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동상이몽 (1)
“다짜고짜 사귀자니?”
이 무슨 고약한 농담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스티나는 농담기는 전혀 없는 얼굴로 나를 재촉해올 뿐이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취미는 없어. 그리고 여러 번 말해야 할 만큼 복잡한 단어도 아닐 텐데? 나랑 사귀자는 말이야.”
“……사귀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서 하는 말이야?”
“남녀가 교정을 거닐며 애착에 기반한 이성 교제를 펼치자는 거지. 여기에 다른 뜻도 있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거의 발악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상대와 말싸움 중엔 아무리 당황해도 속내를 드러내선 안 된다는 내 철칙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내게 손등을 보였다.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쥘 정도로 준수한 체력, 구미호인 호월랑을 계략으로 속일 정도로 총명한 두뇌, 교내 최강 무력 집단인 선도부의 진영으로 혼자 찾아올 만큼의 배짱.”
듣고 있는 나조차도 낯부끄러워질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 아스티나였다.
“이만하면 내 첫 번째 남친으로 손색이 없는 것 같은데?”
“교, 교감이라는 게 서로 전제되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었어.”
“그거야 사귀는 동안 천천히 알아가면 될 일.”
“학생의 본분은 어쩌고!”
“나는 입학 때부터 단 한 번도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는걸? 오히려 체육을 제외하면 어중간한 네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물론 교칙에 어긋나는 행위도 아니야.”
마치 모든 예상 질문에 답변을 준비해놓은 것처럼 청산유수였다.
먼저 총알이 바닥난 건 내 쪽이었다.
내가 어버버하고 있는 가운데 뚠이 귓속말을 보내왔다.
- 반항은 소용없을 거야, 방장.
- 소용이 없다니?
- 이 상황 자체가 네 무의식이 바라는 그림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니까. 로망의 실현이랄까.
- 이런 막가파식 고백이 내 로망이라고? 너무 모욕적인 거 아니야?
- 나는 속일 수 있겠지.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건 의미 없는 일이야, 방장. 너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 여자애랑 짝이 되고 싶은 거라고.
뭔가 억울했다.
어떻게 해서든 반박하고 싶었다.
- 그런 해석에 근거가 있어, 뚠?
- 네가 존경심을 갖고 있던 두 명의 죄수들은 교사가 되었어. 그리고 화룡도에서 충돌이 있었던 디멜은 라이벌로 등장했지. 네 꿈속에서 어떤 배역을 맡느냐는 절대 너와 무관하지 않아.
- …….
- 나는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아. 많은 어린 개체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인 영웅이라는 걸. 그걸 깨닫고 나서 난 무척 행복했어. 방장의 마음속에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 끄응. 만약 그렇다면 제르비어스가 내 짝궁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아스티나도 원래 내 여자친구로 등장해야 맞는 거 아니야?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 응?
- 말했듯이 저 여자애를 향한 방장의 마음이 무척 복잡다단하니까. 가까이 가고 싶지만, 저 애의 운명에 네가 깊이 개입하고 말았다는 걸,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 지켜줄 수 없었던 순간의 미안함이 융합된 걸로 보여. 그래서 저 여자애가 먼저 이렇게 다가와 주길 은근히 바랐던 거지.
- ……아주 심리학 박사 나셨구만!
- 헤헤. 사실 내가 쫌 영특한 구석이 있어.
- 칭찬 아니거든.
- 어쨌든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예의가…… 우악!
뚠이 비명을 내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스티나의 목검이 내 오른쪽 주머니를 쿡 찔러왔기 때문이다.
“긴장하면 주머니의 손 넣는 건 고유의 버릇이야? 숙녀의 고백을 들은 대처로는 빵점에 가까운데.”
“어, 어. 그게…….”
나는 황급히 손을 떼며 둘러댈 말을 찾았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내게 틈을 주지 않았다.
“대답해. 예스야, 노야? 내 인내심은 충분하지만, 사회적 위상을 고려하면 그렇게 오래 참아줄 수는 없어.”
