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공략천재는 은퇴합니다. (1)
[9층의 교도관 ‘왕좌를 되찾은 왕’의 고유권한이 화신체에게 이양됩니다.]
[옥왕의 고유권한은 ‘울타리의 지배자’. 화신체가 가진 모든 신체 스탯의 한계가 해제됩니다. 또한 모든 권능의 시간제한과 횟수 제한도 사라집니다.]
나는 푸르가토리움의 최종층인 9층의 교도관.
신격을 되찾음으로써 선물 받은 능력을 마음껏 해방할 수 있게 되었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울타리의 지배자’라는 권능은 무려 삼라만상의 한계를 마음껏 지정할 수 있는 능력.
지금껏 만났던 모든 죄수와 교도관의 스킬과 권능을 압도할 만큼 뛰어난 ‘패왕의 힘’이었다.
푸하아아아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첫 번째 일격은 르팔타커스 시온의 팔을 잘라내지 못했다. 어깨에 손바닥 한 뼘 정도의 자상을 내는 데 그쳤다.
“격이 달라졌구나, 후인이여. 정녕 지금껏 짐이 지켜봐 온 자가 맞는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르팔타커스는 번거로운 파리를 노려보는 눈빛으로 물었다.
“다시 죽이면 또 살아나려는가.”
“그러긴 힘들 겁니다. 이번에 제가 진다면 교도관이 죄수에게 직접 무릎을 꿇는 거니까요. 부활한다 해도 그때 당신은 이미 탈옥을 마친 뒤겠지요.”
“좋군.”
순간 르팔타커스가 전신에 오러를 두르더니 벌어진 어깨를 재생시켰다. 순식간에 상처를 봉합한 것이다.
“여기는 좁으니 장소를 옮길까.”
“그러지요. 따라가겠습니다.”
르팔타커스는 정문을 이용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저 신전의 기둥과 벽을 무너뜨린 뒤 바깥으로 사라졌다.
“아스티나, 받아.”
지금껏 인벤토리에서 썩고 있던 엘릭서 세 개를 던졌다.
“친구들을 치료해줘.”
제르비어스와 캉이는 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늦지 않게 소생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곧 따라갈게.”
“아니. 여기서 기다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너…… 정말 내가 아는 슈바인이 맞아?”
아스티나는 내가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를 보이자 의아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전불패의 검투사, 극강의 경지에 오른 전사와 생사를 건 싸움을 앞두고 있는데도 내 마음은 호수처럼 차분했기 때문이다.
“다녀올게.”
*
르팔타커스 시온은 텅 빈 들판에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맹수는 낮잠을 자더라도 초원을 공포에 떨게 한다.
지금의 저 사내가 바로 그런 경지였다.
나는 그의 코앞으로 걸어갔다. 평소라면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정도의 위험한 영역.
르팔타커스가 눈을 떴다.
“일말의 미혹도 없어 보이는군.”
“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싸웠던 강적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둘이 아니었지요. 제게 패배했으나 동료가 된 자도 있었고, 설득이 불가능해 죽인 적도 있었죠.”
“짐은 그들과 다를 것이네.”
“그렇겠죠. 애초에 당신은 설득 불가능한 자니까요.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세계를 뒤엎은 자니까.”
“그것은 그대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뜻에 설득되느니 죽음을 택하는 편 아닌가.”
“맞아요. 우린 닮았습니다.”
그가 기원검으로 바닥을 겨누었다.
나는 아론다이트를 포개듯이 그 대검에 갖다붙였다.
[친구와의 동조로 만전불패의 체술이 Lv. Max로 오릅니다.]
내 오른손의 사자 문신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우스운 일이다. 르팔타커스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덤벼드는 자에게 스킬을 빌려주고 있는 셈이다.
‘절교’를 택한다면 ‘탈옥’도 동시에 포기하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숙명의 맞대결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와 검을 맞대는 순간 수많은 투로가 동시에 그려졌다.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뇌가 익어버릴 만큼 상대의 공격 방법은 다양했다.
하지만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마치 논검(論劍)을 하듯 서로를 절대영역 속에서 튕겨내기 위해 싸웠다.
카아아앙!
르팔타커스가 만든 검막과 내 검기가 동시에 충돌하면서 지면에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우린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내던져졌으나 살기 어린 검격으로 상대를 튕겨내느라 지면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차분한 심정 가운데에서도 샘물 같은 환희가 넘실거렸다.
‘보인다. 그의 공격이.’
그저 막강하게만 보였던 르팔타커스의 움직임을 조금씩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공격 일변도로 무장한 전사였다.
