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동상이몽 (4)
나는 우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이 실제 물리학 법칙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현상으로 연출되었으니까.
쿠아아아아아아앙!
내가 끌어당긴 달이 지표면과 충돌하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지형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전신에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다면 말라비틀어진 삼엽충 화석 같은 꼴이 될 뻔했다.
완전히 분해된 제트카이저의 잔해와 박살 난 학교의 건물이 주변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달의 크레이터에 서 있었다.
‘지구는 어떻게 됐지?’
황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창백한 푸른 행성이 까마득히 멀어지는 중이었다.
달이 지구를 밀어냈고, 그 충격에서 살아남은 나는 이 회색의 위성이 가진 중력에 사로잡힌 것이다.
우주급 규모로 펼쳐진 포켓볼이나 다름없었다.
지구에 묻은 먼지였던 내가 달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딸려 온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정신이 나가셨군요!”
월면의 언덕에서 니오프론과 불사조가 솟아올랐다. 몽현의 신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턱을 부들거리고 있었다.
“아주 인상적인 발광이었습니다. 인간이 이런 걸 상상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솔직히 박수 쳐 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조금 놀랐을 뿐, 아무리 기상천외한 방법을 꺼내 들어도 물리력으로 저를 죽일 순 없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널 죽이려고 한 건 아니야. 내가 노린 건 너를 감싸고 있던 불사조다.”
“으음?”
니오프론은 그제야 자신을 안락하게 감싸고 있던 불사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불멸하는 신수의 깃털이 빠른 속도로 광채를 잃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빛을 내뿜던 날개가 더 이상 타오르지 않게 된 것이다.
“달에는 대기가 없어. 당연히 불사조를 타오르게 하는 산소도 없지.”
그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과학적인 사실.
꿈의 무대를 월면으로 바꿔치기하면 불사조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었고 꿈의 세계는 몽주인 내 믿음을 그대로 구현해 냈다.
니오프론은 새카만 재가 되어 쓰러진 불사조를 한 번 물끄러미 내려보더니 옷을 툭툭 털었다.
“더 이상의 유희는 없을 겁니다, 슈바인 스트링거.”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한층 서늘해져 있었다.
“원하던 바다.”
활로(活路)는 언제나 사로(死路)에서 출발한다.
상대가 나를 공격해 들어올 때야말로 반격의 틈이 보일 거다.
-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야, 방장. 지금까지는 늘 선제공격을 양보해왔던 저자가 이제부턴 힘을 아끼지 않을 거야.
- 몽주로서의 내 지배력이 점점 강해져서?
- 맞아. 방금 방장이 해낸 건 나도 엄두가 안 나. 니오프론은 당황하고 있어. 이 정도까지 자신의 꿈속에서 저항한 존재가 여태껏 없었을 테니까.
니오프론의 입장에서 나는 종양이다.
천년왕국을 꿈꿀 만큼 굳건했던 자신의 꿈에 처음으로 침입한 암세포다.
당연히 전체에 비하면 티끌이나 다름없는 크기겠지만 그냥 놔두면 수명이 단축된다.
동상이몽(同床異夢).
이것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꿈을 꾸는 두 존재가 서로를 죽이는 대결이 될 것이다.
*
“아스티나. 괜찮은 거냐?”
“아무렇지도 않아.”
“계속 그 직육면체의 주변을 빙글빙글 서성이고 있잖아. 그러지 말고 체력을 아껴둬.”
아스티나는 제르비어스의 말에 반박할 말을 딱히 찾지 못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왕의 얼굴은 그 자신도 무척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 주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불안한 것이다.
자신들의 대장이 상대하고 있는 적수가 지금껏 마주친 그 어떤 강적보다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스티나는 자신의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는 토니아에게 물었다.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자세히는 모르겠어. 여기는 천체의 움직임에 일관성이란 게 없으니까. 대략…… 열 시간은 넘은 것 같아.”
“왜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는 거지? 승부가 났어도 벌써 났어야 하는 거 아냐?”
아스티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그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 10분 전부터 슈바인이 텔레파시에 접속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결코 긍정적인 신호로 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승부는 이미 나 버렸고 모두가 바라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도출된 건 아닐까.
니오프론이 모두를 농락하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부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이토록이나 답답한 일이었다.
“아직 형아의 냄새가 나. 죽지 않았어. 싸우고 있는 거야.”
아홉 개의 꼬리를 동그랗게 말아서 공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캉이의 말이었다.
아스티나는 캉이의 꼬리가 하나 없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기 때문에 저런 특이한 자세를 하는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다만 캉이의 말에 담긴 내용 덕분에 미약하게나마 마음을 풀 수 있었다.
파지지지지직!
그때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가 동시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상공 100여 미터의 하늘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지? 습격인가?”
“누가 습격을 해? 신탁파는 전부 죽었는걸.”
그런데도 토니아를 제외한 셋은 순식간에 임전 태세로 돌변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출몰하려 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꽈르르르릉!
갑판 위에 묵직한 벼락이 내리쳤다.
마법진을 발동시키며 당장이라도 요격을 퍼부으려던 아스티나는 침투자의 실루엣을 확인하고는 가까스로 술식을 중지시켰다.
“……레나스?”
“오래 걸려 죄송합니다. 진작에 관객님들 곁으로 오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찮않았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착지한 레나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토마타 소녀의 전신에 막대한 황금 전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제르비어스가 그 점을 지적했다.
“레나스. 평소와 기세가 꽤 다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바깥에서 상황을 보던 중에 상정 외의 조력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직접 설명하실 겁니다.”
레나스가 모두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자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벼락이 조금씩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뇌창을 든 한 사내의 모습을 빚어내었다.
