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왕의 이름 (5)
“으아아아악! 빌어먹을!”
양팔을 허우적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동작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왼팔과 오른 다리가 무참하게 잘려 나갔던 순간의 허망함.
그리고 심장이 꿰뚫려 즉사했을 때의 지독한 무력감과 불쾌감이 아직도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모든 동작이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으이이이익!”
“비명 지르지 마. 귀가 아프단 말이야.”
“어어?”
“어어?”
나는 내 등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처음에는 거울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금발 벽안의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
그런데 지구인 청년 박상식이 보인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죽어서 벌써 저승에 온 건가?”
그러자 또 다른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어.”
“죽은 건 맞지만 저승은 아니다?”
“그래. 완전히 몹쓸 머리는 아니네, 너.”
“이 자식이 그런데…… 왜 내 말투를 따라 하는 거야?”
그러자 박상식의 모습을 한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왠지 준거 없이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눈앞에서 웃어젖혔을 때 내 상대들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누구냐, 너.”
“질문이 잘못됐어. 내가 누군지를 묻기 전에 주변을 한 번 둘러보는 게 어때? 그래야 이야기 진행이 빠를 것 같거든.”
나는 여전히 신전 안에 있었다.
다만, 시간이 정지한 채로 멈춰 있었다.
“어째서?”
“네가 사망한 시점에 맞춰 영혼을 불러왔으니까. 숨이 끊어질 때까지 벌어진 일이 지금 네가 보는 풍경이다.”
멈춰진 시간 속을 가만히 거닐었다.
캉이의 잘려진 꼬리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꼬리의 숫자는 전부 세 개.
내가 르팔타커스의 기원검에 심장을 꿰뚫렸을 때 누가 가장 먼저 뛰어들었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바닥에 고꾸라진 캉이에게 다가가자 또 다른 내가 설명했다.
“아직 죽지 않았어. 그 구미호는 여러 번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으니까.”
반면 신전의 천장에 처박혀 있는 건 마룡으로 변신한 제르비어스였다.
가슴팍의 비늘이 마구 파헤쳐져 있었고, 눈빛에 광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죽었나?”
“아니. 말도 안 되는 맷집 덕분에 살았지. 다만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어. 중간에 끼어든 방해꾼 때문에 마무리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그 주인공은 아스티나였다.
설공과 싸웠을 때 아스티나는 흑기사의 갑옷을 입지 않았다.
공방에서의 속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서 택한 전략.
그런데 지금 르팔타커스와 검을 맞대고 있는 아스티나는 풀 착장을 마친 뒤였다.
최대한 수비적인 태세로 버텨야 버틸 수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그 점이 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반격을 포기한 적 없는 아스티나가 르팔타커스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물러서고 있었다.
파천황과의 거리는 불과 십여 미터.
뒤로 당겨진 검이 휘둘러지기만 한다면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터였다.
“그다지 놀라지 않네? 익숙한가 보지.”
“이미 여러 번 겪어봤거든.”
하지만 이렇게 멈춘 시간을 지켜봤을 때 내게 희망적인 일이 생겼던 적은 드물었다.
나는 박상식의 모습을 한 존재에게 걸어가 노려보았다.
“설명해라. 이게 대체 뭔지.”
“간단해. 지난번과 같아. 네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온 거지. 그러면서 격리된 차원에 우리가 놓이게 된 것이고. 관찰은 가능하지만 개입할 순 없어. 저번에 너는 교도관장의 선물로 인해 되살아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회는 이제 남아 있질 않지.”
나는 녀석의 동공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너는 내 분신 같은 거야?”
“하하하. 얘 뭐라니.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던 녀석은 눈물을 훔치더니만 내 가슴을 가리켰다.
“오히려 네가 내게서 떨어져 나갔던 거지. 물론 거기에 대해 유감은 없어. 교도관장이 마지막까지 말렸어도 ‘너와 내’가 밀어붙인 결과가 이것이니까.”
