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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285화 (285/300)

#285. 화룡고등학교 1반 반장 (4)

“방장. 꼭 저길 들어가야만 해?”

뚠은 내 체육복 주머니 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네가 그랬잖아. 여긴 내 꿈속이고 내가 간절히 바랐던 세상이 구현된 장소라고.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무서운걸. 그리고 생각해 봐, 슈바인. 현실 속이라면 모를까 꿈속에서 두더지 토인인 내가 무서워하는 게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야.”

“어어? 그러네?”

강력한 금속 괴물인 이블버스터도 종잇장처럼 만들어버린 뚠이었다.

뚠 아티르는 꿈속 한정 ‘용감무쌍한 용사’나 다름없었다.

“그런 내가 저길 무서워하는 건 내 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야. 몽주인 방장의 감정에 영향을 받는 거지. 들어서는 순간 악몽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어.”

“내가 무서워하는 게 저기에 있다고?”

“우리 두더지 토인 같은 경우는 흔히 악몽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건 홍수야. 토굴에 물이 차오르면 죽을지 모른다는 종족의 본능 때문이지.”

어쩌면 강당 안에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천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뚠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강당의 문을 벌컥 열었다.

“이 답답아.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뭐가 됐든 확인해 봐야지. 니오프론이 이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체육대회를 즐기러 여기 온 게 아니라고.”

일군의 무리가 제식훈련을 받는 군인들처럼 모여 있었다.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선도부 학생들이었다.

왼팔에는 ‘선도’라고 적혀 있는 완장, 그리고 허리춤에는 무시무시한 목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엄청난 살기네.’

단칼에 적을 도륙 낼 수 있는 고수들 사이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사실상 이 집단이 폭력 서클이나 다름없다는 말의 진의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단상 위에 서 있는 실루엣을 향해 걸어갔다.

“네가 선도부장이야? 나를 찾았다고?”

“그래, 1반 반장 박상식. 용감하게도 혼자 왔네?”

엄밀히는 혼자 온 게 아니라 뚠과 함께였지만,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도부장이 일어나서 내게 또각또각 걸어왔다.

잠깐.

또각또각이라고?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무사히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이 강당에 뼈를 묻게 될지가 결정될 거야.”

맵시 있는 교복 치마 아래로 낭창낭창한 각선미가 엿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놀랍게도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스티나?”

*

진작에 행방을 궁금해했어야 했다.

감옥에서 사귄 모든 친구가 등장하는 이 꿈속에서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최후의 일인.

아스티나 류가 선도부장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친한 척 이름 부르지 말아줬으면 해, 1반 반장. 그건 내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걸로 비춰질 수 있거든.”

“어, 어……. 미안. 주의할게.”

그동안 함께 감옥을 오르면서 사선을 넘어온 아스티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 하지만 표정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녀와 처음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삼월초원의 백묘탑에 정체불명의 습격자가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찾아간 마법서고.

그곳에서 흑기사의 갑옷을 입은 채 나를 노려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우리 선도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모른다.

그야 알 턱이 없잖아.

여기는 내가 꾸는 꿈속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녀본 적 없는 학교의 존재하지도 않는 동창들로 우글대는 곳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걸? 서, 설명해 주겠어?”

아스티나의 고개가 갸웃했다.

마치 내 꿍꿍이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는 듯이.

그때 주머니 속의 뚠이 귓속말을 걸어왔다.

- 쟤구나. 비르카가 말했던 여자애가.

- 비르카가 무슨 말을 했는데?

- 방장이 쩔쩔매는 은발의 미녀가 있다고 했거든. 나야 종족이 다르니까 미모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비르카는 쟤를 엄청 경계하고 있었어. 방장을 꽉 쥐고 흔드는 사람이라고.

- ……말했듯이 비르카의 말을 전부 믿어선 안 돼. 물론 아스티나가 대단한 미녀이긴 하지만 그 스켈레톤 녀석은 호들갑이 특기잖아.

- 생김새 때문만은 아니야. 나는 몽주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어. 방장의 무의식은 저 여자애를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정해두고 있는걸.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야.

