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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96화 (296/300)

#296. 왕의 이름 (3)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라.

그것이 9층 봉마의 울타리를 지배하는 열쇠의 획득 방법.

“농담하는 거지?”

문지기는 공손하게 양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만생의 문을 관리하는 임무를 제외하면 어떤 기능도 품고 있지 못합니다. 당연히 죄수들을 기만할 권한도, 이유도 없습니다.”

당연히 교도관이 어떤 시련을 준비했을 거로 예측했다.

그러나 내가 예상한 다양한 형태의 시련 중에서도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친구를 죽이라니.

지금껏 생사의 고락을 함께한 친구를 제물로 바쳐야만 탈옥할 수 있다는 소리다.

설계자의 지독한 악의가 느껴졌다.

혼자서 오롯이 여기까지 온 자는 애초에 시련에 참가 자격이 없고,

여럿이 힘을 합쳐 온 자는 소중한 이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한다.

“용사야. 이를 어쩌면…… 어쩌면 좋으냐.”

충격과 허탈함에 빠진 제르비어스의 목소리였다.

“모순의 힘을 빌린 함정이야. 악랄할 만큼 영리한. 무정하게 타인의 목숨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자도, 그렇지 못한 자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위해 이런 시련을 마련한 거야.”

아스티나 또한 절망에 빠진 모습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저 문지기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까지 올라온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

대단했던 강적과의 혈투도, 온갖 잔꾀를 내어 풀어내야 했던 수수께끼도, 나를 이곳까지 보내기 위해 희생했던 자들의 목숨도 모두 무색해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괜찮아.”

그때,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캉이가 이런 말을 툭 내뱉었다.

녀석은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토니아를 아스티나에게 넘겨준 뒤 나를 쳐다보았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이 감옥을 나간다면 나를 잊지 말아줘. 여기까지 온 과정 모두가 즐거웠어. 형아가 알려준 놀이도, 움직이는 그림 철왕전기도 잊지 못할 거야.”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어이없게도 구미호 소년은 웃고 있었다.

마치 짐승의 후각으로 지금의 운명을 미리 예감하기라도 한 듯.

“나를 죽여서 이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 형아한테는 자격이 있으니까.”

순간 머릿속의 끈이 툭하고 끊어졌다.

나는 파들거리는 손으로 캉이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 멍청아! 이따위로 목숨을 포기하라고 호이란이 너를 지켰던 게 아니잖아!”

“엄마도 이해할 거야. 형아가 아니었다면 나는 애초에 엄마의 존재도 몰랐을 거고, 엄마랑 다시 만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이 자식이 대체 무슨 소리를…… 널 죽여서 여길 빠져나가면 남은 삶 동안 내가 참으로 행복하겠다! 너희 모두의 피가 묻은 손으로 하하호호 무병장수하겠다고!”

나는 다급히 내 말에 힘을 실어줄 친구를 시선으로 찾았다.

“제르비어스!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러나 폭렬마왕 또한 내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용사야. 너에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냐. 이 감옥 바깥에서 애타게 너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가 있잖아.”

“…….”

“나에겐 그게 없다. 진작에 모든 가족을 용사들에게 잃었어. 우리 중에서 한 명만 바깥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나 또한 캉이처럼 너를 택하겠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장담했잖아. 마왕이라 핍박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보여주겠다고!”

제르비어스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는 이미 그 세계를 보여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줄곧 말이야.”

이 중에서 물리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페어리 퀸 또한 입을 열었다.

“슈바인. 8층에서 너와 떨어져 있을 때 나는 정의와 진리의 여신 우투릴리의 시험에 빠진 적이 있어. 그리고 외면해 왔던 내 업보와 직면하게 됐지. 나는 죄인이야. 내가 죽을 장소를 택하라면 내 반쪽이 있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

“여기 있는 모두가 죄를 지었어! 그건 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아스티나 류!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헛소리를 그냥 듣고만 있을래?”

