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여덟 개의 죄 (4)
지금까지 일곱 번의 층간 구역을 거치면서 이런 관문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최종층만의 특별함인 걸까.
아니면 나를 막아서기 위한 교도관의 달갑지 않은 흉계일까.
“금시초문이야. 왜 마지막에 와서야 이런 절차가 있는 거지?”
“9층 교도관의 고유 권한입니다. 제게 따진다 한들 소관이 아니지요. 참고로 당신이 방금 쓰러트리고 올라온 전대 8층장 니오프론 또한 이 문제에 맞닥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곧 나를 흠칫 놀라게 했다.
“니오프론이? 그 녀석은 어떤 문고리를 선택했지?”
“오랜 고심 끝에 그는 거부했습니다. 제대로 된 답을 찾아낼 자신이 없다고 판단한 거지요. 사실은 진심으로 탈옥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포기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니오프론 이전에는 어떤 죄수들이 이 지점까지 도달했을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가 이것을 묻자 곰 인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릅니다. 9층 교도관이 이 관문을 만들어낸 것은 죄수 르팔타커스 시온이 탈옥에 실패한 사건 이후 창설되었습니다. 실제로 니오프론은 문 앞에서 되돌아간 셈이나 마찬가지이니…….”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최초가 되겠군.”
“만약 내가 틀린 답을 내놓으면 어떻게 되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최종층에 발을 디딜 수 없게 될 거예요. 주인으로부터 거부당한 셈이니까.”
“……짜증 나는 상황이군.”
“안타깝게도 당신이 참고할 만한 사례는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셔도 좋아요.”
여기서 교도관장이 강림한 곰 인형을 백날 째려보아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진 않을 터였다.
식탁에서 일어나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있는 거실로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맞추기 쉬운 여덟 개의 문제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문제 하나를 택하기보다는.”
제르비어스는 생각이 달랐다.
“그게 함정일 수도 있지. 한 번 틀리면 올라갈 수 없는 거잖아. 재도전 따위 주어질 리 없고. 그렇다면 여덟 개의 문제를 고를 경우 탈락 위기도 여덟 번 찾아온다는 거야.”
아스티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자신의 추측도 딱히 근거가 있는 게 아닌 직감이었으니까.
토니아는 문제를 다른 각도로 보길 촉구했다.
“어쩌면 어느 쪽 문고리를 고르느냐 자체가 교도관의 검증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문제의 내용은 감추고 개수만 드러낸 거겠지. 배짱을 시험하는 거라면 어려운 문제를 택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선 거의 의견을 내지 않는 캉이도 자기 생각을 밝혔다.
“나는 여덟 개를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 형아. 우리는 모두 일곱이잖아? 머리를 맞대면 혼자서는 모르겠는 문제도 옆에서 알려줄 수 있는걸.”
캉이가 말한 일곱에는 생명체가 아닌 레나스와 세계수의 꽃송이 베르단디까지 포함한 것이다.
“레나스는 몰라도 베르단디는 입이 없는데.”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주니까.”
“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젠 제법 앳된 티를 벗어나고 있는 구미호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어차피 양쪽 다 베일에 덮여 있는 것이라면 내 선택을 믿고 밀어붙이는 쪽이 낫겠지.
나는 교도관장에게 돌아와 선포했다.
“골랐다. 우린 여덟 개의 문제를 푸는 쪽으로 가겠어.”
“그렇습니까. 9층 교도관이 당신의 선택을 이해했습니다. 준비에 소요되는 시간은 필요치 않다고 하네요.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곰 인형의 팔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이 층간 구역에서 유일하게 열리지 않는 현관문이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제르비어스와 함께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낑낑대던 철제문.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저곳을 이용하게 되는 거구나.
“슈바인 스트링거. 작별 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입장에 실패한다면 어차피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입장에 성공한다면 거기서부터는 아직 아카식레코드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 벌어질 테니 의미가 없지요.”
“……얄미운 녀석이네. 내 쪽에서는 은근히 미운 정이 쌓여가고 있었는데.”
“프라이팬으로 저를 무참하게 두들겨 패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네요.”
“그때는 내가 정말로 억울하게 잡혀 들어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은요?”
“조금 생각이 달라졌지. 8층 탄식의 폭포에서 나는 달리아가 보여주는 과거를 체험했어.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건 분명히 벌어졌던 일이겠지.”
“그렇습니다.”
나는 곰 인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때 내 억지를 받아줘서 지금껏 살아올 수 있게 된 거니까.”
“그리고요?”
“이 감옥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 것에도 감사를 표할게.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진 못했겠지.”
“제가 당신에게 준 퀘스트는 이제 단 하나만이 남았습니다.”
최초의 메인 퀘스트 ‘연옥 탈옥’.
그때 퀘스트 설명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용기와 지략은 물론, 때로는 중첩된 행운도 필요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행운이 많이 따랐다.
난관에 봉착했을 때 눈 앞의 교도관장이 적절한 힌트를 주기도 했고.
“교도관장. 이제는 말해줄 수 있지 않아? 어째서 나를 도와주는지.”
애초에 교도관장이 죄수의 탈옥을 퀘스트로 내걸었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물심양면으로 나를 지원해 왔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은 채로.
“미안합니다. 아직 조건이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는 이제 내가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알고 있는데도?”
“그것은 진실의 편린을 주운 것에 불과합니다. 전체라 할 수 없지요.”
아직 내가 모르는 과거가 더 있다는 말일까.
가능성이 있는 건 하나뿐.
인간 박상식으로 지구에서 태어나기 전의 나.