“지드.”
“오호. 다들 무사해 있었군. 솔직히 말해서 전멸까지 예상했었는데 말이야. 내가 자네들을 조금 얕본 모양이야.”
너스레를 떨던 지드의 시선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정육면체의 결계에 닿았다.
신격의 죄수답게 그는 한순간에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저 안에?”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겠나.”
아스티나는 설공과 승부를 치르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요약했다. 물론 중요한 부분은 빼놓지 않았다.
특히 니오프론의 계획에 대해 들은 지드는 크게 놀랐다.
“자네들의 여정을 거꾸로 되짚어 나가겠다? 8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며 죄수들의 꿈을 집어삼켜서? 실로 녀석다운 야망이군. 슈바인은 그런 놈과 일 대 일 승부를 펼치고 있는 건가.”
제르비어스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지드. 어떻게 이 배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말해줄 생각은 없어?”
“간단해. 내 애병인 뇌창보다 저기 있는 인형 아가씨가 더 궁합이 잘 맞는 짝이라는 걸 알게 된 거지. 생명체라면 버텨낼 수 없는 출력까지도 너끈히 흡수하더군.”
레나스의 전신을 총탄 삼아 공간을 찢었고 그 결과 니오프론의 둥지에 숨어들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진작에 시도할 수도 있었던 거 아닌가?”
“그렇지. 만약 니오프론이 평소처럼 외부에도 신경을 쏟고 있었다면 튕겨 나갔을 거야. 나를 들여보냈다는 건 그 자식의 절대영역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지.”
지드의 설명에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설마 그걸 느낀 게 10분 정도 되지 않았어?”
“맞아. 자네들도 뭔가를 느낀 건가.”
“슈바인과의 연결이 그때쯤부터 끊겼거든. 도저히 안쪽의 상황을 알 수가 없어.”
뇌신은 지그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더니 직육면체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우리에겐 아주 낙관적인 상황이다.”
“낙관적이라고?”
“니오프론의 입장에서 나는 불청객이다. 아니, 좀도둑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지. 하지만 그 좀도둑이 마당에 들어서도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 그건 집주인이 지금 누군가와 맞서느라 정신이 팔렸다는 명백한 증거지.”
그게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캉이가 자기 가슴을 두 번 두드렸다.
“말했잖아. 형아 안 죽었다니까. 분명 지금 그 층장을 흠씬 패주고 있을걸.”
다음 순간.
직육면체의 표면을 만져보던 지드가 냅다 뇌창을 휘둘렀다.
지이이잉!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무력하게 튕겨 나올 뿐이었다.
모두가 놀란 것과 달리 장본인인 지드의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라는 듯.
“역시 단단하군. 하지만 니오프론과 직접 싸울 때만큼의 압박감은 아니야. 어쩌면 부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지드가 아스티나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자네들 전부 내게 힘을 빌려줄 수 있겠나? 저 인형 아가씨가 방금 전처럼 피뢰침이 되어주고 이곳에 모인 자들 전부가 힘을 집중시킨다면 저 결계를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제르비어스는 그 제안이 솔깃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거꾸로 정색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저런 고위 결계를 외부에서 강제로 타격한다면…… 안에 있는 자들은 그 충격을 몇 곱절로 받게 돼. 폐쇄된 공간 안에서 증폭된 폭발에 휩싸이겠지.”
“정답이야. 바로 그 이유로 자네들에게 제안한 걸세.”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겠지?”
“그래. 슈바인 스트링거와 니오프론을 동시에 공격하는 셈이 되겠지.”
캉이가 뜨악하고 놀랐다.
지드가 별다른 기색도 없이 무시무시한 말을 꺼냈다는 걸 가장 늦게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왜 그 짓을 해야 하지?”
“니오프론의 육체는 허약하다. 제대로 뇌전을 터트릴 수만 있다면 죽음을 피하지 못할 거다. 반면에 슈바인은 천혜의 육체를 가졌지. 내 전류를 견디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 최악의 경우엔 슈바인 혼자서 피해를 흡수한 뒤 니오프론은 멀쩡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럴 가능성도 물론 있다.”
“그렇다면 거절하겠어.”
“진심인가?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야. 슈바인이 저 안에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오프론의 신경을 오직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고 있잖아. 그건 나조차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지. 그 녀석은 층장의 숨통을 끊고 저 안에서 걸어 나올 거야. 우리는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돼.”
아스티나는 동료를 향한 철통같은 신뢰를 드러냈다. 하지만 지드의 눈매는 한층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실패한다면? 슈바인의 패배가 뜻하는 게 뭔지는 알고 있나. 안 그래도 위험천만한 니오프론에게 파천황의 애병인 기원검마저 넘겨준다는 뜻이야. 푸르가토리움의 역사를 통틀어 미증유의 재앙이 도래하게 된다. 모든 죄수가 녀석이 만들어낸 악몽 속에서 처참하게 고통받다 죽을 거야.”
아스티나는 잠시 주춤했다.
설공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천마와 마녀가 곁에서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 믿었던 가족과의 기적적인 재결합.
니오프론이 삼월초원에 당도하면 어찌 될 것인가.
설공이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 끔찍한 학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목숨을 잃지 않아도 죽음보다 더한 지옥에 내던져질 수도 있다.
지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감옥 전체를 담보로 잡아도 괜찮은 건가. 그 정도로 자네들의 친구를 신뢰하고 있나.”
한참 동안의 침묵이 배 위를 가득 채웠다.
아스티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선언했다.
“그래. 믿어. 저 안에서 걸어 나오는 건 우리들의 친구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