노라고 대답했다간 바로 목검이 내 사타구니를 찌를 듯한 기세였다.
이런 젠장.
용왕 게브라둠에게 붙잡혔을 때도 이 정도로 무섭지는 않았다고!
아직 니오프론의 행방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이었다.
섣불리 이 몽중몽의 세계에서 중대한 선택을 내리기엔 가진 정보가 부족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대꾸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줘.”
“뭐라고?”
그딴 거 줄 수 없다, 10초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하는 식의 대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순순히 검을 치우며 말했다.
“얼마나 필요하지?”
“수, 수학여행! 최소한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까지는 기다려줬으면 하는데?”
최대한 이 자리를 피하려는 궁여지책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스티나는 내 대답에 충분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해보니 이 강당은 애착 관계의 시발점으로 삼기엔 낭만이 조금 부족하긴 해.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럭저럭 우리 부원들이 흡족해할 수 있겠어.”
아스티나가 패검한 채 팔짱을 꼈다.
그리고 이 꿈에서 처음 보는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준 만큼 만족할만한 순간을 내게 선물해줘야 할 거야.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고백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라면 우주 끝까지라도 널 쫓아갈 테니까.”
*
강당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흐억. 죽을 뻔했다. 여러 의미로 지독한 위기였어.”
“방장. 그 여자애한테 왜 그렇게 대답했던 거야? 그냥 네 마음에 솔직하면 되는 문젠데.”
“어떻게 그러냐! 여긴 내 꿈속이잖아!”
“그러니까.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현실의 쟤는 알지 못할 텐데. 나는 입맞춤이라도 할 줄 알았어.”
“시끄러!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 역대 최악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판국에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솔직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긴. 인간들의 짝짓기 풍습은 너무 쓸데없이 복잡한 측면이 있다니깐.”
“아오, 이걸!”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깐족대는 뚠의 뒤통수에 손가락 꿀밤을 먹여주려 했다.
휘익!
하지만 뚠은 내 무영보에 버금가는 신묘한 보법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인형의 육체를 움직이는 데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수학여행까지라고 했잖아? 그 수학여행이라는 게 뭔데? 학생들이 모여 곱셈과 나눗셈의 비밀을 파헤치는 의식 같은 건가.”
“그 수학이 아니야. 전교생이 학교를 떠나서 유적지나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는 거지. 보통 수학여행은 봄에 잡혀 있으니까 최소한 몇 달은 공백이 생기는 셈이지.”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
이 몽중몽의 세계에서 내가 몇 달이나 머무를 확률은 지극히 낮다. 그때까지 아스티나와 선도부는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못할 거다,
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눈? 가을에 갑자기 눈이 내린다고?”
하늘에서 눈송이가 휘날렸다.
그 눈송이들은 곧 교정에 심긴 가로수와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위에 떨어졌다.
“학생들이 없어졌어?”
체육대회의 피날레는 분명 계주였을 터다.
그래서 운동장에는 골대가 이미 치워지고 트랙을 따라 학생들이 빼곡히 앉아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 한 명의 학생들도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아니야. 증발한 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
운동장 곳곳에서 학생들의 모습이 잔영처럼 튀어나왔다가 곧 사라졌다.
녹화 영상을 1,000배속으로 감은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암시하는 불길한 상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말도 안 돼.”
빠르게 감기 효과는 곧 천천히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눈송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교정엔 분홍색 벚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살랑이는 봄바람이 코를 간질여서 재채기가 나올 뻔했다.
“10초 만에 가을에서 봄이 됐다고?”
가을 체육대회의 흔적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체육대회를 알리는 현수막도, 계주를 위한 트랙도, 우승팀을 위한 시상대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운동장은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만 복장들이 전부 바뀌었다.
땀에 젖은 운동복이 아니라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복차림의 학생들이 설레는 얼굴로 모여 있었다.
“방장. 옷이 바뀌었는데?”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잔뜩 멋을 부린 후드티에 청자켓, 등에는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 쇳덩이들은 뭐야?”
운동장 한쪽에 일렬로 늘어선 관광버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쿨버스일 리는 없다.