- 내가 아스티나를 무서워한다고? 어째서?

아스티나는 내 친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과 냉정함, 그리고 불굴의 용기 또한 갖춘 듬직한 아군이다.

내가 무서워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 이제 알겠어. 이건 아주 복잡한 감정의 집합체야. 놀랍게도 공포, 미안함, 책임감 같은 것들이 한 몸처럼 융합해 있는 거지. 단 한 사람에게 할당된 감정이라고 하기엔 신기할 정도인데?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건 수컷으로서 가진 본능이…….

- 이익, 그만해! 지금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할 때가 아니잖아!

뚠이 더 이상 내 무의식을 현미경에 올려놓은 플라스크처럼 들여다보게 할 수는 없었다.

유심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아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얼굴이 벌게져선 주머니를 움켜잡는 거지? 그것도 나와 대화하고 있는 와중에. 선도부를 무시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어디까지 했지?”

“딴청을 피우는 것 같지만 필요하다면 설명해 주겠어. 우리 선도부는 교내의 모든 크고 작은 행사를 주관하고 있어. 학생부가 양지의 수뇌부라면 우리는 음지의 수뇌부인 셈이지.”

“국가의 비밀첩보 조직 같은 건가?”

“정확해. 바보는 아닌가 보네?”

음. 비꼰 거였는데 의외로 정답을 맞힌 모양이다.

아스티나는 내 주변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어깨에는 목검을 느슨하게 올려놓은 채로.

“그중에서도 가을 체육대회는 무척 중요한 행사야. 특히나 축구 결승전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프로파간다를 내세우기 가장 좋은 무대지.”

“프로파간다?”

아니, 냉전 시대의 베를린이나 블라디보스톡도 아니고 여기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잖아?

“우리 선도부가 우승팀으로 정해둔 건 8반이었어. 곧 아이돌로 데뷔하는 교내의 슈퍼스타 호월랑을 MVP로 만들 생각이었지. 그런데 네가 그걸 전부 망쳐버렸어.”

점차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너희 선도부의 큰 그림을 내가 망쳐버렸다는 거야? 캉이, 아니 호월랑이 있는 8반을 축구로 이기는 바람에?”

“바로 그런 거야. 네가 설쳐버리는 바람에 선도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어.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지?”

뭐야. 완전히 억지잖아.

나는 그냥 축구 대회에서 열심히 뛴 것뿐이라고.

그것도 절실히 우승을 원했다기보다는 일종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건데.

“전혀 반성하는 얼굴이 아니네? 물론 우리 선도부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장본인이니만큼 제법 배짱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만은.”

나와 아스티나를 둘러싼 선도부원들의 기세가 한층 농밀해졌다.

하지만 그와 달리 그들은 오히려 넓은 원을 그리면서 우리를 향해 멀어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멀어져? 아니다.

이건 삼월초원의 귀혼산장에서 자주 보던 그림이다.

마치 생사결을 합의한 두 무인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관객의 모습이었다.

아스티나가 목검을 내 가슴팍에 겨누었다.

“화룡고 선도부장으로서 이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문제야.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너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1반 반장.”

“대결? 싸우자는 거야?”

“그래.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입회인은 나를 제외한 선도부 전원이 될 거고.”

어이어이.

그런 건 80년대 열혈 학원만화에서도 코웃음을 칠 설정이라고. 고등학교 강당에서 목검을 들고 생사결을 펼친다니?

“이봐. 아무나 저 친구에게 목검 하나만 빌려줘.”

지켜보던 선도부원 중에서 만검패웅처럼 덩치가 큰 학생 하나가 내게 목검을 집어던졌다.

타악!

무의식중에 받아 들긴 했으나 나는 좀처럼 이 흐름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그럼 간다. 멍하니 서 있다간 금방 다리가 부러질걸.”

은빛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한 개의 선이 되었다.

아스티나가 순식간에 내 간격을 침범해 들어와서 목검으로 수평 베기를 시전한 것이다.

어이없게도 거기엔 검기가 실려 있었다.

