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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95화 (295/300)

#295. 왕의 이름 (2)

푸르가토리움.

우주에서 가장 흉악한 탈출 불가 감옥.

그 설명을 들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던가.

‘그럼 나는 우주에서 가장 끈질긴 포기 불능 용사다. 너희는 죄수를 잘못 골랐어. 나는 탈옥할 테다!’

용기가 인간의 마음에서 뻗어나가는 초목이라면,

그 나무의 가장 큰 거름은 분명 무지일 것이다.

‘무식하기에 용감했었지.’

여덟 개의 층을 돌파하면서 나는 꽤 많이 겸손해졌다.

1층 화룡도에서 흙을 퍼먹고 다른 방장들의 뒤통수를 칠 궁리를 하던 때에 비하면 비교가 무색할 만큼 강한 육체와 다양한 스킬을 가졌음에도.

아이러니하게도 늘어난 경험이 용기의 표피를 깎아먹고 있는 것이다.

9층의 이름은 봉마의 울타리.

지금까지 새로운 층을 마주할 때마다 까다로운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지독한 강적이나,

사력을 다해야 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겠지.

‘괜찮아. 이제 열쇠 하나만 남았다.’

그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지금껏 잘 공략해왔다.

공포를 모른 채 날뛰는 건 만용에 불과하다.

진정한 용기는 공포를 품에 안고서도 한 발짝 내딛는 거다.

바로 지금처럼.

*

끼이익.

신전의 문을 열자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등반죄수와 그 친우들이여.”

익히 들어온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교도관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해주었던 안내 음성과 정확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매끈한 대리석 위에 성별을 알아보기 어려운 외양의 존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 남자인지 여자인지보다…… 인간이긴 한 건가?’

내가 레나스를 바라보자 오토마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중에서는 관객님들보다 저와 더 가까운 작동방식으로 움직이고 있군요.”

인형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 있다.

내가 그 추측을 입 밖으로 내려 할 때 인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 층의 교도관이신 ■■ ■■■■ ■■의 화신체 같은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저 평범한 문지기입니다. 푸르가토리움에는 두 개의 중요한 문이 있지요. 첫 번째는 모든 죄수가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연옥의 문’.”

0층 대기실에서 죄수들이 어떤 층에 배정될지 결정하는 거대한 철문.

“두 번째는 푸르가토리움의 유일한 출구인 ‘만생(萬生)의 문’입니다. 바로 제 등 뒤에 있는 문이지요.”

만생의 문.

그것은 연옥의 문과 동일한 크기를 갖고 있었으나 색채는 전혀 달랐다.

칙칙하게 녹이 슨 연옥의 문과 달리 백금으로 칠해진 듯 휘황찬란했다.

만생의 문이 칠천 년 정도 풍파에 시달리면 연옥의 문처럼 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조각의 모양도 전혀 달라.’

연옥의 문에는 흉악한 악마들이 삼지창의 끝에 해골을 꿴 채 포효하고 있었다면, 만생의 문에는 날개를 단 천사들이 텅 빈 횃대를 들고 서 있었다.

문지기의 설명이 이어졌다.

“가까이 오십시오, 등반죄수여. 제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당신을 살펴봐야 하니까요.”

정체 모를 녀석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꽤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사악한 기운이나 적대적인 낌새는 없다, 용사야.”

“결계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아. 적어도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차원에서는.”

“제 판단도 동일합니다, 관객님. 최소한 현시점에서 이 공간에 함정이나 기문 장치는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꺼림칙한 느낌을 드러낸 건 구미호인 캉이였다.

“나는 쟤 싫어.”

“왜?”

“냄새가 없어. 레나스 누나도 인형이라지만 쇳가루 냄새랑 기름 냄새, 그리고 마정석 냄새도 나는데 쟤한테는 그게 안 나.”

그렇다고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는 불시의 기습이 날아온다고 하더라도 언제든 대비할 수 있도록 만전의 태세를 취한 뒤 문지기에게 접근했다.