“이해가 되질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좀 더 쉽게 설명을…….”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길이 있지.”
또 다른 내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마치 다가오지 말라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는 동작이었지만 내 경우엔 아니었다.
손바닥을 마주치는 순간 자연스레 내가 깨닫게 된다는 뜻이었다.
“네 손을 만지면?”
“모든 걸 알게 돼. 지금, 이 순간을 안배했던 최초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카식 레코드에서 아직 누구도 열람해본 적 없는 여정을 너는 떠올리게 될 거야.”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와,
인간 박상식의 손바닥이 서로 마주 닿았다.
*
나는 한 사내가 울부짖는 모습을 보았다.
푸르가토리움이 생긴 이래 최초로 9층 봉마의 울타리를 밟은 죄수.
르팔타커스 시온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느덧 49일째.
그 불굴의 의지도 꺾이게 되는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았다.
“불렀나요?”
청발백의의 소녀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지금은 이 존재가 누구인지 안다.
교도관장.
“제게 건의 사항이 있다고요. 9층 교도관님.”
“맞아. 너도 알고 있어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서. 저 죄수를 몇 주나 지켜보면서 떠오른 생각이야.”
“뭔가요.”
“최초의 사례는 그다음을 기약하는 법. 푸르가토리움은 계속해서 도전받을 거야. 언젠가 저만한 죄수가 또다시 나타날 거라고. 어쩌면 저 죄수 본인이 금제를 피해 재등반을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9층의 시련을 만든 게 아니던가요? 그 어떤 죄수도 빠져나갈 길이 없는 완벽한 시련을.”
그때의 나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르팔타커스가 내뱉는 포효를 보면서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 감옥의 바깥을 다녀오고 싶어.”
“잊었습니까. 당신은 푸르가토리움 최고층의 교도관이에요. 어딜 간다는 거죠?”
“내가 직접 간다는 건 아니야. 화신체를 만든다면 가능하겠지.”
교도관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아카식 레코드에도 기록돼 있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바로 그녀가 만들어낸 존재인 내 본질이었으니까.
“외부 순방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너는 인과율을 어그러트릴 만큼 위험한 죄수들을 이 감옥에 붙잡아 왔어.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강자가 이곳에서 형량을 보내며 괴로워하겠지.”
“맞아요. 그렇게 해야 우주의 수명을 최대한으로 늘릴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불안했잖아. 전지전능의 존재조차 실수할 수 있는 요소가 있으니까. 그래서 너는 나를 만들었어. ‘자유의지’를 가진 신격을.”
“…….”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줘. 나는 필멸자들의 삶을 체험해보고 싶어. 그래야 다시 돌아왔을 때 푸르가토리움의 모순을 파헤칠 수 있을 거라 믿거든.”
내 제안을 들은 교도관장은 잠깐 고민했으며,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어떤 존재에게 빙의하고 싶나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절망에 빠져 주저앉아 있는 르팔타커스 시온을 가리켰다.
“저 사내는 꼭대기에 오르는 동안 그 누구도 구하지 않았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는 절대강자.”
그와 대면하라면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약자를 원해. 르팔타커스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 자.”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9층 교도관의 화신체가 감옥을 벗어나 어떤 존재에 빙의하게 되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돌아오게 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채로.
*
“나는…… 너의 화신체구나.”
“맞아. 내 예상보다 너의 유람이 더 오래 걸리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된 거지.”
인간 박상식의 몸에 들어온 영혼이었던 나는 아홉 살의 사고 당시 운명을 한 번 바꾸었다.
그 대가로 수명을 늘릴 수 있었지만, 내 진정한 정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채 죄수가 되었다.
“탈옥을 위해 9층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내가 유도한 거지. 유람을 떠난 내 화신체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오게 된 거야.”
“너는…… 아니, 우리는 목표를 달성한 거야?”
