 것이었다.
“그 꿈. 솔직히 잘 모르겠다.”
사실 아스티나가 마음만 먹는다면 중력 마법을 극한까지 시전해 달에 다녀오면 되는 일이다.
지금의 아스티나는 그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없지. 네가 날 데려온 이 세계엔 마법이 없잖아. 대신에 그 자리를 과학이 대체한 거고. 나는 과학의 힘으로 엄마가 했던 ‘참월’의 업적을 따라잡을 거야.”
“어쨌든 보기 좋네. 사실 나는 아직도 그냥 백순데.”
다시 지구로 돌아와서 게임 속을 전전하던 알파테스터가 된다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 어떤 게임보다 악독한 감옥을 주파했던 세월의 생생함 때문일 것이다.
아스티나가 난간에 걸터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나는 군말 없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자동차의 백라이트가 만든 강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타천의 강가 같다는 생각을…… 에잇! 그만!
잠깐만 방심해도 푸르가토리움을 떠올리고 만다니깐.
“박상식.”
“응?”
“꿈이라고 해서 생각났는데 상담 같은 걸 좀 해줄 수 있어?”
“어, 말해 봐.”
아스티나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내가 최근에 같은 꿈을 반복해서 꿔.”
“그래? 내가 온갖 재주를 갖고 있긴 하지만 딱히 해몽의 스킬 같은 건…….”
“꿈을 해석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이야길 들어달라는 거지. 왜냐하면 그 꿈에 등장하는 게 바로 너거든.”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티나의 꿈에 왜 내가 반복해서 등장한단 말인가.
“무슨 꿈이길래.”
“나는 화룡고등학교라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야. 그곳에서 선도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지. ……왜 식은땀을 흘리고 그래?”
“아, 아니야. 계속해 봐. 그래서?”
“이상한 일이잖아? 꿈은 지나온 과거의 기억을 자는 동안 재조립하는 무의식의 작용인데. 나는 푸르가토리움의 2층 백묘탑에서 모든 지식을 배웠어. 마법사 자매들 모두가 내 선생님이긴 했지만, 진짜 학교에 다닌 적은 없단 말이야. 그런데 왜 학교가 꿈에 나올까?”
“너, 너도 지구에서 제법 오래 지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그러기엔 진짜 경험한 것처럼 너무 생생한 꿈이야. 그곳에서 나는 강당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교복을 입은 네가 등장하면 검을 들어서 한바탕 칼춤을 추지.”
“……그리고?”
“내가 하는 대사는 들리지 않아. 아마 주체가 나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꿈속의 네가 말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어.”
“내가 뭐라고 하는데?”
“기다려달라고 해.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확실하다. 아스티나가 반복해서 꾸는 꿈은 내가 몽현의 신 니오프론과 싸울 때 만들어냈던 몽중몽이 틀림없다.
‘선도부의 검은 연인에게라면 휘둘러지지 않아. 즉, 네가 내 남자친구가 되면 돼.’
‘……어?’
‘선택해. 나랑 사귀든가. 여기에서 죽든가.’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우주의 인과율도 속인 나에게 어째서 이런 일이!
“왜인지 알 수 없지만, 꿈속에서 나는 네 대답을 재촉해. 그리고 그 답을 듣고 싶다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 그 답을 듣기 위해서라면 우주 끝까지라도 널 쫓아가고 싶어진달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짬을 내서 엄마를 찾아갔었어.”
“스승님을?”
“어. 물론 왜 중간고사 기간에 집중 안 하고 차원이동을 하느냐며 혼이 나긴 했지만 어쨌든 엄마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지.”
“뭐라셨는데?”
아스티나는 확실히 마검사였다.
그렇기에 마법적인 눈빛으로 나를 베어낼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꿈속의 인물이 아니라 현실 속의 인물이 답을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
“…….”
“그래서 묻는 거야. 슈바인 스트…… 아니, 박상식. 꿈속의 네가 나한테 들려줄 대답이 뭔지 너는 혹시 알아?”
아스티나는 이야기하는 동안 줄곧 내 얼굴을 집요하게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의혹은 일종의 확신이 된 모양이다.
내가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외통수다.
이거 어떻게 빠져나가지?
그때, 밤하늘을 찢으며 불길한 마력의 파동이 일어났다.
나는 화색이 돈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쿠야! 벌써 게이트가 열릴 시간이 되어버렸네!”
그러자 아스티나는 뭔가 아쉽다는 듯 슬그머니 일어나며 현무패웅검을 골프백에서 꺼냈다.
“이걸로 얘기 끝난 거 아니야. 알겠어?”
나는 아스티나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시커먼 포탈만을 노려보았다.
‘으흠. 일부러 싸움을 좀 길게 끌고 가야겠구만.’
즈우우우우우웅.