“네가 교도관의 화신체가 아니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9층 교도관께서는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화신체를 만들어내실 수 없습니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뭔데?”

내 질문에 문지기는 슬쩍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례를 검색합니다. 당신에겐 질문의 답을 들을 권한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또 여쭈실 것이 없다면 지금까지 얻어온 열쇠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내가 손등을 들어 보였다.

거기엔 여덟 개의 붉은 점이 오직 한 칸만을 비워둔 채 빛나고 있었다.

“확인하겠습니다.”

문지기가 걸어와 내 손등을 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휘익! 쐐액!

내 좌우를 지키고 있던 두 친구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제르비어스의 오메가 위프가 문지기의 손목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아스티나의 청룡패웅검이 문지기의 목을 겨눈 것이다.

“쓸데없는 짓 하면 박살 낼 거야.”

아스티나의 협박에는 진심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문지기의 얼굴엔 이렇다 할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력을 사용하신다면 저는 반항할 수 없습니다. 의지도 없거니와 능력도 없지요. 다만 한 가지는 알려드려야겠군요. 제가 파손될 경우 재구축에는 삼백 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여러분 중 절반 이상은 그렇게나 긴 시간을 견디고 생존하실 수 없을 텐데요.”

문지기의 말에서 나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삼백 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

“설마 너는 한 번 ‘파손’된 적이 있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르팔타커스 시온이라는 죄수가 오래전에 저를 472개의 조각으로 잘라낸 적이 있지요.”

“그의 성질을 건드렸나?”

“아니오. 그가 탈옥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분풀이로 삼을 수 있는 상대가 저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익숙한 시간 단위로 설명하자면 1.75초일까요.”

고작 1.75초.

평범한 인간이라면 칼을 단 한 번밖에 휘두를 수 없는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도 472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최초의 일격에 잘린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까지 최소 수십 차례의 검격을 받아낸 것이다.

“저는 고통을 모르는 몸이지만 그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니 절차를 계속 진행해도 될까요?”

“치워줘.”

내가 눈짓하자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는 무기를 거두었다.

다만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문지기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지기의 손바닥이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도자기처럼 서늘한 감촉이었다.

“1층에서부터 8층까지 총 여덟 개의 열쇠를 확인했습니다. 정당한 절차에 의해 만생의 문이 등반죄수의 열쇠를 회수합니다.”

파아아앗.

문지기가 손을 떼자 내 손등에 있던 불빛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만생의 문에 변화가 일어났다.

천사들이 손에 들고 있는 횃대에 붉은빛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나는 문에 조각된 천사들이 전부 아홉 명이라는 걸 깨달았다.

왼쪽 문에 네 명. 오른쪽 문에 네 명.

그리고 마지막 천사는 양쪽 문에 절반씩 조각된 채 횃대를 머리 위에 들고 있었다.

“저 천사의 횃대에 불이 들어오면…… 문이 열리는 식인가?”

“네. 정확합니다. 등반죄수가 아홉 번째 열쇠를 제게 보여주시면 되지요.”

아주 단순한 방식이다.

너무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워서 수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마지막 열쇠는 내 손에 없다.

9층의 층장이 되어야만 가능한 이야기.

“아마도 너는 9층의 층장이 되기 위한 시련을 안내하는 녀석이겠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등반죄수께서는 이미 그 시련의 충분조건을 완수하셨습니다.”

“내가?”

문지기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과의 끈으로 이어진 동반자 다섯과 함께 이 신전에 입성할 것. 그것이 9층 교도관 ■■ ■■■■ ■■이 만든 시련입니다.”

동반자 다섯이라.

나는 천천히 친구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첫 번째 친구인 제르비어스 폰타인.

두 번째 친구인 아스티나 류.

세 번째 친구인 단탈리온.

네 번째 친구인 캉이.

다섯 번째 친구인 레나스.

여섯 번째 친구인 토니아.

