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왕의 이름 (1)
[정답입니다.]
안내 음성이 ‘정’을 발음하자마자 모두의 표정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장 긴장하고 있던 건 제르비어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녀석은 오랫동안 화룡도에 군림한 층장이었으니까.
“나태라니. 어떻게 맞춘 거야?”
“다행히도 막연하게 때려잡은 건 아니야. 내가 있던 지구에서 배운 ‘일곱 개의 원죄’를 떠올렸을 뿐이야.”
신학에서 분류하는 칠죄종(七罪宗).
교만(Pride), 탐식(Greed), 질투(Envy), 분노(Wrath), 음란(Lust), 탐욕(Gluttony), 나태(Sloth).
그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힌트 덕분이었다.
“제르비어스. 0층 대기실 교도관의 이름이 뭐지?”
“나태에 짓눌린 쥐?”
“그래. 단순히 그 녀석이 게으름뱅이라서 그런 이명이 붙은 걸 수도 있지만…… 0층이 1층의 밑이라는 개념으로 연관 지어본다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어.”
나태에 짓눌린 쥐.
짓눌리기 위해선 머리 위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칠죄종 안에 답이 있다면 1층인 화룡도에 어울리는 건 ‘나태’ 뿐이라고 생각했다.
안내 음성은 충분히 기다려주었다는 듯이 다음 문제를 출제했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푸르가토리움의 2층은 삼월초원입니다.]
[삼월초원을 상징하는 ‘죄’의 이름을 말씀하십시오.]
아스티나의 눈빛이 번쩍하고 빛났다.
삼월초원은 그녀가 태어난 곳.
천마신교와 마탑이 끝나지 않는 전쟁인 ‘쌍마대전’을 지속해온 투쟁의 장소였다.
“칠죄종은 나도 알고 있어, 슈바인.”
“그래?”
“내가 배운 건 흑마법이잖아? 인간의 원죄는 기초 중의 기초야. 내가 걱정하는 건 정답이 반드시 칠죄종 안에 포함돼 있다는 근거가 없다는 거야.”
“그건 맞아. 우연히 하나가 겹친 걸 수도 있으니까.”
고심하던 아스티나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두 번째마저도 칠죄종 안에 답이 있다면 우린 확실히 유리해질 수 있어.”
“짐작 가는 게 있어?”
“너는?”
“쌍마대전을 생각했어. 내가 모셨던 천마와 마녀, 너희 부모님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싸움을 계속했지. 이번에도 형벌의 대립항에 답이 있다면…….”
각 세계관의 최강자 둘이 서로를 꺾지 못해 번번이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무승부 자체가 벌이 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자존심과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자들일 것이다.
패배를 상상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자들일 수밖에 없다.
“정답은 오만이다.”
이번 대답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
만약 삼월초원의 죄마저 우리의 예상이 적중한다면 이 난관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게 되니까.
음성은 지체 없이 이어졌다.
[정답입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아스티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 번째 문제입니다.]
[푸르가토리움의 3층은 대수림입니다.]
[대수림을 상징하는 ‘죄’의 이름을 말하십시오.]
이번에 시선이 집중된 대상은 캉이였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이긴 했으나 캉이는 엄연히 대수림의 층장이었다.
나는 소년 구미호에게 물었다.
“캉이야. 어때. 그 시절이 기억나니?”
“어. 아직도 생생해. 내가 태어난 건 대수림이 아니지만, 분명히 나는 대수림의 층장으로 이용되었으니까.”
천공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는 태양. 작열하는 햇빛을 흡수하며 끝없이 증식했던 밀림.
그 안을 배회했던 것은 반인반수의 짐승들이었다.
일식이 벌어질 때만 그들은 인간으로 되돌아왔으며, 반대로 캉이는 구미호가 되어 폭주를 일삼았다.
빛과 어둠의 유무에 따라 술래가 바뀐다.
잡아먹기만 해온 죄수들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공포가 형벌로 주어진 것이다.
그로 미루어보면 대수림이 상징하는 죄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답은 탐식이야.”
[정답입니다.]
이후로 나열되는 문제는 손쉬운 퍼즐 맞추기나 다름없었다.