“우와아아악!”

무영보를 시전해 뒤로 물러났지만, 가슴팍에 화끈한 통증이 아로새겨졌다.

아스티나의 목검 끝에는 찢어진 내 체육복 조각이 걸려 있었다.

‘방금 그거, 천마회풍일섬이었어. 그것도 대단한 경지의.’

아무래도 이 꿈속의 아스티나는 진심으로 나를 죽일 심산인 모양이었다.

이거 정말 비상사탠데.

마지막으로 아스티나와 검을 맞대본 게 언제였지?

층간 구역에서 대련했던 것이 마지막 아니었던가.

이후 아스티나가 마법사로 노선을 확고히 정한 이후로는 칼싸움을 벌여본 적이 없었으니까.

‘일단은 힘을 써서라도 제압해야 하나?’

까드드드득!

멍청하게 서서 목을 내줄 수야 없었다.

나는 목검에 검기를 불어넣어 아스티나의 연격을 막아내었다.

강 대 강의 정면충돌이 일어나자 강당의 골조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발생했다.

쩌저저적.

다음 순간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내 목검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아스티나의 목검은 멀쩡했다.

“뭘 놀라고 있는 거야? 나는 선도부장뿐 아니라 화룡고 검도부의 주장이기도 해. 나와 합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칭찬은 해 주지.”

이대로 검투가 이어졌다간 오래가지 않아 내 목검이 박살 날 것은 자명했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너 이래도 되는 거야?”

“뭐가?”

“너는 아스티나 류잖아!”

“내 이름을 설마 내가 모를거라고 생각해서 내뱉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너는 교장 선생님의 딸이잖아. 일레인 쿠디슈 선생님 말야. 네가 이러는 걸 아시면…….”

그분이 좋아하실까, 라는 말을 꺼낼 참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내뱉지 못했던 이유는 아스티나의 등 뒤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우리 선도부밖에 모르는 비밀인데.”

그게 어떻게 비밀일 수가 있어.

이 학교 선생과 학생을 통틀어서 은발은 둘밖에 없는데!

따지고 싶었으나 이 세계의 룰이 내 무의식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아는 마당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는 목검을 내던졌다.

전력을 다해 부딪혀오는 아스티나를 막으려면 아론다이트나 기원검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인벤토리가 열리질 않았다.

‘뭐지?’

내가 당황해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 대항할 수 없을 거야, 방장.

- 어째서?

- 네 무의식이 저 여자애가 다치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아마 백번 싸우면 백번 질걸.

그렇다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내가 축구 결승전에서 캉이에게 비르카의 뼈다귀를 던지는 꼼수까지 쓰며 이겨야 했던 이유는 이 꿈속에서 패배를 겪어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니오프론과의 결전에서 절대적 영향을 미칠 테니까.

당연히 이 명제는 아스티나에게도 적용된다.

콰아아아아앙!

강당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널 없앨 수밖에.”

분노한 아스티나가 은발을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기세라면 실존하는 아스티나보다 더욱 강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압도적인 기세.

“잠깐만!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어?”

말을 꺼내면서도 이게 먹힐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사결을 고집하는 선도부장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내 말을 들어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스티나는 검을 거두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지. 네가 내 검에 죽지 않고 멀쩡히 강당에서 걸어 나갈 방법이.”

뭐야.

그런 게 있다면 진작에 알려줬어야 할 거 아니야?

“선도부장이 교내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지 않는 유일한 경우는 부칙에 따라 면책 대상을 상대할 때뿐이야. 네가 그 면책 대상일 경우라면 모든 게 용납되지.”

“그럼 그렇게 할게. 그 면책 대상,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 순간 지켜보던 모든 선도부원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스티나가 목검을 허리춤에 다시 꽂은 뒤 내게 걸어왔다.

살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고양이처럼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선도부의 검은 연인에게라면 휘둘러지지 않아. 즉, 네가 내 남자친구가 되면 돼.”

“……어?”

“선택해. 나랑 사귀든가. 여기에서 죽든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무시무시한 고백을 받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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