아스티나는 청룡패웅검의 손잡이에 붙은 월장석을 매만지고 있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나도 제르비어스와 같은 처지야. 엄마와 아빠가 있는 삼월초원으로 돌아갈 수 없는걸. 거기엔 갓난아기의 내가 자라고 있을 거야. 자연은 동일 시간대에 동일 존재를 허용하지 않으니까. 내 존재 자체가 삼월초원에는 끔찍한 재앙이야.”

“그래서 죽겠다고? 그게 네 대답이야?”

“싸우면? 교도관의 의도대로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우리가 서로를 공격한다면…… 너는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겠니?”

아스티나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채로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걸. 우리 중에서 네가 가장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상처 없이 우릴 제압할 수는 없어. 캉이는 진짜 이름을 되찾았고, 제르비어스는 마룡으로 변신할 수 있지. 나도 설공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으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응?”

“서로를 찌르다가 모두 죽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뜻이야. 친구끼리 상잔하는 게 교도관의 뜻이라면 나는 그걸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왜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목숨을 내려놓으려 하는 거야? 미쳤어?”

“너라면 고통 없이 한 방에 끝낼 수 있겠지.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일 거야.”

“웃기지 마! 어떻게 그따위 논리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 이럴 거였더만 차라리…….”

불현듯 내가 몇 번이고 이 순간에 대한 경고를 들어왔다는 사실이 들었다.

한 번은 기원검이 보여준 추체험의 세계에서 예언자를 만났을 때,

또 한 번은 탄식의 폭포에서 달리아의 흔적과 조우했을 때.

‘그대는 분명 문턱에 오를 테지만, 그 순간 스스로의 의지로 탈옥하지 않을 겁니다.’

운명을 내다보는 여신 달리아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과 맞닥뜨릴 나를 미리 본 것일까.

그 순간.

아무도 차마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움직이는 자가 있었다.

지금껏 아무런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던 오토마타 레나스였다.

“문지기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뭐지요?”

“당신은 이들 사이가 ‘인과의 끈’으로 맺어졌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연금술에서 해석하는 단어와 유사한 뜻을 갖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최후의 일인이 등반죄수 본인이 아니어도 탈옥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추측이 옳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영혼과 감정이 없는 두 인형의 대화를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때, 돌아서는 레나스의 눈빛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마정석의 힘을 급격하게 끌어올리는 태세.

[연금무장술 살상기능 해금]

[형태변환 B: 저격 특화형]

오토마타의 오른손이 포신 형태로 돌변하는 순간 나는 황급히 붙잡고 있던 캉이의 옷자락을 놓았다.

포신이 향하는 방향이 정확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즈우우우웅!

제시간에 방어막을 가동하지 못했기에 나는 레이저를 직격으로 얻어맞고 한참을 뒤로 밀려났다.

“크윽. 레나스? 왜 그러는 거야.”

무려 네 짱의 금속 날개를 펼치면서 레나스는 돌격 준비를 마쳤다.

“저의 최우선 보호 대상은 캉이 관객님입니다. 제 노래를 예약하신 주인공이니까요. 다른 관객님들이 위협요소로 돌변한다면 배제해야 할 따름입니다.”

레나스의 양팔이 날카로운 수검으로 돌변했다.

그 주인인 사니릭투스의 앞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그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레나스의 날개가 제트엔진처럼 불을 내뿜었다.

저 정도 출력이라면 단숨에 나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수준이다.

덜컥!

그런데 레나스의 진격은 허공에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오토마타는 물끄러미 자신의 왼쪽 허벅지에 휘감긴 채찍을 내려다봤다.

“이러지 마라, 레나스. 내 손으로 널 파괴하고 싶지 않아.”

“마치 그럴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그그그긍.

오메가 위프를 붙잡고 있는 제르비어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오토마타의 출력을 감당하지 못해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제르비어스의 뿔이 길어지고 보라색 마기가 일대를 뒤덮었다.

마룡화로 대응하고 있는 거다.

“내가 용체화를 완료하면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두…….”

콰아아아아악!

재빨리 날개 역분사를 일으킨 레나스가 제르비어스의 안면을 걷어찼다.

오메가 위프가 스르륵 풀려나는 순간에 신전의 일대가 푸른 빛에 휘감겼다.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발동된 것이다.