과연 나는 무엇이었고, 푸르가토리움과는 무슨 상관이 있었던 걸까.
최종층에서 그것을 알아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무운을 빕니다. 이제부터는, 진짜로요.”
곰 인형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
[9층 ‘봉마의 울타리’로 이어지는 문을 붙잡았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문고리 앞엔 여덟 개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오답을 고를 경우엔 봉마의 울타리 내부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
짹짹짹짹.
층간 구역의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우릴 맞이한 건 싱그러운 향기의 초원이었다.
푸르른 녹음이 뭉게구름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적의도, 흉계도 느껴지지 않는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푸르가토리움에 여러 번 속은 나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눈속임이나 환시 같은 건가?”
토니아가 내 말을 반박했다.
“그런 얕은수로 페어리인 나를 속일 수는 없어. 원시 정령의 기운이 여기저기 솟구치는걸? 사악하거나 요사스러운 존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
“레나스. 네가 보기엔 어때?”
“생명 반응은 없습니다. 최대 출력으로 감지를 넓혀보아도 마찬가지고요.”
9층에는 죄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 르팔타커스 시온이 이곳을 밟았던 건가.
마치 게임의 시작 화면에서 보여주는 평화로운 전원 풍경을 보는 듯했다.
“어쩌면 죄수가 없기 때문에 뭔가 형태를 빚을 필요가 없었던 건지도 몰라.”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려야 할 존재는 하나뿐이다.
예상대로 안내 음성이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9층의 교도관 ■■ ■■■■ ■■가 등반죄수를 맞이합니다.]
“이름은 아직 알려주지 않는 거야?”
[교도관은 등반죄수가 자신의 이름을 들을 자격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는 건…… 우리가 보는 풍경이 전부가 아니란 소린가?”
[교도관이 설명하기를 이 장소는 울타리의 접경지대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교도관이 제출하는 문제를 풀어내야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전합니다.]
“좋아. 우리는 준비됐어.”
친구들과 나는 자연스레 원을 그리고 앉았다.
수건돌리기라도 하면 제법 어울릴 것 같은 따사로운 광경이었으나, 모두의 표정에는 분명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교도관이 어떤 문제를 출제하든지,
이제 곧 그 윤곽이 드러날 터였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푸르가토리움의 1층은 화룡도입니다.]
[화룡도를 상징하는 ‘죄’의 이름을 말하십시오.]
뭐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모두의 시선이 나와 제르비어스 폰타인을 향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여기에서 화룡도 출신은 우리 둘뿐이니까.
제르비어스가 뭔가 입을 떼려다가 멈칫했다.
뭔가를 발음하는 순간 그것이 답안으로 처리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다행히 설명은 끝난 게 아니었다.
[문제를 푸시려면 ‘정답’을 외치고 말씀하십시오.]
[각 문제에 답할 수 있는 제한 시간은 1분입니다.]
고작 60초.
이 정도라면 치밀한 분석보다는 본능적인 직관에 의지해야 할 만큼 짧은 시간이다.
망설이다가 제르비어스가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게 있나, 용사야?”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온 죄수들은 전부 죄를 지었지만…… 그 사연은 천차만별이야. 그건 화룡도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은 누군가를 해쳐서 들어온 셈이지. 그렇다면 학살이 답이 아닐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걸. 문제는 화룡도라며 구체적인 층의 이름을 언급했어. 학살이라는 개념은 모든 층의 죄수들에게 적용된다고 봐야 해.”
“끄응. 그렇다면 화룡도만의 뭔가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나는 눈을 감고 화룡도의 풍경을 떠올렸다.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뜨거운 온도. 딱딱한 바위와 해식 절벽. 섬 전체를 둘러싼 용암.
층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교도관이 내린 시련이다.
“저지른 죄가 아니라 상징하는 죄라고 했어. 그렇다면 죄수만이 아니라 교도관도 여기에 얽혀 있는 게 아닐까? 최소한 교도관이 죄수들에게 내린 시련이 그냥 정해지는 건 아닐 텐데.”
떠올려라. 우리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지?
7번 방 동료들의 얼굴이 하나씩 눈앞에 그려졌다. 화룡도의 죄수들에게 주어진 것은 강제 노역.
채석장에서 푸르가토늄이라는 광석을 캐내어 수레에 담는 일이 그것이었다.
제르비어스가 뭔가를 깨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층장이었을 때 나는 서로를 죽이는 것에만 열중하는 죄수들이 안타까워서 교도관과 협상했다. 마그마 볼이 내 제안이었고, 채굴은 교도관이 제안한 거였어.”
그렇다면 마그마 볼이 아니라 강제 노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
“그래?”
“어. 이게 만약 정답이라면 나머지 일곱 문제도 무엇인지 대충 감이 와. 캉이의 짐작이 맞았어. 문제가 여러 개라는 것 자체가 힌트가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중얼거리는 와중에 레나스가 이쪽을 바라봤다.
“관객님. 이제 15초 남았습니다.”
이것저것 고심할 틈이 없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답을 밀어붙이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것.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정답. 화룡도를 상징하는 죄는…….”
무릇 죄라는 것은 벌과 이어져 있다.
그러니 죄수들에게 내려진 형벌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답을 추측할 수 있다.
1층의 교도관 ‘화염에 꼬리를 담근 삵’이 죄수들에게 내린 형벌은 노역이었다.
“나태.”
그러니 내가 떠올린 최선의 답은 ‘나태’였다.
만약 틀렸다면?
우리의 탈옥 여정은 여기에서 끝나고 만다.
아스티나와 캉이는 초조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양손을 꼬옥 붙잡은 채로.
판결은 곧바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