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여덟 개의 죄 (2)
나는 상상으로 빚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를 불러냈다.
뚠이 없었다면 이런 초월적인 광경은 결코 만들어내지 못했겠지.
짝짝짝짝.
니오프론이 박수를 치며 내게로 날아왔다.
“놀랍습니다. 정말로 악몽포식자를 죽여버리다니오.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결과네요.”
그의 말대로 악몽포식자가 되살아날 기척 같은 건 없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황금색 기둥이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파고들어 갔다.
어쩌면 달의 핵을 뚫고 반대쪽 월면을 뚫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가 불안했다.
바로 니오프론이 자신도 감당 못할 짐승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요? 저는 악몽포식자가…….”
악기가 사라졌다 한들 니오프론이 음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따악.
몽현의 신은 손가락을 튕겼다.
“한 마리라고 한 적이 없는데요.”
다시 한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악몽포식자가 등장했을 때와 정확히 동일한 감각이.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소환문이 내 등 뒤에서 솟아올랐다.
그 소환문에서 튀어나온 흉신악살 같은 팔이 내 목덜미를 붙잡았다.
“끄으으윽!”
본능적으로 왼손으로 괴물의 팔을 뜯어내 보려 했으나 이도 여의찮았다.
결국 악몽포식자는 내 목과 양팔, 두 다리까지 모두 봉쇄해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월면을 걸어오는 니오프론의 등 뒤로 긴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달에는 공기가 없으므로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저 발자국은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신의 특성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오만하고 재수 없고 비겁한 것?”
“후후. 그것 또한 재밌는 해석이군요. 하지만 제가 원하는 답변은 아니에요.”
꿈의 신이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우리는 불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요. 필멸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공포인 죽음에서 해방된 겁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삶에 대한 의지도 희박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들 인간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필멸자들은 그렇기에 자손을 남겨 다음 세대로 희망을 넘기지요.
내가 못 하더라도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이루지 못한다면 그 손자가.
신은 그런 식으로 자기기만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한 궁극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버텨나갈 수밖에 없지요.”
녀석의 양 팔이 온 우주를 품을 듯이 펼쳐졌다.
“저는 몽현의 신. 세상 모든 것을 내 꿈 안에 넣을 수 있고 그 어떤 꿈이라도 지배하에 둘 수 있는 강력한 신입니다. 바로 당신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꿈을 먹고 자라왔지요.”
“…….”
“하지만 오직 나만의 감정은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한순간만이라도 훔쳐 온 것이 아닌, 흡수한 것이 아닌, 빼앗은 것이 아닌 감정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니오프론의 얼굴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검을 휘두르면 결코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하지만 내게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 녀석은 지독하리만치 조심스러운 녀석. 이 거리까지 접근했다는 건 승기가 완전히 상대 쪽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니까.
“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필멸자인 당신이 내게 그것을 줄 수 있습니까? 나만의 감정을 느끼게 해줄 수 있습니까?”
니오프론의 질문은 답변을 바라고 던진 것이 아니었다.
침묵 말고 무엇을 돌려줄 수 있겠냐고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입술을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오냐. 그렇게 해 주마. 이 빌어먹을 자식.”
처음으로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니오프론이 접근하게 만들었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기원검을 놓고,
그 칼자루를 바라보며 스킬을 시전했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사식 비천성검(飛天聖劍)]
기원검 네메시스가 니오프론의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 거리에선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내 계산이었으며 니오프론은 제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검의 칼끝은 니오프론의 맨살을 꿰뚫듯이 움직이다가 덜컥 붙잡혔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간격만을 남겨두고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군요. 거의 성공할 뻔했어요. 실제로 제가 아주 잠깐만이라도 겁을 먹었다면 이 칼이 제 심장에 박혔겠지요. 하지만 부족합니다. 제 존재가 소멸당할까 무섭거나 하지 않았으니까요.”
쩌저저적.
기원검의 칼날에 셀 수 없이 많은 균열이 일어났다.
“아무리 신격이 담긴 명검이라 하더라도, 숱한 신을 죽인 무기라 하더라도…… 닿지 못한다면 쓸모가 없습니다.”
토옥.
니오프론이 기원검을 튕기자 마치 폭죽이 터지듯 수백 개의 파편이 우주 공간으로 비산했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기세로.
눈앞에는 모든 조각을 잃어버린 기원검의 칼자루만이 허망하게 떠 있었다.
“인정하십시오. 당신의 패배로군요.”
“패배야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지.”
“마지막에 오니 겸손해지신 거군요. 그럼 얼마든지 당신의 목을…….”
“이 마지막 수마저 빗나간다면 말야.”
일신의 모든 내공을 오른팔에 밀어 넣었다.
후유증 따윈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무식한 운용이었으나 다행히 그것은 보답받았다.
기원검의 파편이 악몽포식자의 신체를 통과하면서 미세하게 강직도를 약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까스로 자유로워진 내 오른팔이 기원검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리고 아주 느릿느릿한 속도로 공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니오프론은 내가 하는 짓의 영문을 깨달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뭐 하는 거지요?”