상대가 숨 쉴 틈,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온갖 각도에서 덤벼 온다.
마치 ‘죽이겠다는 의지’를 펼쳐 온 우주를 감싸버리겠다는 듯.
밀리지 않기 위해 내가 택한 전술 역시 강공.
우리는 거울처럼 서로의 목을 노렸다.
“후인이여. 그대를 두 번 죽이게 되어 유감이다.”
“저도 당신을 두 번 소멸시킬 참이니 괘념치 않아도 됩니다.”
“짐은 이 감옥에 받아내야 할 피 값이 있다.”
“사실은 이 감옥뿐 아니라, 온 세계에 그 피 값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이 있던 세계를 엿본 적이 있어요.”
아홉 신이 인간을 핍박하던 세계.
눈앞의 사내는 그곳에 군림하던 신들을 일거에 휩쓸었다.
인간으로 신화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만인지상의 존재가 되었다.
“당신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세계를 돌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겠죠.”
“짐에겐 그럴 의무가 없었다.”
“압니다. 당신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겠다고 천명한 자. 그 누구보다 천공돌파란 네 글자가 어울리는 분이지요.”
“그대는 어떤가.”
“저는 울타리의 안쪽을 살피는 자입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웃음 짓는 자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겠군.”
르팔타커스의 허벅지가 터질 듯 팽창하더니 공중을 도약대 삼아 돌진해 들어왔다.
스킬로 움직임을 파악하는 단계는 진작에 극복했다.
만 번의 싸움에서 이겨온 자에게 겨우 백 번의 싸움을 치러온 내가 응수할 수 있었던 건 내 검에 친구들의 숨결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폭렬마법.
류운학의 무극파천공.
일레인 쿠디슈의 중력 마법.
구미호의 만다라와 페어리의 정령술.
그 모든 묘리가 내 안에서 ‘한계 없이’ 융화되고 있었다.
“웃고 있구나, 후인이여.”
“제가 할 말인데요. 당신이 웃는 것도 처음 봅니다.”
“즐거움을 감출 수 없군. 경지에 오른 이래 처음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호적수를 만났으니까.”
르팔타커스의 옆구리가 한 움큼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나 또한 목덜미가 썩둑 잘릴 뻔했다.
“용호상박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승부는 정신에서 갈리게 된다. 짐에게는 부러지지 않는 집념이 있지. 그대에겐 그것이 없다.”
“집념하면 저도 뒤지지 않는데요.”
“짐은 온전히 이 싸움에 집중하고 있다. 내 숨이 다하더라도 그대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품고 있지. 그대에겐 그것이 없다. 왜냐하면 짐을 꺾은 후엔 어차피 친구들의 심장과 피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 싸움은 장기전이 될 필요가 없다. 그대가 그렇게 만들고 있어.”
확실히 아픈 구석을 찌르고 있었다.
내가 결착을 미루고 있다는 걸 간파당한 것이다.
“짐과의 싸움을 백 년 만년 끌어가는 것은 예고된 비극을 미루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어설픈 각오로는 짐의 급소를 꿰뚫을 수 없노라!”
르팔타커스의 주먹이 망치처럼 나를 내리쳤다.
싸움에 접어든 이후 그가 처음으로 육박전을 걸어온 것이다.
그가 기원검을 양손에 붙잡은 뒤 포효했다.
“수백 년이 걸렸다. 무려 수백 년 동안 나와 같은 고지를 밟을 수 있는 죄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칼처럼 자신을 벼려왔다. 누가 이 일검을 받아낼 텐가!”
낙뢰처럼 떨어져 내리는 기원검을 수직으로 받아쳤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이 바로 코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확실히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
“그러나 그건 서로가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도 제가 없었으면 영원히 부활할 수 없었겠지요. 거기서 승부가 갈릴 겁니다. 제가 당신의 궤변을 격파할 테니까요.”
“짐이 궤변을 내뱉는다고 주장할 셈인가.”
“당신은 자신을 스스로 봉인했습니다. 오로지 독존으로 살아오는 법밖에 몰라서 죽음으로 달아난 겁니다. 기원검의 뒤틀린 힘에 의지해 물러선 거죠.”
조금씩 내가 파천황의 검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당신은 한 번 포기한 겁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어떤 적에게도 무릎 꿇어본 적 없고, 그 어떤 벽도 부수지 못했던 적이 없는 절대자가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으니 당황하고 억울했겠지요.”
“그것이야말로 짐을 능멸하는 궤변이다!”