퍼즐은 첫 조각을 찾는 게 어려울 뿐, 채워진 부분이 많아질수록 점점 쉬워진다. 빈칸에 넣을 조각들의 후보가 줄어드니까.
4층 만철도시엔 욕심을 부린 등반죄수들이 고대 악마의 함정에 빠져 인형 뽑기 기계에 갇혀 지내야 했다.
등반죄수들의 무기는 오토마타들에게 지급된 상태였다. 이웃의 무기를 탐한 자들에게 거꾸로 그 무기에게 휘둘리는 고통이 형벌로 주어진 것이다.
“4층 만철도시의 죄는 탐욕.”
[정답입니다.]
이번엔 문제를 듣자마자 60초를 다 사용하지도 않고 바로 답을 내놓았다.
바로 5층 빙설협곡의 차례가 오자 토니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슈바인. 나는 빙설협곡의 죄 역시 ‘탐식’이라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층장인 크로톤이 죄수들의 영혼을 먹어 치우는 데 혈안이 돼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답이 3층과 겹쳐버리는 꼴이 돼.”
페어리 퀸의 추리는 일견 타당해 보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크로톤이 죄수들을 흡수한 걸 일종의 허기로 해석한다면 그런 답이 나오겠지. 하지만 그 녀석이 덩치를 불리는 원리는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것과는 개념이 조금 달라.”
“그러면?”
“나는 그것이 씨를 퍼트리고 싶어 하는 욕망에 가깝다고 생각해. 취식이 아니라 번식에 가까운 행위라는 게 내 생각이야.”
타인의 육체와 합일하고 싶어 하는 욕구.
그것도 당하는 자의 의사는 존중하지 않는 폭력적인 태도.
칠죄종 중에서 고른다면 가장 유력한 대답은…….
“색욕. 5층 빙설협곡의 죄는 색욕이다.”
[정답입니다.]
절반 이상의 문제를 쾌속으로 돌파해나가자 모두의 표정에 환희가 맴돌았다.
칠죄종 중에 남은 것은 ‘질투’와 ‘분노’.
이번엔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내가 생각을 정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중에서 6층 만골사막을 경험한 것은 오직 나뿐이니까.
“까다로워. 두 층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뚜렷한 시련을 파악하기 어려웠거든.”
그렇다고 계속 고민하고 앉아 있을 순 없었다. 60초라는 시간은 느긋함을 앗아간다.
6층 만골사막의 죄수들은 어째서 위층을 향한 적개심을 키워나갈 수 있었는가.
“생명력을 빼앗겼기 때문이야.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로부터.”
그래서 그들은 층장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불멸의 군단이 되었다. 음흉한 흑마법사에게 속는다는 자각도 없이.
빼앗긴 자들을 속박하는 강렬한 감정 때문에.
“분노. 만골사막의 죄는 분노다.”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남은 답은 하나뿐이지. 소거법으로 생각하면 너무 쉬운 답이야.”
7층 천공섬.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생명체의 최강종이라 할 수 있는 용들이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지만, 폭력이라는 무기로 세계를 갈취해온 자들이 한 곳에 붙잡혀 온 무시무시한 층이었다.
나는 용왕 게브라둠에게 들었던 한 마디를 똑똑히 기억한다.
용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7층의 죄는 질투. 다름 아닌 층장 게브라둠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야.”
[정답입니다.]
이제 풀어야 할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일곱 개의 문제를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통과했으나 진짜 난관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층부터 7층까지 모두 칠죄종에 포함되어 있던 원죄들이 정답으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더는 거기에 기댈 수 없다.
아스티나와 아는 정확히 동일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에 쥔 패가 다 떨어진 도박사의 그것이었다.
“너도?”
“응. 흑마술에도 여덟 번째 죄 같은 건 나와 있지 않았어.”
“왜인지 알 것 같군. 8층에 붙잡혀 오는 죄수는 인간이 아니니까.”
애초에 신성으로 빚어진 지드나 니오프론처럼 태어날 때부터 초월자였던 죄수.
혹은 달리아처럼 원래는 인간이었으나 업적으로 인해 신격을 획득한 죄수.
그러니 인간이 저지르는 칠죄종과는 무관한 장소다.
[마지막 문제입니다.]