일곱 번째 친구인 베르단디.

‘이 중에서 둘은 애매하지.’

단탈리온과 레나스는 각각 마도서와 오토마타로 생명체의 정의에 어긋나는 무생물이다.

그러니 문지기가 말한 다섯에 포함될 수 없겠지.

“만약 나 혼자서 이 신전에 들어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수를 쓰셔도 층장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때 나는 한 사내의 이름을 떠올렸다.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

푸르가토리움의 역사상 최초로 이 신전에 발을 들여놓았던 죄수.

최종층에서 무려 49일을 홀로 버텼으나 결국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선 뒤 대기실로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내.

“그러니 르팔타커스에겐…… 불가능했던 거야.”

그가 일궈낸 천공돌파는 혈혈단신으로 이뤄낸 대업적이었다.

동료의 존재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사자가 코끼리에 맞서 싸울 때 개미의 도움이 필요하진 않은 법이니까.

누군가의 조력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너무 강했다는 점이 르팔타커스의 치명적인 결함이었던 것이다.

르팔타커스가 다시 화룡도로 내려와 차근차근 친구들을 모아왔다면 되는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감옥은 동일 죄수의 재등반을 인정하지 않는다.

설계자의 치밀한 악의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대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

‘49일이나 걸린 것은 짐이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탈옥수의 시련에 참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말에 담긴 진정한 울분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르팔타커스는 내게 친구의 권능을 준 것이다.

스킬 공유를 통해 친구와 함께 난관을 극복하고,

귓속말과 집단 텔레파시로는 유대감을 다지며,

순간이동과 소환의 힘으로 서로를 위기에서 지켜낼 수 있도록.

그래서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파천황의 권능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는 그것이 탈옥을 위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절벽에서 떨어진 자에게 건네진 황금 같은 기연이라고 믿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혼자서 최종층에 오른다 한들 벽에 부딪히고 말 거라는 암시가 담긴.

‘감옥은 거대한 세계다. 죄수여, 진정 탈옥을 원하는가.’

‘원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심연보다 깊은 절망이 그대를 노릴지라도?’

‘죽음은 극복하고 심연은 잘라내겠습니다.’

‘마음에 든다, 죄수여. 짐의 친구가 되겠는가.’

‘네. 당신이 남긴 바통을 주워 결승점에 꽂아드리겠습니다, 르팔타커스.’

감사의 인사를 백번 해도 모자랄 테지만,

그 인사를 받을 르팔타커스는 이제 세상에 없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당신과 같이 감옥을 올라온 다섯 친우들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함께 사선을 돌파하며 인과의 끈이 생긴 것 또한 분명합니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테지요. 이를 인정합니까?”

제르비어스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티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캉이는 쑥쓰러운 듯 귀를 긁었으며,

토니아는 그 머리 위에 편안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베르단디의 향기가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인정한다.”

거기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렇다면 제 앞에 있는 모든 인원의 합당한 권리를 승인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와 동일한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제르비어스에게 약속했다.

우주 어딘가에 마왕이라 해서 퇴치되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데려다주겠다고.

아스티나에게 장담했다.

가족의 원수를 갚고 영겁의 회귀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캉이를 설득했다.

더는 혼자서 쓸쓸하게 무덤을 지키지 않도록 가족을 찾아 주겠다고.

단탈리온에게는 아카식 레코드와의 합일을, 레나스에게는 그 주인의 소원인 영혼의 탑재를, 토니아에게는 일족이 내린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베르단디에게는 마음껏 뿌리내릴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약속했다.

그 많은 약속을 이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자아. 지금부터 아홉 번째 열쇠의 필요조건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필요 조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섯 명을 모아 온 것으로 자격을 입증한 게 아니라고?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십시오.”

문지기의 엄숙한 말이 신전의 천장을 싸늘하게 맴돌았다.

어쩌면 나는 이 상황에 대한 경고를 이미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심연보다 깊은 절망이 그대를 노릴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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