힘 대결에서 튕겨 나간 르팔타커스가 거리를 벌렸다.
잠시의 소강상태.
내 입은 멈출 줄 모르고 말을 쏟아냈다.
“만약 바깥세상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아니, 당신이 돌아가고 싶은 보금자리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요.”
천지가 요동치고 있었다.
르팔타커스는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걸어올 것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충돌이 일어나면 서 있는 자는 한 명뿐일 터.
“당신은 수백 년을 버틴 게 아니야. 스스로 도망쳤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을 뿐.”
그의 검이 태산 같은 검기를 내뿜고,
나의 칼이 해일 같은 검기를 토해냈다.
“나는 너와 달라. 단 한 번의 후퇴 없이 여기까지 올라왔어.
우리는 우주를 뒤엎을 기세로 충돌했다.
“감히 짐을 평가하겠다는 건가.”
“이 우주에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건 오직 나뿐이거든. 내 존재 자체가 바로 당신을 ‘공략’하기 위해서 빚어졌으니까.”
!!!!!!!!!!!!!!!!!!!!
아주 잠깐 하늘이 찢어지며 무저갱의 공간이 드러났다.
그것이 평소대로 되돌아왔을 때,
나는 지면에 발을 디뎠다.
돌아오는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판 위엔 주인을 잃어버린 기원검만이 쓸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
누군가의 손길이 내 어깨에 닿았다.
아스티나가 그곳에 서 있었다.
“끝난 거야?”
“응.”
“조금도 기쁜 표정이 아닌데.”
“처음으로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죽였거든.”
“……돌아가자. 모두 널 기다리고 있어.”
신전 안에는 엘릭서로 상처를 치유해 멀쩡해진 친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은 숨기지 못했다.
조금 전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없었을 테고, 르팔타커스를 쓰러트렸다 한들 9층의 시련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존재했으니까.
“다들 놀랐지? 나한테 일어났던 일을 숨김없이 이야기해주고 싶어. 그래야 내가 내릴 선택 역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9층의 교도관을 만나서 내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된 것, 교도관의 화신체로 태어나 르팔타커스와 맞선 것 모두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된 거야.”
잠자코 충격을 다스리고 있던 친구들 사이에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내 첫 번째 동반자였던 제르비어스였다.
“용사야. 그러니까…… 네가 교도관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냐. 지금까지 네가 했던 개소리 중에서 가장 믿기 힘든 개소리다.”
“이해해. 하지만 진짜야. 곧 여길 찾아올 녀석을 만나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다.”
“누가 온다는 건데?”
파아아아앗!
예고 없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강렬한 백색의 섬광.
푸르가토리움의 소환빔과 정확히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9층의 교도관 왕좌를 되찾은 왕이 보낸 초대장에 응답받았습니다.]
빛이 떨어진 자리엔 청발의 소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모두가 흠칫 놀라는 가운데 오직 캉이만이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나.”
“그럴 수밖에. 우리가 계속 만나왔던 녀석이거든. 지금까지는 줄곧 곰 인형 속에 있었지만 말이야.”
“에엑! 교도관장이라고?”
푸르가토리움의 관리자이자 아카식 레코드의 주인이 모두에게 간단히 목례했다.
그리고는 내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할 약속이 몇 개 있잖아? 잊지는 않았겠지, 교도관장.”
교도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작은 것부터 처리하도록 할까요.”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마도서 단탈리온을 소환해 펼쳐 들었다.
[용사님.]
“그동안 나를 도와주느라 고생 많았다, 단탈리온.”
[저 역시 용사님을 보필하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이라도 펼쳐지지 않으면 공허할 뿐이라는 걸 배웠죠. 감사합니다.]
“내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지금까지는 몰랐습니다. 교도관장님이 허락해주지 않으셨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래. 그 어떤 허락도 구할 필요가 없겠지. 네가 꿈꾸던 도서관에서 행복하게 지내거라.”
단탈리온이 교도관장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지의 마도서를 갈무리한 교도관장은 이번엔 내 수갑을 어루만졌다.
“당신의 신상이 죄수에서 교도관의 화신체로 격상되었으니 이것은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용도 폐기되는 거죠.”
딸깍.
굳건한 수갑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그사이에 적힌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잊지 마, 슈바인 스트링거.’
그러고 보니 이 문구는 분명 교도관장이 새긴 거였을 거다. 나는 만골사막에서 해골이 되었을 때야 이 문구를 발견했었다.
“대체 이건 무슨 뜻이었던 거야? 대체 뭘 잊지 말라는 거였어?”
