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왕의 이름 (4)
피쉭.
기원검이 내뿜는 빛은 차오르던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꺼졌다. 배터리가 갑자기 방전된 전기 충격봉 마냥.
어떻게 된 거지?
[기원검이 소유자의 소원을 거부합니다.]
만생의 문은 여전히 고고한 자태로 우뚝 서 있었다.
내 소원은 거부당했다.
지금까지 파편만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소원들을 들어주곤 했던 뒤틀린 신의 권능도 이 감옥의 울타리를 박살 내라는 소원은 들어줄 수 없는 건가.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거부의 사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기원검은 이전 소유자의 소원을 이행 중이므로 현 소유자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의지를 품은 생물처럼 기원검이 내 손을 빠져나가 허공에서 회전했다.
그러더니 맹렬한 속도로 신전의 바닥에 꽂혔다.
콰악.
“이전 소유자라고?”
직감적으로 그것이 사니릭투스나 크로톤처럼 운 좋게 검의 파편을 품었던 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즉, 완전한 본체의 주인을 가리키는 거다.
두근.
신전 전체가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살기에 반응하는 것이다.
두근.
하지만 그 근원지는 멀리 있지 않았다. 기
원검의 검신에서 미약한 빛이 점멸하더니 점점 그 강도가 세졌다.
두근.
곧이어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기원검의 칼자루에서 봇물 터지듯 붉은 액체가 흘러나와 웅덩이를 이룬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액체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그것을 확인해 준 건 캉이의 예민한 코.
“피야. 짙은 피 냄새야.”
웅덩이에 고여 있던 피가 스르륵 뭉치더니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그 높이는 내 시선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멈췄다.
정확히 누군가가 서 있는 형태로.
“설마…….”
처음에는 양팔과 두 다리. 그다음에는 미세혈관들이 형성된다.
근육이 차오르는 속도는 더 빨랐다.
정신을 차렸을 땐 구릿빛의 피부까지 다 완성된 뒤였다.
친구들이 자연스레 내 등 뒤로 모여들었다.
어떤 의지를 갖고 한 행동은 아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한곳에 모여든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부활’한 사내의 용솟음치는 존재감에 대항하기 위해서 뭉쳐야 한다는 걸 느꼈을 테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르팔타커스…… 시온?”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에서 터질 듯 꿈틀대는 야생의 근육이 엿보였다.
포유류의 가죽으로 덧대어진 짧은 바지에 투박한 샌들.
검투장의 모래에서 달리기 위한 복색이었다.
“후인이여. 짐이 말하지 않았는가.”
르팔타커스는 천천히 기원검 네메시스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마치 태초부터 응당 그랬어야 했다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안 된다고.”
그는 무감정한 얼굴로 기원검을 허공에 죽 그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자동차를 시운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그대가 기원검에 소원을 비는 행위를 말함이다. ‘해선’ 안 된다는 경고가 아니라 ‘해도’ 안 된다는 탄식이었노라.”
“당신이 기원검에 빈 소원이 부활이었으니까?”
르팔타커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깃들었다.
자조. 그 안에 댐처럼 가득 분노를 담고 있는 메마른 웃음이었다.
“이곳 봉마의 울타리에서 좌절하고 난 뒤 짐은 그동안 미뤄왔던 소원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긴 세월 짐을 유혹해왔던 것에 비하면 오래 버틴 거라 할 수 있겠지.”
천공돌파에 실패한 후 르팔타커스는 감옥을 한 층씩 내려왔다.
기원검을 박살 낸 뒤 각기 다른 층에 흩뿌리면서.
자포자기에서 온 파괴행위가 아니었다. 그것부터가 계획의 도화선이었던 것이다.
9층에 오를 등반죄수가 기원검을 휘둘렀을 때,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짐은 제국을 세웠다. 온 세계를 짐의 발아래에 무릎 꿇렸고 종국에는 신에게마저 도전했지. 하지만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어. 지배와 피지배를 제외하면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르팔타커스는 재등반을 할 수 없었다.
혼자의 힘으로 세계를 굴복시킬 줄만 알았지, 누군가와 손을 잡고 우정을 나누는 법을 배워본 적 없으므로.
1층 화룡도에까지 내려온 르팔타커스는 “부족했다”라는 묘한 말을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힘이 부족했다는 뜻도, 지혜가 부족했다는 뜻도 아니었다.
제물로 바칠 ‘친구’가 부족했다는 뜻이었다.
“후인이여. 그대가 짐에게 해준 것은 단순한 말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의미가 있노라. 하여 설명해주도록 하지. 들을 준비는 되었는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르팔타커스는 폼멜에 양손을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젠가 최종층에 오르는 등반죄수가 나와 동일한 행위에 닿았을 때 부활의 조건이 충족된다. 바로 만생의 문을 향해 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지. 하지만 짐이 이 검을 조각내어 여러 층에 흩뿌린 것은 기만이자 속임수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짐이 스스로 심장을 뜯어낸 것에 있지. 온전한 부활을 위해선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곳에 짐의 사체를 보관해야 했으니까.”
“냉장고!”
제르비어스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의 동시에 나도 르팔타커스가 말하는 보관장소가 어디인지 떠올렸다.
층간 구역의 냉장고다.
생각해보면 이것을 놓친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다. 냉장고의 목적이 무엇인가.
썩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
“지금껏 저를 이용하신 겁니까? 온전한 상태로 다시 이 층에 강림할 수 있도록?”
