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화룡고등학교 1반 반장 (3)
⟨흙 먹는 용사 뚠⟩
⟨극장판: 마왕성 폭파 대작전⟩
어처구니없게도 마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귀여운 두더지가 2D 캐릭터로 그려진 채 마녀의 핸드폰 액정 속에서 달리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황금 갑옷과 화려한 보검이 눈에 띄었다.
‘아론다이트 같은데?’
뚠은 벌써 세 번째 극장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었다.
당연히 이런 세계가 만들어진 이유는 나에게 있다. 뚠이 사랑스럽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을 구하는 용사인 것도 납득이 된다.
뚠 아티르는 대단한 잠꾸러기로 얼핏 게을러만 보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언제나 용기를 냈다.
실수로 성검 아론다이트를 노출해서 레이스 오르콰이움이 발작했을 땐 흙으로 검을 덮어 위기를 모면했었다.
그리고 마그마 볼에서는 층장이었던 제르비어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공을 분화구에 집어넣었다.
무엇보다 뚠의 스킬 ‘엄마 쟤 흙먹어’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화룡도에서 말라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뚠이야말로 나의 구원자.
그렇게 생각하는 무의식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큰일인데.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라면…… 만날 수가 없잖아? 불러올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담.’
그때 마녀의 입에서 희망의 불씨가 될만한 단서가 나왔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저도 알겠더라고요. 뚠의 엉덩이를 만져보면 정말 복실복실한 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만져보셨다고요? 어떻게요?”
“학생부 류 선생님이 복장 불량으로 압수한 물건 중에서…… 어딜 가는 거죠, 상식 군?”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찬 뒤 학교 건물의 외벽을 달려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시간마저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교무실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실내로 들어서자 의자 위에 늘어져 있던 천마 류운학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이긴 거냐? 해트트릭은?”
“이제 겨우 전반전 끝났어요, 선생님. 0:0이고요.”
“이런 허약한 것들 같으니! 이기기 전엔 돌아올 생각하지 말라 했거늘.”
“그 승리를 위해서 선생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천마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나보고 뛰라고? 그러면 8반 애들이 모두 주화입마에 걸릴 텐데?”
“아니, 그게 아니고요.”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천마는 책상 밑의 큼지막한 서랍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그 안엔 귀여운 모자를 쓴 뚠의 인형이 있었다.
“찾았다, 뚠! 여기 있었구나? 뭐라고 말 좀 해봐.”
“너 설마 인형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거냐?”
뭐 이런 정신 나간 녀석이 있나 싶은 눈빛을 대하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천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뒤통수에 버튼이 있다. 그걸 눌러야 목소리가 나와.”
내가 그대로 따라 하니 익숙한 뚠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나를 찾아줬구나, 방장! 엉엉. 이 어두운 상자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하고 죽는 줄 알았어.”
“에엥? 그 인형이 하는 말에 그런 대사도 있었나.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르네.”
“어쨌든 감사합니다! 꼭 이겨서 돌아갈게요!”
나는 대충 천마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복도로 나왔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뚠과 대화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 방장이 만들어낸 꿈이니까 나도 법칙을 따라야지, 뭐.”
“움직일 순 있고?”
“아니. 불가능해. 몇 번이나 시도해봤지만 소용없었어.”
뚠의 설명에 따르면 이 꿈의 몽주인 내가 ‘일어날 거라 믿는 일’만 벌어질 것이라는 거였다.
인형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세계관을 내가 만들어줘야 뚠의 운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무슨 수로?”
“으으음.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워. 내가 몽주라면 그냥 할 수 있는 거니까.”
뚠의 종족은 꿈을 다루는 데 있어 타고난 천재다. 그리고 천재의 단점은 범재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때 드러난다.
자신은 쉽게 해내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것이다.
“중간단계가 필요할지도 몰라, 방장. 떠오르는 게 없어?”
“……어쩌면 가능할지도. 잠깐 기다려 봐.”
인형을 손바닥으로 감싼 뒤 나는 강렬하게 소망했다.