그러자 교도관장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했다.
“당신이 어순을 잘못 받아들인 겁니다.”
“어순?”
“슈바인 스트링거라는 이름을 잊지 말라고 한 거지요. 아카식 레코드식으로 번역하면 이것은 ‘감옥의 왕’이란 뜻입니다.”
9층의 관문에서 마주쳤던 문제.
그것에 대한 힌트가 처음부터 내 수갑에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슈바인 스트링거를 당신이 지은 게임 캐릭터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셨지요?”
“……맞아.”
“그 역시 뒤바뀐 어순처럼 인과가 바뀐 겁니다. 당신의 무의식에 있었던 이름을 분신에게 준 거지요.”
“재미없는 장난이었어.”
“제게 한탄해도 소용없어요. 애초에 제 발상이 아니라 당신의 발상이었으니까.”
“이제 전부 말해줄 수 있겠지?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약속에 대해서.”
*
“제가 만들어낸 봉마연옥 푸르가토리움에 중요한 결함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것은 르팔타커스 시온이라는 죄수였습니다.”
형량이 높은 죄수일수록 탈옥을 꿈꾸게 된다.
그 때문에 강한 죄수가 들어올 때마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강력한 억제력을 설계했다.
교도관이 만들어내는 시련.
“그것은 곧 딜레마에 부딪히게 되었죠.”
교도관장은 온갖 차원에서 한 세계를 붕괴시킬 정도로 강하고 악독한 죄수들을 가뒀다.
그런 방식으로 우주가 성장할 수 있는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무릇 생명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요. 피부가 있으매 자신을 가둔 족쇄를 느낄 수 있고, 눈이 있으매 세계를 둘러싼 장벽을 볼 수 있으며, 다리가 있으매 그 장벽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지요.”
감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탈옥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저는 교도관들을 선정하고 그들의 힘으로 감옥을 점점 견고하게 만들었으나 바로 그것이 필연적으로 언젠가 탄생할 ‘탈옥자’를 상정하게 되었습니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흉악범을 모두 가둬놓고 통제하기로 한 것이 포식자들을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포식자 중에 가장 강력한 포식자를 탄생시켜 세상에 내보내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이다.
“용사가 필요했습니다. 정해진 인과에 따를 뿐 오욕칠정으로부터 초탈한 관리자가 아니라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 말이죠.”
“그게 나였어? 우주에 많고 많은 강자 중에서 왜 평범한 인간을 골랐지? 인간 박상식의 무슨 점이 특별했길래.”
지구에서의 나는 지지리도 운 없는, 뼈 빠지게 고생만 한 패배자였을 뿐이다.
결코 용사라 불릴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물리력이나 전투력은 우리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9층의 교도관, 즉 화신체로 분리되기 전의 당신이 직접 박상식의 삶을 고른 겁니다.”
“이유를 알아?”
“그래요. 당신은 정말이지 우주에서 손꼽힐 만큼 불운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독하게 외로웠고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사고로 떠나보냈지요.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에게 용기를 줄 친구도, 사랑을 알려줄 연인도 없었지요.”
그렇게까지 신랄할 건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삶을 놓지 않았습니다. 불운에 물러서지 않고 또 하루를 살아내었으니까요. 무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는 당신이라면 이 도박을 걸어볼 만하겠다고 동의한 거지요.”
이 흉악한 감옥에서 언젠가 탄생할 최악의 죄수를 쓰러트릴 단 한 명의 구원자를.
기나긴 이야기를 마친 교도관장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입니다.”
나는 진정한 교도관의 화신체로 다시 태어났다.
“이전의 시련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련을 펼쳐낼 것인지. 두 개의 길이 당신 앞에 놓여 있지요.”
이전의 시련을 유지한다면 나는 르팔타커스 시온을 죽였듯이 나와 인과의 끝으로 묶인 친구들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
새로운 시련을 구축한다면 만생의 문을 열어 다른 친구들을 바깥세상으로 해방시켜줄 수 있게 된다.
대신에 ‘슈바인 스트링거’는 이 9층에 영원히 속박되어 푸르가토리움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그것이 교도관장의 설명이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당신 혼자만의 자유와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의 자유. 둘 중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 알고 있어?”
교도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여전히 당신은 아카식 레코드에서 벗어나 있는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결정하는 순간 푸르가토리움의 격동하는 세계선은 단일 시간선으로 묶이게 될 겁니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군.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친구들이 오로지 내 입이 떨어지기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겠다.”
단호한 대답에 교도관장이 물벼락을 맞은 고양이처럼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