9층의 교도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야.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지. 나는 인간으로서 살아온 네 기억을 그대로 보존해주길 원했어. 그래야만 이 감옥의 부조리를 깨달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
나는 모든 층의 교도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외쳤던 적이 있다.
‘시발놈들아, 푸르가토리움은 망겜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무슨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걸까.
질문하지 않아도 교도관은 대꾸했다.
“당연히 지금 네가 바라는 것을 해. 친구들을 구하고 싶지 않아?”
“물론이야.”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 있어. 너도 방법을 알고 있잖아?”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 정체와 역사를 깨달은 순간 나는 9층의 교도관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다시 한번 화신체가 되면 가능해.”
“그리고?”
“그렇게 되면 푸르가토리움에 영원히 묶이게 되겠지. 교도관의 권한으로 친구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겠지만…….”
“나와 하나가 된 너는 결코 감옥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
순수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교도관의 얼굴에 깃들었다.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발버둥 친 결과로 나는 자기완결적 예언을 완성해버린 거다.
“결심했어?”
“그래.”
“어려운 싸움이 될 거야. 그리고 누가 이길지는 나도 알 수 없어. 교도관장조차 모를 거야.”
나는 또 다른 나의 얼굴을 한 교도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는 줄곧 여기서 혼자 있었겠구나. 긴 시간의 외로움을 버텨가면서.”
“나는 외로움을 몰라. 하지만 나를 걱정해주어서 고마워. 바로 그런 희로애락을 배우기 위해 너를 바깥세상으로 보낸 거니까.”
“그래. 잘 경험하고 왔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이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길었던 결핍은 채워졌고,
두 개의 파편은 하나가 되었다.
“교도관의 이명을 이제 알겠군.”
“오호. 상품은 없지만 맞춰보겠어?”
“너는 ‘왕을 잃어버린 왕좌’야.”
“정답이야. 왕좌를 잃어버린 왕이여.”
*
[9층 교도관 ‘왕좌를 되찾은 왕’이 화신체를 만들어냅니다.]
르팔타커스 시온은 역시 가공할 만큼 뛰어난 전사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등 뒤에서 벌떡 일어난 내 존재를 바로 깨닫고 뒤돌아설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후인이여? 어떻게?”
사지가 잘린 채 심장까지 꿰뚫렸던 나는 온전한 육체로 우두커니 그를 마주 보았다.
아론다이트를 주워든 뒤 천장을 가리켰다.
“들으셨을 텐데요. 교도관이 화신체를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내 말을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르팔타커스는 기진맥진한 채 버티고 있던 아스티나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떼었다.
천천히 그가 나와 원진을 그리며 대치했다.
“완전히 달라졌구나, 후인이여.”
“네.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다시 한번 짐을 막아설 텐가.”
“그러기 위해서 돌아온 거니까요.”
이전보다 더욱 농밀한 살기가 르팔타커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밀리지 않았다.
[모든 교도관이 두 수왕의 재대결에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숨을 죽인 채 결과를…….]
나는 손을 들어 안내 음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한 가지만 정정하고 싶어. 모두가 나를 두 번째 수왕이라 믿고 있을 거야. 사실은 나도 지금까지 그랬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더라고.”
교도관장은 처음부터 내가 ‘왕이 될 자’라고 하였다.
구미호 호이란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벨리오나도, 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왕(囚王)이 아니라 옥왕(獄王)이다.”
그러니 이것은 죄수들의 왕과 감옥의 왕이 서로의 신념을 관철하는 대결이 될 것이다.
진짜 왕의 이름을 증명할 시간.
나는 아론다이트를 쥔 채 발검식을 취했다.
명경지수처럼 맑은 마음이 지금의 내겐 아무런 불가능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르팔타커스 시온. 지금부터 제가 검을 휘두를 겁니다.”
“뭣이라?”
“어디를 벨 것인지 미리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 수왕의 얼굴에 깃들었다.
희미한 분노였다.
“왼팔.”
검이 휘둘러졌고,
르팔타커스의 어깨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