까아아앙!

레나스는 공중에서 자세를 뒤틀어 청룡패웅검의 섬전 같은 찌르기를 막아냈으나, 상대는 이미 그것을 예상한 뒤였다.

깡깡깡깡깡!

신전의 기둥들을 부숴나가며 레나스와 아스티나가 치열한 육박전을 펼쳤다.

레나스가 밀리는 양상이었으나 그것은 아스티나가 흥분으로 인해 마력을 폭주에 가까운 형태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대로 지구전이 된다면 아스티나는 치명적인 반격을 당하고 말 거다.

“안 돼! 그만해!”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구미호의 꼬리가 펼쳐지는 것이 한 발짝 빨랐다.

둘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캉이의 복부에 청룡패웅검이 파고들었다.

아스티나가 검을 치울 새도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아앗.”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깨달은 아스티나가 벌벌 떨었다.

그런 빈틈을 놓칠 레나스가 아니었다.

아스티나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수검이 일직선의 궤적을 그렸다.

푸우우욱!

수검이 꿰뚫은 것은 아스티나의 목이 아니라 제르비어스의 손바닥이었다.

용의 비늘로 뒤덮인 내구력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꼬챙이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젠장. 다들 멈추라고오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신전 일대에 퍼지는 힘을 개방했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단순히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수준의 보법이 아니었다.

선천지기에 손상을 불러올 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휘두른 것이다.

공중에 뜬 채 서로를 공격하던 모두가 자석에 달라붙는 것처럼 추락했다.

쿠우우웅!

특히 내가 내력을 집중한 것은 살기 넘치도록 날뛰는 레나스였다.

오토마타는 아예 허리까지 지면에 잡아먹힌 것처럼 깊게 파묻혔다.

그그그그긍.

천마군림보에 저항하려 레나스가 무장연금술의 출력을 배로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급히 외쳐야만 했다.

“잠깐만 멈춰봐, 레나스! 아직 쓰지 않은 방법이 남아 있단 말이야!”

격렬하게 요동치던 레나스의 날개가 잦아들었다.

“제 연산 능력으로는 관객님 모두가 살 방법은 없습니다. 시간을 끄시려는 거라면…….”

“있어! 분명히 있다고. 그러니 한 번만 나를 믿어봐 줘.”

천마군림보가 해제되자 토니아가 쪼르르 캉이에게 날아갔다. 복부의 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제르비어스가 오메가 위프를 갈무리하며 내게로 걸어왔다.

“정말 뾰족한 수가 있다는 거냐? 확실해?”

“사실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은걸.”

내가 인벤토리에서 불러낸 것은 기원검 네메시스.

니오프론에게서 마지막 한 조각마저 회수한 뒤 온전한 형태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검이었다.

소유자의 욕망에 반응하는 신물.

기원검이라면 이 시련을 망가뜨릴 수 있는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왕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용사야. 그 검의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파편을 모아오면서 보지 않았냐. 기원검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에 시전자에게 끔찍한 파멸을 가져다준다. 소원이 커다랄수록 반동 또한 그렇다면…… 어떻게 감당할 셈이냐.”

그룬덴 사니릭투스도, 거인 크로톤도, 벨리오나도, 니오프론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기원검에 소원을 빌거나 갖고 있던 자들 모두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가장 강력한 카드를 쓰지 않는다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되든 안 되든 부딪혀 보는 수밖에.”

나는 기원검을 단단히 붙잡은 채 만생의 문을 겨누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예감한 듯 문지기는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소원을 빌겠다, 네메시스.”

웅웅웅웅웅!

기원검의 검신 내부에서 바깥을 향해 거대한 광휘가 터져 나왔다.

모든 시야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기원검이 소유자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가만히 들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심력을 잔뜩 소모해야 할 만큼 막대한 기운이 방출되고 있었다.

“내 소원은 저 만생의 문을…… 부수는 거다!”

광휘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온 것은 내 손등이었다.

용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사자의 문양.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내게 준 권능의 표식. 그것이 함께 몸부림치고 있었다.

다시는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목소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 된다, 후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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