“발악 중이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거지.”
기원검의 가드, 그중에서 칼날을 전부 잃고 평평해진 부분이 니오프론의 가슴에 닿았다.
물론 아무런 피해도, 효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한 접촉에 불과할 뿐.
“패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품격마저 버리시는 겁니까?”
“당신은 자기 것인 감정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왔지? 내 생각은 달라. 너는 무감정한 놈이 아니야.”
“제가 감정이 있다고요? 유쾌함도, 분노도, 슬픔도…… 어느 하나 빠짐없이 빼앗은 꿈속에서 주워온 것뿐인데 말인가요?”
세상의 모든 비극이 나를 향해 흘러들어온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흘려보내고, 하나뿐인 여동생마저 지켜내지 못하는 내 처지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고시원의 창틀을 열고 한가로이 거니는 모든 사람을 저주했다.
유모차에서 졸고 있는 어린 아기와 연인에게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청년과 벤치에 앉아 봄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 노인과 솜사탕을 입에 물며 싱그럽게 웃는 모든 소년을 증오했다.
그들이 가진 것을,
나는 갖지 못한 것을 언제나 부러워했다.
“부러움. 너는 처음부터 부러움을 갖고 있었어.”
세상의 모든 꿈을 삼켜도 해소되지 않는 거대한 갈증.
엿보는 것만으로는 잠재워지키는커녕 부채질하게 될 뿐인 어마어마한 결핍.
“적어도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있어. 내 안에도 여전히 떨치지 못한 그 감정이 남아 있으니까. 우리는 적어도 같은 꿈을 꿔본 적이 있는 거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초시계로도 잴 수 없는,
극히 섬세한 찰나의 시간 동안.
니오프론의 감정이 요동쳤다.
이 감옥에 붙잡혀 온 이래 처음으로 자기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본 것이다.
‘지금이다.’
녀석에게 싸움을 건 이래 지금까지 줄곧 노려왔던 순간. 신의 절대영역에 생긴 미세한 빈틈.
그것이 발생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니오프론의 등 뒤로 공간이 압축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흩어졌던 기원검의 파편들이 되돌아오는 광경이었다.
“넌 벨리오나를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을 빼앗았기에 지금 이렇게 된 거다.”
니오프론의 품속에 있는 기원검의 마지막 파편이 다른 파편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압력에 몽현의 신은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평화를 찾은 듯한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제가 접근하지 않았다면 어쩔 생각이었죠?”
“두 번째 계획을 사용했겠지.”
“제가 당신의 검을 부수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를 대비한 세 번째, 네 번째 계획을 준비했을 거야.”
“하하. 총 몇 개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까.”
“의미가 없어. 싸우면서 만들어내기도 하거든.”
“그런가요. 그것이 필멸자의 발악인 걸까요. 당신은 진정 꿈속에서도 꿈꾸는 자로군요.”
콰드드드득!
[EX급 무기 네메시스가 본체를 회복했습니다.]
기원검이 드디어 모든 형체를 수복하고 그 권능을 마음껏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원지는 니오프론의 심장과 지극히 가까웠다.
푸화아아악!
니오프론의 등 뒤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약한 중력 덕분에 그것은 바로 지면에 떨어지지 않고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흩날렸다.
“제 피는 무슨 색입니까, 슈바인 스트링거?”
“노을처럼 붉은색이다.”
“후후후. 그렇습니까. ……제가 아주 싫어하는 색이로군요.”
일신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악몽포식자가 수 천 개의 입을 앙다문 채 재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니오프론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르릉.
기원검을 천천히 뽑아내자 검 끝에는 핏방울처럼 붉은 보석이 올려져 있었다.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슈바인 스트링거. 죽기 전에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은…… 부러움이 맞군요. 최종층에 오를 당신이 부러워 미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고맙기도 합니다. 다시는 되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무언가를 선물 받은 느낌이거든요.”
“잘 가라. 좋은 승부였다.”
얼굴만 남은 니오프론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우릴 둘러싸고 있던 세계 전체가 암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별무리가 하나둘 지워진다.
발 딛고 있던 월면 또한 어둠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나는 혹여 잃어버릴까 층장의 열쇠를 움켜쥐었다.
[메인퀘스트 #2. ‘열쇠 수집’을 8/9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스탯 하나의 x2 효과, 혹은 스탯 하나의 한계돌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것을 뒤로 미뤘다.
당장 정하진 않아도 되겠지?
지금껏 만났던 상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적을 쓰러트렸다.
그러니 어쩌면 이 스탯 보너스를 쓸 일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작은 바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눈에 담고 싶은 작은 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꿈꾸었던 지구.”
이제는 탁구공보다 작은 크기로 멀어지고 있는 지구를 올려다보았다.
그 안에서 함께 축구를 했던 친구들, 교무실에서 나를 면박주었던 선생님들, 고백을 강요했던 선도부원.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문득 웃음이 났다.
“바깥세상에서 진짜 꿈을 꾼다면…… 한 번쯤은 다시 나를 초대해줘.”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나는 몽현의 신이 만들어낸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