뚠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 건 아니다.
그건 극복해야 할 장벽이 너무 크다. 나는 인형에 영혼을 불어넣는 강령술사가 아니니까.
대신에 다른 것을 소망했다. 꿈속에서도 위화감이 없는 것을.
손바닥을 떼어내자 뚠의 등 뒤에는 없었던 것이 붙어 있었다. AA형 건전지 2개였다.
곧 뚠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우와아아. 어떻게 한 거야, 방장?”
“네가 그랬잖아. 중간 단계를 상상해보라고. 내가 있던 세계에선 건전지가 있는 인형은 움직일 수도 있어.”
“대단해. 두 번째 단계인 환경 변화를 이뤄낸 거야. 이제 성공의 경험이 쌓일수록 익숙해지고 자신감도 붙을 거야.”
“그리고 니오프론이 돌아왔을 때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겠지.”
나는 내 손바닥만 한 인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
삐이이이이익!
후반전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운동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후반전에는 반드시 골을 넣자고, 으라차차!”
폭렬마왕의 우렁찬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층장 제르비어스의 성격이 많이 달라졌구나. 저건 방장이 바라보는 모습이 투영된 거야.”
체육복 주머니 속에서 두더지 인형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그물 안에 공을 집어넣으면 이기는 게임이라고? 마그마 볼이랑 비슷하네.”
“어. 공을 갖고 어딘가에 집어넣는 스포츠는 우주 공통인 모양이야.”
“감옥에 오기 전에 좋아하던 놀이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사춘기를 맞이했었으니까. 이런 식의 축구는 해본 적도 없고 관전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야.”
그냥 꿈의 시작이 경기에 불려 나오는 거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 무의식은 이런 꿈을 만들어낸 걸까? 뚠은 거기에 납득할 만한 가설을 세워서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놀이 자체에는 의미가 없을 거야. 방장은 이 놀이로 인해 벌어지는 환경을 바란 거야. 내가 말했지? 평생에 걸쳐 추구해왔던 것. 갖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보물을 떠올리라고.”
내가 갖고 싶었던 보물.
꿈속에서라도 속하고 싶었던 세계.
그건 이렇게 자유롭게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보는 것이었을까.
“정답일 거야. 그리고 그 꿈속에 누가 함께 있느냐도 빼놓으면 안 되고.”
내 사춘기 시절은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훗날엔 업계 최고의 알파 테스터가 되었으나 결국엔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고립되었다.
그런 외로웠던 나날의 반대항이 지금 펼쳐지고 있었다.
“디멜이 온다! 막아. 저 녀석이 공을 잡으면 이상하게 미끄러워진단 말야.”
반장이 되어서 가을 체육대회의 축구 결승전에 나서는 일원이 되는 것.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꿈의 힘을 빌려 한 번이라도 닿고 싶은 노스탤지어였다.
‘그러고 보니 꽤 즐거운 일이네.’
이 몽중몽의 세계는 분명히 엉뚱하고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부분투성이였으나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감옥에 붙잡혀 온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공 하나를 던져준 것뿐인데 소년들은 땀을 흘리며 가을의 잔디밭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청춘만화의 한 장면처럼.
“뚠. 내 소망이 단지 친구들과 한바탕 어울려서 놀고 싶은 거였다면, 꼭 이 경기에서 이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럴 필요는 없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뚠은 의외로 단호하게 고집했다.
“이게 그냥 낮잠이었다면 당연히 그럴 이유는 없을 거야. 하지만 방장에게는 지금 쓰러트려야 할 적이 있잖아? 그렇다면 이 꿈에서 패배의 잔상을 가지면 안 돼. 만약 지면 몽주로서의 장악력이 약해질 테니까.”
“그렇다면 이겨야겠군.”
다행히 나에겐 무수히도 많은 승리의 경험이 있다.
게임 속에서도, 푸르가토리움의 등반 과정에서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제르비어스! 패스해.”
마왕이 넘겨준 공이 나에게 날아왔다.
가슴으로 받아낸 뒤 곧장 용사전용기를 시전했다.