[푸르가토리움의 8층은 타천의 강가입니다.]
[타천의 강가를 상징하는 ‘죄’의 이름을 말하십시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짐작 가는 바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였다.
“죄수들에게 힌트가 있을까.”
니오프론은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품고 있던 감정이 ‘부러움’이라고 고백했다.
그렇다고 부러움이 죄가 될 수 있을까. 7층의 죄였던 질투와 너무 비슷한 대답이다.
달리아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지만, 교도관장의 금제에 걸려 운신을 제한당했다.
결국 니오프론의 협박에 의해 예언을 입 밖에 꺼내 소멸당했고.
그렇다면 침묵을 깨트린 것이 죄였을까.
뇌신 지드는 어떠한가.
그는 3층에 있던 나를 찾아와 파천황과 싸워보고 싶다고 대뜸 요청해온 엉뚱한 죄수였다.
내 친구신청을 거부한 것도 자존심 때문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개척한 길이 아니기에 탑승을 거부했던 것이다.
신격 특유의 호승심이 죄인 걸까.
[남은 시간은 35초입니다.]
아니야.
뭔가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 같다.
죄수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보려 해도 뚜렷한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죄수들에게 내려진 형벌에 답이 있지 않을까.
“타천의 강물.”
신격 죄수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기억조차 빼앗겨버리는 괴물들로 타천하는 현상.
그것은 숭배자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은 ‘망각’.
잊히는 것이다.
[남은 시간은 20초입니다.]
과연 무엇이 망각의 대립항이 될 수 있을까.
톱니바퀴의 여신 벨리오나는 아스티나에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 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이유는 뭐지?’
‘복수를 시도할 힘도, 기회도 없었던 선배가 후배에게 남기는 애정 어린 선물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군.’
그렇다면 벨리오나로부터 구원받았던 달리아는 마지막 순간 내게 무엇을 말하려 했나.
‘타천의 강가에서 무아의 괴물이 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을 때, 저는 뭔가를 직감했습니다. 미래시가 아니라…… 그저 간절한 소망이 가미된 바람 같은 거였죠. 어쩌면 이 감옥에 떨어진 것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 세계에 자신의 질서를 강요했던 막강한 죄수 니오프론.
그 녀석의 꿈이 박살 나기 전에 내게 보여줬던 미소.
‘고맙기도 합니다. 다시는 되찾지 못할 거로 생각했던 무언가를 선물 받은 느낌이거든요.’
그래. 있었다.
8층의 죄수들이 모두 품고 있었던 감정의 이름표가.
“내가 고른 답은…….”
인간에서 벗어난 자도, 인간을 넘어선 자도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굴레.
오직 ‘망각’으로서만 덮일 수 있는 강력한 감정.
“미련이다.”
걷지 않았던 길에 대한 끝없는 애수.
선택되지 못한 운명에 대한 갈 곳 없는 안타까움.
미련이야말로 신들조차 극복 못 한 ‘죄’다.
청명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정답입니다.]
[여덟 개의 문제를 모두 맞히셨습니다. 9층의 교도관 ■■ ■■■■ ■■이 등반죄수를 맞이하겠다고 전합니다.]
캉이와 아스티나가 서로를 얼싸안았다.
“해냈어!”
그리고 제르비어스는 레나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토마타는 마족의 저주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쿠르르르르릉!
아무것도 없던 초원의 바닥에서 고풍스러운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크기가 무척이나 압도적이었다.
용왕 게브라둠의 둥지가 있던 섬 전체보다 거대할 정도로.
[9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봐.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
그것은 별 의미 없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도 걷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존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고르지 않았던 어려운 문제 말이야. 그 문제가 뭐였는지 알려줄 수 있어?”
기쁨을 나누고 있던 친구들의 눈빛도 번뜩였다.
녀석들도 궁금한 것이다.
안내 음성은 흔쾌히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 문제는 9층 교도관 ■■ ■■■■ ■■의 숨겨진 이명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아스티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정확히 같은 심정이었다.
아무런 힌트도, 단서도 없이 대뜸 자신의 이명을 맞추라니. 60초 안에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만으로.
‘절대 못 맞췄을 거야.’
결코 만만히 볼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와 친구들은 신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