포탈이 최대크기로 확대되는 동안 아스티나는 세 개의 마법진을 띄운 후 반경 30킬로미터를 커버하는 초대형 결계를 만들었다.
이제 포탈에서 튀어나온 존재는 서울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게 된다.
“슈바인 스트링거! 우리들이 왔도다아아아아!”
“흐음. 이거 익숙한 목소리네. 그런데 우리들? 한 놈이 아닌가 본데.”
“우릴 도와줄 동지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머리색을 바꾸고 얼굴을 숨긴다 한들 소용없다. 네 놈을 죽이고 비로소 진짜 자유를 획득하겠다아아!”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포탈에서 튀어나온 것은 수백 마리의 용이었다.
가장 덩치가 큰 용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었다.
“폭룡 발카드. 새로운 세계에서 동족들을 좀 끌어모은 모양인데.”
그리고 용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는 흑마법사.
“골제 바르한. 어디서 쓸만한 지팡이를 구했나 봐.”
그 둘과 용의 군단만 해도 막강한 적이긴 하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꽤나 그리운 얼굴들도 있었다.
“냄새 나는 7번 방장! 이번에야말로 너의 피로 목욕하겠다.”
“물러서 있어, 저 망할 놈은 내 손으로 숨통을 끊어줄 거다!”
화룡도의 4번 방장 오르콰이움.
그리고 식인 홉고블린 차카 도기노브였다.
나는 아론다이트를 잠깐 옥상의 바닥에 내려놓은 뒤 국민체조를 시작했다.
아스티나의 눈에 게슴츠레해졌다.
“혼자 싸우려고? 꽤 많이 몰려왔는데? 특히 골제를 견제하려면 내가 있어야 할걸.”
“아니야. 간만이라서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 할 것 같아.”
아스티나는 순순히 물러섰다.
“밀리는 것 같으면 참전할 거야.”
“알았어.”
“빨리 끝내. 나 레포트 두 개 밀려 있단 말야.”
“넵! 명을 받들겠습니다.”
봉마연옥에서 뛰쳐나온 흉흉한 적들이 도시의 평화를 일그러뜨리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론다이트를 휙휙 휘두르면서 나는 경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가끔은 지상전을 치르고 싶긴 하지만, 무고한 일반인에게 피해를 줄 수 없으므로 이번에도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승부를 끝내야 할 듯싶다.
“들어라, 말도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 친구들아.”
별로 소리쳐서 외친 것도 아닌데 침범해 온 녀석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갱생의 기회를 줬는데도 스스로 걷어찼으니…… 이번엔 진짜 매운맛을 보여주겠다. 열라 척박한 얼음 행성으로 코다리에 묶어 보내주지. 물론 그 과정에서 몇 놈 뒈져도 어쩔 수 없고.”
내 선전포고를 듣던 아스티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감옥에 있을 때 다 죽이는 게 나았을 거야. 진작 내 말을 들었어야지.”
나는 싱긋 웃으며 그 말을 받아쳤다.
“그럼 너무 심심해지잖아. 은퇴하긴 했지만 내 본질은 게이머니까. 아스티나. 게임 속에서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고 자꾸 고난을 던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푸르른 검기가 아론다이트에 맺혔다.
“그건 내가 올바른 루트를 밟고 있다는 신호야.”
옥상 위의 하늘에서 우리의 시선이 교차했다.
문득 가을바람의 청량함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플랜은 세웠어? 어떻게 공략할지.”
“필요 없어, 그런 거.”
평소처럼 아스티나가 물었으나,
나는 평소와 다른 대답을 마지막으로 내놓았다.
“이제 내가 아니라 저놈들이 나를 공략해야 할 테니까.”
쐐애애애애액!
나는 한줄기 빛살이 되어 폭룡 발카드의 볼기짝을 후려쳤다.
좋구나.
용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소리야말로 서울 하늘에 딱 어울리지, 암.
*
세상엔 깨지 말라고 만든 것들이 있다.
나는 그것들만을 골라 깨왔다.
누군가가 설계한 극한의 지옥을 돌파하면서 살아왔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설사 신이 설계한 함정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엔 반드시 허점이 있고 돌파구가 존재하며 판을 한 방에 뒤집을 수 있는 지렛대가 숨어 있기 마련이니까.
젠장.
근데 이놈의 팔자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내가 온 우주에 뿌려둔 못난 친구들이 자꾸만 비뚤어지려고 한다.
어쩌겠는가. 이건 내가 선택한 아수라의 길.
운명이란 놈은 늘 직구가 아닌 변화구만 던져대기 마련이지만.
내 앞의 마운드에 서는 놈은 내가 받아친 강타구에 머리가 쪼개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봉마연옥을 파괴한,
공략천재의 은퇴 소감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