그림자를 지워낼 만큼 경이로운 보법을.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이식 무영보(無影步)]
내 공을 빼앗기 위해 덤벼든 디멜은 잔영을 뚫고 넘어졌을 뿐이다.
“사라졌어?”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아스라이 멀어졌다.
내 눈앞에는 어느새 8반의 골대와 그것을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는 구미호 소년이 있었다.
“제법 인상적인 드리블을 하네? 1반 반장.”
“드리블만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전반전에 봤잖아? 네 슛은 절대 통하지 않아. 무조건 막아낼 수 있어.”
상대 팀 수비수들이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만큼 골키퍼인 캉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 꿈속의 캉이는 지독하리만치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일단 팔다리뿐 아니라 아홉 개의 꼬리로 슛을 쳐낸다. 여차하면 용을 쓰러트렸던 궁극기인 여우트림을 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사기인 것은 분신술이다.
가까스로 빈 곳을 노려 슛을 쏘아도 분신이 솟아 나와 그것을 막아낸다.
그러니 골을 넣기 위해서는 무척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이 필요로 한다.
바로 캉이가 ‘인지하지 못하는 틈’을 만들어내 골대를 비워야 한다는 것.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공략할 방법을 진작에 생각해 둔 뒤였다.
“비르카! 다시 한번 실례할게.”
나는 여전히 응원석에서 방방 뛰고 있는 스켈레톤 친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엑? 내 갈비뼈!”
허공섭물과 사령통제마법이 합쳐져 갈비뼈는 곧 내 오른손 안으로 부메랑처럼 날아들었다.
캉이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그걸로 날 가격하려고?”
“설마. 그러면 골키퍼 차징이게? 나는 널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대신에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겠지.
나는 비르카의 뼈를 있는 힘껏 코너를 향해 집어 던졌다.
“자, 물어와!”
그러자 갯과 특유의 본능에 지배당한 캉이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뼈를 낚아챘다. 관객에게 관람료를 받아도 될 만큼 우아한 동작이었다.
“읍? 애아 애 이얼 울오 이이?(내가 왜 이걸 물고 있지?”
캉이는 당황한 채 공중에서 허우적댔다.
나는 씨익 웃으며 비어버린 골대를 향해 툭하고 공을 밀어 넣었다.
또르르르.
축구공은 주인 없는 골대 속으로 유려하게 빨려 들어갔다.
“퉷! 이건 사기야! 말도 안 돼!”
“후후.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막대기로 너와 실컷 놀아준 적이 많거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거다.”
그 뒤로 캉이는 똑같은 수에 당하지 않겠다고 방방 뛰었다. 하지만 같은 수를 또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한 골을 확보한 채로 수비에만 가담하면 문제 될 것은 없었으니까.
삐이이이익!
그렇게 시간은 흘러 축구 결승전은 우리 1반의 승리로 끝났다. 나는 잔뜩 신이 난 제르비어스와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헹가래를 당했다.
“잘했다, 이 자식!”
거의 대기권까지 솟아오를 만큼 몇 번 집어던져진 뒤에야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졌다.
“네가 1반 반장 박상식이니?”
한 여학생이 내게 걸어와 말을 걸었다.
“어. 그런데?”
“지금 강당으로 가봐. 선도부장이 널 찾아.”
선도부장?
요즘에도 그런 직책이 고등학교에 남아 있던가.
“안 가면?”
“그러면 너 학교생활 쫑나는 거지. 그런 것까지 알려줘야 하니? 암튼 나는 분명히 전했어.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여학생은 그 길로 총총 사라졌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제르비어스가 다급히 걸어왔다. 녀석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너 좆된 것 같다, 상식아.”
“왜?”
“말이 선도부지, 사실은 문제아들이 모여 있는 폭력 서클이잖아. 끌려가면 뒈지는 거야.”
무심코 바라본 강당의 지붕에서 예사롭지 않은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공포 영화 속의 폐가처럼.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뱀의 아가리처럼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누군가가 저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