“그렇다네, 후인이여. 그대를 고른 것은 이 검의 의지.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감내하고 돌진할 수 있는 자를 찾아낸 것이지.”
르팔타커스의 시선이 내 주위를 지키고 선 친구들의 얼굴에 닿았다.
“그대는 친구의 심장을 꿰뚫어서 제물로 바칠 수 있던가.”
“…….”
“아니, 그럴 수 없을 터. 애초에 그것이 가능한 죄수였었다면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테지. 그대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 짐이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저를 도와주신다고요?”
르팔타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잊지는 않았겠지? 그대에게 권능을 빌려주었을 때 짐이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
당연히 잊지 않고 있다.
‘마음에 든다, 죄수여. 짐의 친구가 되겠는가.’
군신의 계약도, 고용의 체결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정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짐에게도 이 최종층의 시련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
드드드득.
기원검 네메시스가 주인의 손에 뽑혀 올라왔다. 그 칼 끝이 향하는 것은 우리 쪽이었다.
“핏값을 받아내는 건 짐이 가장 잘하는 일. 그대를 포함해서 그대의 친우들까지…… 전부 죽여주도록 하겠네. 우정과 경의를 담아.”
까마득한 세월을 넘어 다시 태어난 사자가,
우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
파아앗.
내가 아론다이트를 소환했을 때 주변에선 동시에 여러 일이 벌어졌다.
“용사야. 이번엔 아무래도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제르비어스가 용체화에 돌입해 내 왼쪽을 맡았고,
“이 중에서 누가 죽는다면 목숨이 여러 벌인 내가 먼저야.”
여우화를 마친 캉이가 내 오른쪽에 앞발을 내디뎠다.
“슈바인. 너를 노릴 거야. 살기가 오직 한 방향으로 집중돼 있으니까.”
아스티나는 자연스레 대칭처럼 내 옆에 섰다.
하지만 오토마타 레나스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런 형태로도 변신하지 않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붙잡히기라도 한 듯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레나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저 존재는 물리력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작동이…… 불가능합니다.”
그야말로 전의를 뭉텅이로 깎아 먹는 대답이었다.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르팔타커스 또한 레나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짐에게 영혼 없는 인형을 파괴하는 취미는 없다. 피가 흐르지 않는 존재는 비켜 서 있으라.”
뚜벅뚜벅.
르팔타커스가 천천히 우릴 향해 걸어왔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만으로도 모든 심력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대체 지드는 이런 괴물과 어떻게 맞섰던 거야?’
지드와 르팔타커스가 맞붙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펼치는 공격을 볼 수도 없었고 누가 이기고 있는지조차 감지해낼 역량이 없었다.
그래서 눈이 가려졌다.
낮은 수준은 공포에 젖을 자격조차 허락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확히 알겠어. 파천황이 얼마나 대단한 전사인지.’
단신으로 푸르가토리움의 모든 층을 돌파했던 사내가 지금 내 목을 따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이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누군가의 이목을 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푸르가토리움의 모든 교도관이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와 등반죄수 르팔타커스 시온의 충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어떤 교도관도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에 모두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한쪽으로 물러서 있던 문지기의 입을 쳐다보았다.
문지기의 입이 열리는 것과 안내 음성이 운을 떼는 것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것은 첫번째 수왕과 두번째 수왕의 대결.]
[본래의 시간선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조우가 벌어졌습니다.]
[9층의 교도관 ■■ ■■■■ ■■이 모든 교도관에게 경고합니다. 절대 개입하지 말 것, 그리고 이후 벌어질 상황을 단지 지켜볼 것을.]
르팔타커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안내 음성을 실로 오랜만에 들어본다는 듯.
“이 소리가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하긴 짐의 시작은 노예 검투사였지. 검 한 자루에 목숨을 거는 자들의 싸움에 관중이 없으면 흥이 나질 않는 법.”
그와 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후인이여. 여기까지 오느라 정녕 수고했다. 그 봉사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짐의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자비를 베풀고자 하노라.”
“뭡니까.”
“지금부터 짐이 검을 휘두를 것인즉 어디를 벨 것인지 미리 알려주도록 하지.”
공격 지점을 먼저 알려준다고?
그 터무니없는 오만함에 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내 육체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왼팔.”
르팔타커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무영보를 시전했다. 방향은 오른쪽으로.
푸화아아아악!
하지만 순간 벌어진 일에 아무도 대응하지 못했다.
어깨 밑으로 잘려 나간 내 왼팔이 공중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르팔타커스는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오직 검만이 처음 있던 위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을 뿐.
통증을 자각하기도 전에 르팔타커스의 다음 참격이 이어졌다.
“오른 다리.”
피하는 것은 소용없다.
나는 자이언트 쉴드를 펼치는 것과 동시에 아론다이트를 오른쪽 다리에 내밀어 방어하고자 했다.
기우뚱.
하지만 내가 방어 태세를 취하는 것보다 빠르게 오른 다리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어?”
지탱할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채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은 오랜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바닥이 내 볼을 때리는 동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론다이트가 바닥에 나뒹굴고,
아스티나의 얼굴엔 피보라가 묻었으며,
질겁한 토니아가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르팔타커스의 두 발이 그 모든 광경을 가로막고 섰다.
“심장.”
기원검의 칼날이 내 등을 꿰뚫었다.
누가 먼저 비명을 내질렀는지는 모르겠다.
그 소리가 무척 구슬프다는 것이,
내가 죽기 전 떠올린 마지막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