이런 대낮에 스쿨버스가 단체로 운동장을 점거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저 풍경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수학여행 날로…… 점프해 버린 거야.”
허겁지겁 뚠의 정수리와 연결된 금속 체인을 배낭에 매달았다. 그리고 운동장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내 예상대로 각 반의 선생님들이 편한 활동복을 갖춘 채 학생들을 집합시키고 있었다.
“오, 반장. 왔구나.”
제르비어스가 퀭한 얼굴로 나를 맞이해줬다.
녀석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몇 시간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어버린 것 마냥.
“당연히 노래 연습하느라 그랬지. 수학여행 둘째 날에 장기자랑이 있으니까. 너 배낭에 마실 것 좀 있냐? 목이 칼칼하네.”
“네가 노래를 한다고? 너무 안 어울리잖아.”
“안 어울린다니. ⟨파이어드래곤⟩의 보컬을 뭘로 보는 거야?”
“파이어…… 드래곤?”
“화룡고 밴드부 말야. 어제까지 같이 합숙해놓고 왜 모르쇠냐. 설마 악보도 안 챙긴 건 아니겠지?”
“내가 악보를 왜 챙기는데?”
“네놈 새끼가 드러머니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르비어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드러머라니. 나는 평생 드럼 스틱을 손에 쥐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거늘.
- 이것도 방장의 바람이 이뤄지고 있는 거야.
- 내 바람?
- 응. 수학여행이라는 거. 친구들과 놀러 가는 거라며? 방장이 이런 평화로운 한때를 원했기 때문에 꿈이 그 순간으로 시점을 옮긴 거지. 아주 긍정적인 신호야.
- 어째서?
- 공간을 변형시키지 않고 시점만 빠르게 이동시키는 건 우리 종족 중에서도 극소수의 천재들만 가능한 기술이야. 방장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걸 해낸 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꿈의 절대조건을 바꿔 버렸다.
뚠은 그것이 몽주로서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척도라고 설명했다.
- 그리고 그 여자애랑 빨리 짝지가 되고 싶은 무의식이 작용한 걸지도.
-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입을 꿰매버린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 수 있어. 너는 지금 봉제 인형이니까.
- ……무서워, 방장.
내가 배낭에 달린 뚠을 노려보는 사이 담임인 천마 류운학이 확성기를 통해 소리쳤다.
“시간 됐으니 이동한다! 1반부터 버스에 탑승하도록. 휴게소에도 두 번 들릴 거니까 화장실 안 갔다 온 놈은 그냥 참앗!”
나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 사이에 끼어버린 한 마리 송사리가 되어 학생들 무리를 따라갔다.
학생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담탱이가 왜 소지품 검사를 안 하지?”
“버스에 타면 하려는 거 아닐까. 술은 잘 숨겼냐?”
“장난해. 작년에 프x글스 통에 담았다가 걸린 뒤로 이제는 완벽히 치밀해졌지. 텀블러로 바꿨다. 보리차 안에 밀봉해서 숨겼어. 냄새도 절대 안 나. 후후.”
소박한 탈선을 꿈꾸는 귀여운 작당 모의였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버스의 전면에 붙은 행선지의 이름이었다.
보통 수학여행지로 거의 꼽히지 않는 두메산골.
‘뭔가 이상하다.’
나는 뒷자리를 맡아놓겠다고 설치는 제르비어스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꿈속이어서인지 마족의 저주 운운하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야. 왜 그래, 인마?”
“기다려 봐. 확인할 게 있어.”
선두에서 반장이 어물쩍대고 있자 버스 화물칸 옆에 서 있던 천마가 짜증을 냈다.
“박상식. 왜 그러냐? 우리가 먼저 탑승 완료해야 다음 반이 이동할 거 아냐, 임마.”
“선생님도 비켜서세요.”
“……뭐?”
나는 대답 대신에 인벤토리에서 기원검 네메시스를 꺼내 손에 쥐었다.
즈우우우우웅.
검기를 불어넣자 내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기파에 밀려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무도 이 버스에 타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